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백두 번째 책
영꽃 2024/12/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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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 캐슬
- 루시 M. 몽고메리
- 8,820원 (10%↓
490) - 2007-01-02
: 163
‘밸런시’는 노처녀 소리를 듣는 29세의 미혼 여성이다. 외모도 별로다. 사교술도 없다. 교육의 기회도, 직업을 갖고 돈을 벌 기회도 변변치 않아 제대로 된 결혼만이 여성들이 살 길이었던 당시(1920년대), 교양과 체면, 관습과 형식에 목숨을 거는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선 으레 집안의 평판을 깎아먹는 ‘빙충이’ 취급을 면치 못한다.
연애 경험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아니다. 어느 정도냐면 예를 들어, 댄스파티에서 남자들에게 춤 신청을 받지 못해 언제나 ‘벽의 꽃(wallflower)’ 신세다. 하지만 말이 좋지, 아무도 밸런시를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밸런시에겐 탈출구가 있다. 상상의 장소 ‘블루 캐슬’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황후이고 공주다. 자유와 행복을 만끽한다. 아름다운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드디어 제 삶의 꽃을 피운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벽과 마주해야 한다. 숨 막히고 희망 없는 삶도 삶인지라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타고난 약한 몸으로 건강에 이상을 느낀 밸런시는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그녀에게 협심증과 동맥류를 진단하면서 1년의 시한부를 선고한다. 밸런시는 죽음이 두려웠을까. 희망이나 낙관 따위 찌꺼기도 남지 않은 삶인데 그럴 리가. 그 사건은 슬픔을 요구하기보다 밸런시를 각성시킨다. 그녀는 남은 생애를 자유롭게, 알차게 보내기로 작정한다.
주인공 밸런시는 작가의 대표작 ≪빨강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의 주인공 ‘앤 셜리’의 후손이다. 이 작품이 ‘빨강머리 앤’보다 16년 후에 출간됐으니 그 영향을 받은 건 가능해 보인다. 그런 탓에 초반부에 드는 기시감은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밸런시가 가족들에게 반기를 들고 말대답을 하고 일상의 루틴을 가차없이 깨면서) 분위기는 서서히 반전된다. 이야기는 독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면서 ‘의외의 방향’으로 물머리를 돌린다.
작품 속 세계에서 밸런시는 반목의 아이콘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시선, 관습, 의무에 저항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탕녀, 광인으로 취급한다. 그런 평판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건 죽음을 각오한 자의 순수한 용기 덕분이었다. 그리고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 얼마 남지 않은 (끝이 보이는) 삶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나 자신으로’ 사는 것. 100년 후의 우리들에게도 꽤 솔깃한 욕구다.
로맨스+코미디를 주된 기둥으로 한 이야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를 가둔 틀을 깰 때 가능하다. 지금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건 과연 어떤 요소들일까,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가식의 허울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겐 그 껍질을 벗을 힘과 용기가 과연 있을까.
밸런시의 결말은 참으로 장르다운 면모를 빠짐없이 갖춘다. 사랑과 돈, 그리고 용감하고 슬기로운 여성이라는 명예까지. 이런 결말을 두고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말들을 할까. 요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밸런시는 과연 행복한(바람직한) 결말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밸런시의 앞날을 두고 설왕설래하기 전에, 제발 1920년대의 사정을 염두에 두자. 그리고 용기와 지혜, 친절함과 배려심까지 갖춘 여자가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것을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손에 넣는 게 어리석고 멍청한, 남자에게 길들여지는 일이라면, 그저 코 한 번 찡긋 하며 웃어주면 된다. 그 이상은 낭비다.
사족
전체적으로 영화 ≪Last Holiday≫와 유사점이 많다. 1950년 오리지널은 보기 어렵고, ‘퀸 라티파(Queen Latifah)’ 주연으로 리메이크한 2006년의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같이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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