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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꽃님의 서재
  • 은의 세계
  • 위수정
  • 13,050원 (10%720)
  • 2022-01-13
  • : 576
여덟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가의 신춘문예 등단작인 중편, <무덤이 조금씩>이 수록된 걸 보면 작가의 첫 소설집인 듯하다.

새해 첫 소설인데 된통 걸렸다. 편편이 어렵다. 불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다른 독자는 여백이 많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개연성 떨어지고 산발적이며 일관성 없는 사건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진행, 툭 툭 끊어지는 구성과 모호한 결말.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긴장을 하긴 했는데, 이게 이야기 자체가 주는 긴장감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은, 그 끝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로서의 조마조마한 마음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어둡고 시니컬한 분위기에 현실을 초월한, 꿈을 꾸듯 몽롱한 감각엔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보이지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기보다 오로지 작가 자신만을 위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이야기는 소통이다. 독자들을 위해 쓰는 게 아니라면 작가는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짓고 쓰나. 물론 작가 자신이 즐기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고 출품을 위한 글쓰기는 평단을 의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독자를 소외시키는 문학이 의미가 있을까. 단지 독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일까.

영화감독이고 만화 작가이면서 글쓰기 강사, 이야기 컨설턴트인 ‘브라이언 맥도널드(Brian McDonald)’가 쓴 창작에 관한 실용서 ≪보이지 않는 잉크(Invisible Ink) https://soulflower71.tistory.com/518≫가 생각난다. 작가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야기 외적인 것들’은 모두 이야기 자체이며 이야기를 돕고 이야기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거다. 말하자면 작품 속 소품들, 대화, 상황들, 유머, 어떤 일의 방식, 시간의 흐름 같은 주변적인 것들이 함부로 쓰이거나 등장해서는 안 되며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 더불어 그런 요소들은 이야기 자체에 밀접하게 상관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사족이나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
작가는 이렇게도 덧붙인다.
‘분명하게 전달하라.' '여러분의 관객(독자)들을 존경하라.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 아니다. 작품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이다'.

이런 책을 만나는 대부분의 경우, 난 내 탓을 해버린다. 저질의 독자, 미숙한 독자, 아직 훈련이 덜 된 독자. 이 책에 대해서도 그래야 할까.

짧은 기록이나마 독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으려고 했으나, 책을 다시 펴자마자 피곤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내 것’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굳이 또 읽어야 하나. 물론 어떤 이야기인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되는 책들은 재독의 이유가 충분하다. 다시 읽음으로서 의미는 더욱 확장되고 감상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생은 짧고 책 읽을 시간 역시 무한하지 않다. 세상에 읽을 책은 무궁하고 이미 내 방에도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데, 굳이?

도발적이고 성적인 긴장감이 충만한 <풍경과 사랑>이라는 단편은 기억에 남는다. 뭐, 아주 대단히 빼어난 작품이란 얘긴 아니고, 작품집 안에서 그나마 말이 되고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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