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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꽃님의 서재
  • 내 남편
  • 모드 방튀라
  • 14,220원 (10%790)
  • 2024-05-20
  • : 804
『나는 글을 쓴 적이 없으면서 글을 쓴다 믿었고
사랑한 적이 없으면서 사랑한다 믿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닫힌 문을 마주한 채 기다리기만 했다.』

소설 서두에 나오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 속 문장은 화자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용이다.

화자는 두 자녀를 둔, 결혼 15년 차의 주부다. 경제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고 그녀 자신도 좋은 직업을 갖고 있다. 남편에게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쁘고 정신없고, 익숙함에 매몰된 무관심을 보이다가 그런 와중에도 알맞은 순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오히려 다정한 남자다.
그럼에도 화자는 매우 불행하다. 아니, 스스로 불행하다 느낀다.

화자는 남편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남편이 자신을 떠날까 두렵고 불안하다. 사소한 행동에 실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든다. 작은 농담에 상처 입고, 별 것 아닌 무관심에 분노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건 아닌지 살피고 덫을 놓고 시험하려 든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른 남자들과 섹스를 한다. 남편을 벌주기 위해서.

화자의 사랑엔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다. 그 사랑의 대상은 정작 남편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다. 화자 자신이 고백하듯(134쪽)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 중독된’ 자신의 상황이 오로지 문제가 된다. 화자의 가장 큰 결핍은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확인해줄 ‘결핍’이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모자란다는 건 완벽에 다다르기 위한 동력이다. 그게 없으니 매사 지루하고 진부하고 불안하고 두렵다. 사랑을 통해 실존을 확인해야 하는 화자는 (우리 옛말에)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것처럼 보인다. 걱정을 사서 한다.

결핍이 없음이 결핍인 화자는 미친 걸까.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완전 광기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멘탈은 아니다. 스스로 불행의 여지를 만들어 자신을 고문한다. 남편을 사랑한다 목청껏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화자의 감정은 가학적이기도, 한편으로는 피학적이다. 작품 속에서 남편의 문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화자의 문제는 사백 쪽 가까운 본문에 거의 빼곡하다.

작가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영원한 사랑이 있을까. ‘위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논할 때, ‘변함없음’이라는 조건은 언제나 상위일까. 변함없는 사랑이 마냥 좋은 걸까. 언제나 긴장하고 마음 졸이게 만드는 사랑이 과연 행복과 만족을 보장할까. 그런 사랑을 통한 존재의 의미, 존재함에 있어서 사랑의 가치는 언제나 상응할까.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화자를 통해, 정신적으로 남자에게 완전히 종속된 여자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여성의 ‘의존성’, ‘미성숙함’을 꼬집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눈에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과 가학성, 그 양가의 균형이 깨졌을 때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을 고발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화자는 스스로를 고문함과 동시에 남편 역시 가해자, 피의자로 만든다. 엄연한 정신적 폭력이다. 화자는 남편이 자신을 실망시킬 때마다 나름의 복수도 준비하는데 그걸 일일이 수첩에 기록하는 기벽을 보여준다. 사랑이 끔찍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 언제 어떤 얼굴을 드러낼지 아무도 모른다.

‘사이코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마냥 위험스럽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문득 냉정하고 정신적 균형을 찾는 순간도 있다. 블랙 코미디 같은 면모는 행간에 스며 있는 엉뚱한 유머로 확인된다.

독특한 소설이다. 최소한의 인물, 경제적인 배경으로 인물의 이상 심리에 파고든다. 시종일관 시선을 화자에게 두는 건 다소 피곤하다. 열정이 지나쳐 광기를 넘나드는 인물의 내면은 흥미로우면서 지루하다. 이야기 흐름에 완급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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