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면 조선에는 다산 정약용이 있다.
경제, 의학, 법률, 교육, 과학, 건축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저서를 남기고 정계에 진출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 시대를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실용을 중시하고 시민 사회가 발아 되었던 전세계사적인 흐름을 타고 조선에도 많은 변화가 분다.
조선의 문예 부흥기. 실학이 연구되고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며 민간 사회에서도 예술 활동이 활발해진다.
이웃나라 일본과 다른 점은 난카쿠라고 불리는 난학이 일본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하여 근대화가 빨리 진전되었던 반면
조선에서의 실학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 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 사회였다.
아무튼..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실학의 선두주자에 정약용이 있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뽑힌다.
그 중에서도 형법, 법 행정, 살인 사건 판례와 그에 대한 다산의 시각을 저술한 저술이 흠흠신서다.
이번 책은 다산의 흠흠신서를 해설하였고 더불어 작가가 다산의 사건과 사건 판결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 한번 정리, 평가한 책이다.

조선사를 공부하면서 늘 느끼듯이 조선은 생각보다 진보되었고 동시에 생각보다 뒤떨어지기도 했다.
조선의 법률은 어떠할까? 궁금증을 갖고 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많은 판례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 책을 덮은 후 머릿 속에 남는 조각들을 적어 본다.
*정조의 관대함
조선 시대 최고의 법률 집행가는 중앙의 왕이었다. 사사로운 건들은 지방의 관찰사에게 재판권이 있었지만 살인과 관련된 것이나
지방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중앙의 왕이 집행을 했나 보다. 정조 시대를 공부하면서 정조의 애민 사상에 대한 많은 사례들을 봤다.
정조의 업적으로 서얼철폐나 관노비 해방이 있는 건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서얼제도를 철폐하여 서자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실제로 규장각의 검서관에 4명의 서얼을 등용하였다. 이처럼 그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정책을 펼쳤는데 살인 사건의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도 백성들에게 관대한 형벌을 내렸다.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가 누가 주범인지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형을 면해 주거나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억울한 옥살이를 피하려고자 하는 정조의 배려인 듯 하다. 작가는 이에 대해 정조는 강력한 법으로 처벌을 하기 보다는 죄를 지은 백성에게도 죄를 베품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공고히 했을 거라고 평가하였다.
사람 사는 세상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같기에 갈등 구조도 비슷하다. 주로 원한을 사서 그를 응징하기 위해 살인을 벌이거나, 그를 복수하기 위한 살인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갈등이 지금이랑 조금 다른 것들도 있어서 생각나는 걸 적어 본다.
**첩과 첩의 자식들, 본처의 자식들 간의 갈등
많은 살인 사건의 판례들이 나오는데 첩과 첩의 자식들, 본처의 자식들 간의 갈등 사건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윤덕규라는 사람에게 첩의 아들인 태서와 언서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언쟁을 하다가 아버지를 발로 차고 때렸는데 며칠 후 아버지가 죽었다. 그러자 본처의 자식들이 나타나서 언서를 죽여서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했던 사건이다.
양반집에서 첩을 두고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흔하게 있었던 사회 갈등이었던 듯하다.
***묏자리에 관한 갈등
조선시대 묘지 자리는 풍수와 얽혀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묘지를 몰래 빼앗아서 자신의 가족의 시신을 묻고 사람이 안보이는 밤에 장례를 치른다던지 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 저주에 대한 형벌
숙종 때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된 장희빈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 시대에는 이런 형벌이 있었다니, 정말 지금과 다른 세상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저주했다는 것만으로도 벌을 받는 세상이었다. 지금의 잣대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이해할 하지 말자.
***** 간통
간통으로 인한 갈등으로 간통한 배우자나 간통 상대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흠흠신서에 자주 등장한다.
간통이 그 시절 빈번한 사회 문제였던 듯 하다.
유교가 국가의 근본 이념이던 시절에 간통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니,, 역시 사람 사는 사회는 다 같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살인 사건에 대해 형벌을 주는 데 있어서 지금과 다른 잣대, 기준이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간통 때문에 일어난 살인이나 가족의 살인에 대한 복수로 인한 살인이 어느 정도 허용이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했던 윤덕규의 살인 사건에서 본처의 아들이 첩의 아들을 죽인 후 내장을 꺼내어 목에 걸고 다녔다고 했다.
현재도 살인 후 시체를 훼손하면 더 중형이다. 이때도 그랬다.
근데 특이한건 다산 정약용이 이 판례를 평가하면서 살인을 복수하려면 살인으로써 충분하다. 살인 후 시체 훼손에 대한 형벌이 추가되어야 함을 얘기하는데 복수로써 살인이면 충분하다는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생명에 대한 기본 관점이 그 시절은 지금이랑 달랐던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는 살인과 폭력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허용이 안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간통이나 가족의 살인에 대한 복수로 인한 살인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심지어 형을 아주 가볍게 받거나 주범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을 경우 형을 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책을 덮으며.
정조와 다산은 모두 법과 인정을 함께 고려하여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백성들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 정조의 판결문에 언제나 등장한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고 그 시절 법이지만 약한 자의 편에서 판결을 내리려 애썼던 정조의 애민 사상이
흠흠신서에 많이 보였고, 절대 권력 왕이 내린 판결임에도 소신있게 판결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정약용의 선비정신이 돋보이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