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는 큰돌이의 동생이다. 아이가 없는 집에 양녀로 갔던 영미가 밤티마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영미가 좀 달라졌다. 방이 작다고 불평하고, 팥쥐 엄마와 양엄마였던 은선 엄마를 비교하며 툴툴댄다. 영미에겐 영 마음에 들지 않던 팥쥐 엄마였는데, 자기를 괴롭힌 아이들 앞에 영웅처럼 등장한 일을 계기로 영미도 점점 팥쥐 엄마에게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몇년 전 집을 떠났던 엄마가 아이들을 찾아왔다. 그것도 영미와 큰돌이가 팥쥐 엄마에게 줄 생일선물을 사 가지고 오는 길에. 큰돌이는 자기만은 꼭 기다리겠다던 엄마가 막상 돌아오자 낯설게 느껴지기만 하고 팥쥐 엄마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집을 떠났던 엄마가 돌아온 이유는 재혼을 앞두고 어린 영미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자기가 양녀로 보내졌던 이유도, 심지어 팥쥐 엄마가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지 않는 이유까지 자기만 미워해서라고 생각하는 영미는 딱 아이다운 헤아림을 드러낸다. 그런데, 영미의 설움 앞에서 어른들은 할말이 없을 만도 하다. 그저 '어른들 사정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들'에 대한 부당함을 꼬집는 어린 아이의 일침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나도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가끔 아이를 0.5인분처럼 느끼거나 대할 때가 있다. 영미가 큰돌이 동생이 아니라 '영미'인 것처럼, 아이는 누구누구의 아들딸 이전에, '00'라는 사람인데. 비록 끼니를 먹거나 몸을 누이는 일상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성인의 그것보다 적더라도 아이의 존재감과 선택권은 온전히 1인분이어야 하지 않을까. 큰돌이가 영미에게 타이틀을 양보하는 대목은 우습고도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마음이라는 건, 표면으로 드러내야만 온전히 상대에게 가닿는지도 모르겠다.
"왜 맨날 나만 가라고 해? 나도 밤티 마을 집이 좋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나만 미워하냐고." 영미가 서럽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누가 너만 미워한다고 그래? 큰돌이나 너나 다 똑같은 자식인데." 아빠가 말했어요.
"거짓말! 은선 엄마네 집에도 나만 보냈잖아."
···(중략)···
"다 오빠만 좋아해. 사람들이 다 큰돌이 아빠, 큰돌이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 집도 큰돌이네 집이라고 하잖아." 큰돌이는 웃음이 나왔어요. 아빠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영미네 집 해라, 영미네 집 해."
큰돌이는 큰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렇게 하면 다시는 영미가 떠날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밤티마을 영미네 집> 89p~91p
<밤티마을 영미네 집>에는 팥쥐 엄마 '정옥순'을 중심으로 한 서사가 더 중점적으로 담겨있다. 원래 정옥순이라는 이름은 <봄이네 집>에서 나오는데, 이번 <영미네 집> 개정판에서 보다 빨리 등장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시장에서 미아가 된 후 가족없이 혼자 살아왔던 그에게 '영미네 집'은 새로운 꿈의 시작이었다. 영미네 가족을 만나고서는 '나는 뭐 하러 세상에 태어났나' 했던 생각에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기쁨에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영미에게 쩔쩔매던 이유와, 자신이 떠나야 한다고 판단했던 팥쥐 엄마의 독백은 참 안쓰럽고 가슴 아프다. 마냥 힘세고 이유없이 헌신하는 의아한 여성으로 보였던 그가 전하는 내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닥이며 살아가는 이유를 잠시 헤아려보게 한다. 나를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영미와 큰돌이 그리고 팥쥐 엄마는 이제 서로 '가족'이라는 이름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밤티마을 영미네집>을 읽으면서 '혈육의 정'과 '관계의 정'이란 것에 대해 새삼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초혼으로 어린 자녀가 둘이 있는 분과 혼인하신 친척어른이 계신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잘 살고 있는 딸은 엄마에게 그렇게 감사와 애정을 표한다. 자신을 낳아주긴 했지만 부재했던 친엄마보다, 현실에서 의식주를 보살피고 보호자가 되어주었던 분에 대한 마음의 빚과 정이 크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참 몰입해서 시청했던 김희애 주연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도 떠오른다. 엄마로서 감정이입이 되어 진짜 가슴이 찢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여주인공은 외도한 남편과 헤어지기로 했는데, 철썩같이 믿었던 외동아들이 정작 아빠와 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돈 잘벌고 능력있던 의사 엄마보다 같이 야구를 보고 요리를 해주던 아빠와의 추억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배신감은 정녕 정당한 감정일까?
팥쥐 엄마가 떠날까봐 걱정하며 심란해지던 큰돌이와 영미처럼, 어린시절 비슷했던 내 일화도 생각난다. 부모님 가게에는 숙식하며 일하시는 아주머니들과의 인연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이었다. 호감가지 않는 외모와 자꾸 간섭하듯 말을 거는 그 아줌마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기에 딱히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같이 지내다 떠나시는 마지막 날, 나는 저편 내 책상의자에 앉아 감정을 삼키느라 입을 딱 다물고 있다가 결국 질질 짜듯 눈물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족도 친구도 아닌 누군가와의 이별에서 처음으로 복잡했던 감정과 행동이 이 나이까지 기억이 난다.
정이란 건 그렇게 무섭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가까워지거나 각별해질 수 있고, 피를 나눈 관계여도 관계의 질을 보장할 수가 없다. 어떻게 같이 보듬고 걷느냐에 따라 삶이 그렇게 만드나 보다.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과 비교했을 때 나는 <밤티마을 영미네 집>이 더 인상적이고 찡했다. 어른 독자로서는 대체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서사라 해도, 인물들의 캐릭터가 생생하고 그 슬픔과 안도가 교차하는 이야기의 과정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우리집 어린이를 비롯한 어린이 독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동화책이다.
참, 팥쥐 엄마가 쓰러졌다. 그리 몸을 사리지 않고 애쓰더니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다음 편은 <밤티마을 봄이네 집>이다. 봄이는 누굴까? 폴짝거리고 뛰며 좋아하던 영미와 큰돌이의 모습을 보다가 나까지 웃음이 전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