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처음 받아든 순간, 만듦새가 미니 그림책 같았습니다. 세로길이가 한뼘보다 약간 길 뿐인 작은 판형인데, 하드커버 양장본과 도톰한 내지의 물성으로 품질 좋은 그림책 느낌을 선사하고요. 그림만으로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에서 그림책과 동화책 사이의 경계에 있는 독특한 어린이책이었습니다.
특히, 왼쪽 페이지에는 일러스트, 오른쪽 페이지에는 글이 배치되는 구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적용된 것이 특징입니다. 서른 번의 펼친 면마다 깔끔하고 담백한 톤의 일러스트도 눈에 잘 들어보고, 적절한 분량으로 나눠진 글도 눈에 잘 들어오더라구요. 실제로 초등2학년 저희집 어린이와 잠자리 책으로 함께 읽으면서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책장을 넘기며 읽었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고슴도치 캐릭터도 귀엽고, 그림을 해석(ex. 큰고니의 등에 있는 게 뭐지??)하는 재미도 있었어요.
고슴도치는 숲속 마을 체육대회를 앞두고, 등에 난 가시만큼 걱정이 많습니다. 자신의 가늘고 짧은 팔다리를 보면 도통 자신이 없었지요. 하얗고 보드라운 털을 가진 큰고니의 다정한 응원을 받으니, 더 부끄러워졌어요. 달리기 대회에서 고슴도치는 매일 연습한 대로 심장이 터질 듯 달렸지만, 올해도 꼴찌입니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족제비 패거리들의 괴롭힘까지 당하네요.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한참 쏟고 정신을 차린 고슴도치는 그때, 자신의 가슴에서 반짝거리는 별을 발견하게 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큰고니를 다시 만나요. 큰고니는 먹이찾기 경쟁에서 탈락해 상심이 큰 상태였어요. 고슴도치는 큰고니의 가슴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걸 봅니다. 자신의 등에서 가시 하나를 뽑아 조심스레 고니에게 다가가는 고슴도치.. 이제, 고슴도치는 자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발견했나 봅니다.
고슴도치는 등에서 가시를 하나 뽑았어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 늘 등 뒤에 얹은 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가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가슴 아팠던 기억이 하나 둘 떠올랐지요. 자기를 보호하는 데 썼던 가시를 이제는 큰고니를 위해 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가시는 고슴도치의 마음을 아는 듯 은은하게 반짝거렸습니다.
<바느질하는 고슴소치> 43p
먹이 찾기 경쟁은 힘들지만, 춤 추는 것은 정말 자신 있는 큰고니.
달리기는 만년 꼴찌이지만, 자신의 바늘로 다른 이들의 다친 별을 꿰매어줄 수 있는 고슴도치.
달리기를 가장 잘 하는 재능도, 먹이를 빠르게 찾는 재능도 모두 훌륭한 재능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거기서 1등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느질하는 고슴도치>는 누구나 가슴에 반짝이는 별을 품고 있다는 걸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상의 천편일률적이고 일방적인 기준의 경쟁 속에서 금이 가고, 부서질 때가 있어요. 별이 있는지조차 깨닫기도 전에요. 오직 내 아이가(또는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두고 거기에 매몰될 때, 웃음을 잃지 않기란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에 대한 실망과 좌절 더 나아가 분노와 슬픔에 빠졌을 때,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볼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내가 물에 빠졌었구나. 이 물이라도 마셔야겠어." 고슴도치가 펑펑 울고 난 후 꺼낸 이 대사가, 우리를 도와줄 결정적인 힌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련하게 감정을 꺼내고 난 후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왜 꼭 그래야 하는 거지?' '이렇게 계속 쭈그러져 우울해한다고 달라지는 게 뭘까'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가 비로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진심으로 더 잘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밤이면 더 반짝이는 고슴도치의 공방처럼 나의 아이디어 공방을 가동시켜보는 겁니다.
고슴도치 덕분에 눈부시게 빛나는 별을 다시 가슴에 채워 넣은 큰고니는 푸른 광채를 되찾고 날아갑니다. 저는 이 책에서 특히 고슴도치의 재능이 '타인을 이롭게 하는 재능'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감응하면서 치유와 성장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어린이책 작가들이 이 역할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유치원생만 되어도 스스로 알아요. 누가 줄넘기를 나보다 잘 하는지, 누가 그림을 나보다 잘 그리는지. 본격적으로 경쟁의 세계에 입문하는 초등학교 입학 전후, 어린이의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미리 미리 다정하게 붙들어 꿰어놓아줄" <바느질하는 고슴도치>를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혹여 시도하는 용기와 과정의 노력보다 우열만 따지는 비교에의 노출에서, 어린이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부모 자신의 마음부터 잘 웅크려 '보호' 해 보자구요. 분명 우리의 손 안에도 '다용도 가시'가 있습니다.
그때야 고슴도치는 알게 되었지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달리기가 아니라 바느질이라는 걸 말이에요.
<바느질하는 고슴도치> 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