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자리수 받아내림 받아올림 덧셈 뺄셈 문제 20개 만들어줘."
몇주전 <기적의 계산법> 문제집 장수가 바닥났길래 노션 창을 열고 AI에게 요청해봤더니, 순식간에 엄마표(?) 연산학습지가 만들어졌다. 번거롭게 시간 들여 숫자를 조합하는 작업도, 비용을 들여 추가적으로 문제집을 더 살 필요도 없었다. 이뿐인가. 빅스비는 이미 가족 같은 백과사전 비서이고, 파파고 앱은 아이의 영어회화 연습도구로 최고다.
하...정말 세상 좋아졌다'고 감탄하며 시대흐름을 간신히 따라가고는 있지만, 사실 나는 좀 버겁고 두렵다. 이러다간 일부를 제외하고, 나 포함 나머지 인간 대부분 손가락 빨며 굶어갈 처지가 암담해 기술개발 좀 그만 했으면 싶기도 했다. 하지만 <AI 사피엔스>를 읽으며 내가 AI쇄국주의자 기성세대로 늙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등골이 서늘했다.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두께감 압박이 무색하게 긴장감으로 몰입시키는 책이었다.
20만 베스트셀러 <포노 사피엔스> 저자 성균관대 최재붕 부총장의 5년 만의 역작 <AI 사피엔스>가 출간되었다. <포노 사피엔스>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전작인 <체인지 9>(2020)를 워낙 흥미진진하고 임펙트하게 읽은 바 있다. 공학자로서 국내 최고의 4차 산업혁명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최재붕 교수가 정리한 내용의 전문성은 더 의심할 필요가 없다. <AI 사피엔스>는 주제가 주제인만큼 전작 <포노 사피엔스>(2019) <최재붕의 메타버스 이야기>(2022)에서 언급한 내용도 포함할 수밖에 없기에 이 한 권이면 15년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니, 독서시간의 경제성(?)도 있다.
<AI 사피엔스>는 AI를 통해 천지개벽급 신문명을 만들어가고 있는 현대사회의 변화를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150년전 조선은 1차 산업혁명 당시 유럽 중심 세계관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다 1910년 결국 멸망했다. 이에 빗대어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AI 문명의 식민국이 될 것인가, 주권국이 될 것인가, 이 기로에서 부지런히 현실을 체감(파악)하면서 새 문명 AI 사피언스 시대를 대비하시라고,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당부하며 각성시켜주는 '미래준비 설명서'다.
책은 크게 6개의 Part으로 나누어진다.
Part1. 디지털 문명을 넘어 AI로 달려가는 인류
Part2. 디지털 신대륙의 주인공 'AI사피엔스'의 세계관
Part3. AI를 만난 메타, 사상 초유의 거대한 신시장을 열다
Part4. 메타 소비자를 선점하기 위해 모든 산업이 빠르게 변신 중
Part5. 시장의 성공법칙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팬덤경제
Part6. 전 세계를 홀린 K-팬덤, 휴머니티로 미래를 디자인하라
Part 1&2에서는 AI 시대의 근본적 변화 요인과 특징(세계관)을 알려준다.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구글, 메타, 테슬라, 애플 등 세계적인 기업들의 행보와 최신 기술 트렌드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Part 3&4에서는 국경 없는 디지털 세상의 비즈니스 모델인 '메타 인더스트리'의 탄생과 마케팅, 유통, 자동차, 전자, 건설, 교육, 법률, 행정, 콘텐츠, 의료 분야 등 전 산업을 아우르며 변화 양상과 전망을 서술한다.
Part 5&6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획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할 팬덤경제를 다룬다. K-팬덤의 요인을 한국의 문화유산인 '공감력'으로 해석한다.
<AI 사피엔스>를 통해, AI 문명에 대한 현실적인 당위성과 미래과제를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산업분야에서 AI 활용은 필연적이 될 것이고, AI 활용능력의 우열이 개인의 부귀영화를 결정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AI가 전세계 자본과 인재를 빨아들이며 주권국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이 시대, 한국은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
천만다행히, 한국은 생성형 AI 개발에 관한 산업 생태계가 형성된 나라다. AI 산업의 핵심 하드웨어인 반도체 생태계와, 네이버&카카오같은 독자적인 데이터 플랫폼을 기반으로 확보된 엄청난 양의 데이터들인 AI 소프트웨어 생태계까지 말이다(* 최재붕 교수는 플랫폼들을 '약탈적 자본'으로 바라보는 건 구시대적 이념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이것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야할만큼' 한국이 가진 국가적 자산이었다.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노하우와 데이터량은 이 기반이 약한 유럽, 일본은 따라올래야 따라올 수 없는 갭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적 팬덤까지 보유한 한국은 AI문명에서 아주 유리한 가능성을 가졌다.
문제는 더 이상 베낄 롤모델이 없는 지경의 선진국 한국임에도, 새 문명을 마주한 우리의 마인드는 '개도국'의 관성에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일례로 우버나 에어비앤비에 대한 규제, 코인이나 NFT발행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들었는데, 사실 나부터도 돌아본다면,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더 큰 보수적인 관성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80년생인 내가 MZ세대의 아주 턱걸이로 붙어있는 끝물(?)세대라는 걸 감안한다 치고, 알파세대이자 진정한 'AI 사피엔스'라고 하는 16년생 내 아이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환경을 구축하고, 자유롭고도 안전하게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복잡하고 절박하게 다가온다. '게임산업이야말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정말 중요한 메타 인더스트리의 대표 주자'라는 저자의 설명에 수긍이 갔으니, 말 다한거다.
AI시대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동력은 ‘구독과 좋아요’다. 메타 세상은 거대한 자본과 조직을 구성하지 않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글로벌 인기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공부할 수 있는 콘텐츠와 커뮤니티가 가득하고, 롤모델은 국경도 없다. '좋은 경험'을 디자인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와 전문적인 실력(AI를 활용한 업무 생산성 포함)과 팬덤 생태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도 기회가 열린 시대이다.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가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그게 가능한 세상인 셈이다.
직접 찍으러 다니지 않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진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지만, AI는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본질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에 달려있다(질문하는 방법에 대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전문용어도 있다고 한다 *0*). 그러니, 세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우리가 가져야 할 세계관은 '그게 말이 돼?'대신, '해야만 한다면, 끝장나게 더 잘해보자'하는 오기와 '이런 것도 해볼까?'하는 담대한 도전정신일 것이다. 책에서 인용한 이어령 교수의 말씀대로, "썰물의 시대"가 지나면 "갯벌"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듯이, 최재붕 교수는 반복적으로 한국의 가능성과 기회를 강조한다. 나는 이 책에 절절하게 담긴 '긍정적 전망'을 믿고 싶다.
<AI 사피엔스>의 분량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비슷하다. 당시 나는 <사피엔스>를 읽으며 과거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의 실체에 대해 깨달았었다. 충격적이고 우울한 마음까지 들었던 독서였지만, 그때 얻은 인사이트는 충분히 가치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조금이라도 생각할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AI 사피엔스>를 탐독해야할 시간을 더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도서를 지원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