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백한 번째 책
영꽃 2024/12/0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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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고 온 여름
- 성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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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7
- : 5,245
열아홉 살의 ‘기하’는 아빠와 둘이 산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는 오래전에 암으로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새엄마를 데리고 들어오고 졸지에 아홉 살 아래의 동생 ‘재하’가 생긴다. 기하는 갑작스런 새엄마도 당황스러운데 생전 처음 해보는 형 노릇에 질색한다. 기하는 새엄마에게도 재하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흔히 아는 ‘정식의 절차’가 없었더라도 기하는 새엄마와 재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 ‘중2병’을 앓을 나이는 이미 지났고 이듬해면 성인인데 저리 옹졸한 태도는 대체 왜지? 엄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도 아니고 아빠에 대한 배반감? 아니면 가족의 울타리 안에 선뜻 발을 들인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
위에 적은 것들 모두 해당될 테지만 작가는 기하가 어떤 마음인지보다 보이는 것, 행동과 태도에 집중한다. 전체적으로 인물에 대한 여백이 많은 작품이다. 설명이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한데 독자들이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약간 뻔해서 심심하다.
인물들의 권력 관계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두 집 모두 편부, 편모의 가정이다. 두 집 모두 아들 하나씩 있고, 두 집 모두 수입이 있다. 사진관 사장과 학습지 교사 중 누가 수입이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재하 엄마가 기하 아빠에게 경제력을 완전 의지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재하네는 기하네로부터 ‘받아들여져야’ 하고 기하는 그들을 거부한다.
평등해 보이는 조건에서도 권력이 기운다. 기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여자는 받아들여져야 하고 남자는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재하의 엄마는 이혼녀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고생을 했다. 그 폭력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바늘방석이다. 여자는 폭력적이지 않고 착하고 성실한 남자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젊지만 유용하고 막강한 무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래서 외롭게 남는 쪽은 ‘기하’처럼 보인다.
어차피 두 가족은 ‘중국 냉면의 육수에 잘 풀어지지 않는 땅콩소스’처럼, 서로 융화될 가망이 별로 없었다. ‘어느 쪽이든 괜찮은, (토마토가) 과일이든 채소든 상관없는(26쪽)’ 재하와는 달리, 기하는 친절하지 못하고 배려 없었던 제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이 작품이 극히 일부의 독자들로부터 ‘남성중심적인 이성애자 사회의 남성 구원 서사’라는 원망을 듣는다면, 그 구원은 실패했다고 말해야 한다.
인물들이 모두 착하다. 악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다. 새엄마는 기하의 인정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재하는 그런 엄마가 약간 과하다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비슷한 태도를 취한다. 기하의 아빠 또한 친절하기 짝이 없고 기하의 행동도 악하다고는 볼 수 없다. 철이 없다고나 할까. 기하가 하는 양을 보면 찬바람이 휙휙 불다가 뒤돌아서 곱씹고 후회하는, 그런 유형이다. 유일한 ‘빌런’이 한 명 등장하는데(재하의 친부), 이 사람의 쓰임새 역시 전형적이다. ‘양아치’의 습성을 빠짐없이 갖춘, 결국엔 어렵게 맺어진 사람들의 여전한 노력들을 무용하게 만들어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한다.
설정이나 인물, 이야기의 얼개 등이 새롭지도 않고 짜임새가 그리 조밀하지도 않다. 전체적으로 고루한 인상을 주는데,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거의 재활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엔 개성이 있다.
낡은 소재들이지만 포장은 새롭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현실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결말을 그린다. 할 만한 행동들엔 부연이 필요 없다. 선뜻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납득은 된다. 생략과 비약은 작가 나름의 계산이었던 것 같다. 작가는 큰 노력 없이 세련된 맵시를 부린다.
작품 전체를 꿰뚫는 소재로 ‘사진’이라는 작가의 선택은 적절해 보인다(기하 아버지의 직업이 괜히 사진관 운영이 아니었다). 소재 이상의 장치로 보인다.
사진은 시간을 ‘박제’한다. 시간은 정지하고 진실은 봉인된다. 박제된 순간은 사진을 마주함으로서 반복된다. 사진으로서 과거는 현재로 소환되고 환기(喚起)된다. 마법이 비로소 풀린다. 과거의 의미가 비로소 부여된다. 훗날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자신이 ‘두고 온 것’을 생각한다.
작품은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과거엔 만족보다 후회나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난날엔 항상 미련이라는 긴 그림자가 남기 마련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하는 걸 오만이라고 느끼기 쉽다.
그럼에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과거가 있음에도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프랙탈(fractal) 패턴’은 우리 삶에도 보인다(편혜영 작품의 리뷰에서도 이 비유를 했던 것 같다).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과 변화는 요원한 듯 보인다.
작가가 그런 점을 의식했을까. 작품에서 ‘반복’이라는 장치가 거듭 보인다. ‘19세의 기하-10세의 재하-중년 기하-청년 재하’로 이어지는 구성(화자의 교차와 반복), 거듭 등장하는 ‘사진’이라는 소재, 그리고 반복되는 장소(인릉).
15년이 흐르고 재회한 기하와 재하는 과거에서 비롯된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 누군가는 사과하고 누군가는 용서하고, 한때 형제였던 두 사람이 진짜 형제가 되는 시작점에 선 두 사람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났더라면. 하지만 삶이 어디 그런가. 두 사람은 어른이 됐고 살 만큼 살았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고 여러 형태의 좌절도 겪었다. 두 사람은 의미 있는 변화를 겪으며 삶을 통과했지만 지향점이 서로를 향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가족사를 소재로 작가는 ‘진짜 삶’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에 발을 디딘, 꽤 단단한 느낌을 준다. 슬프지만 전형적인 슬픔과는 결이 다른 정서가 꽤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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