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선배언니가 페이스북에 남겼던 짧은 영화감상 소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설국열차>(2013)를 봤는데, 어린 자식을 엔진청소부로 빼앗긴 엄마에게만 자꾸 꽂히더라는. 당시의 나는 '그렇구나' 하고 짐작하는 게 다였는데, 지금의 나라면 그 언니와 똑같은 감상평을 쓸 지도 모르겠다.
삶의 고민이 달라지니 보는 영화도 달라지고, 본 영화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전세계를 휩쓴 최신 흥행작 말고, 영화 평론가가 추천하는 영화 말고, 엄마들이 고르고 엄마들이 공감하는 '엄마들의 영화'가 궁금했습니다.
<우리 같이 볼래요?> 5p
<우리집> <기생충> <가족의 탄생> <보이후드> <우리의 20세기> <결혼 이야기> <톰보이> <B급 며느리> <툴리> <펭귄 블룸> <박강아름 결혼하다> <남매의 여름밤> <레볼루셔너리 로드> <벌새> <소공녀> <욕창> <케빈에 대하여> <82년생 김지영> <찬실이는 복도 많지> <디 아워스> <마나나의 가출> <안토니아스 라인> <비포 미드나잇> <블랙 위도우>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크루엘라> *본 영화(형광펜 표시)
결혼한 여성들의 삶을 탐구하는 모임 '부너미'가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2019)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2020)에 이은 세번째 책 <우리 같이 볼래요?>를 펴냈다. 앞선 두 권의 제목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면, 이번 책은 좀 더 다정한 느낌의 제안을 건넨다. 영화를 매개로 '기혼여성의 다양한 삶'과 생각을 나누는 책이다.
가끔 유명한 평론가들의 영화관련책을 읽다보면 나도 본 영화인데도 해석이나 글이 너무 심오하여,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될 때도 있다. <우리 같이 볼래요?>는 내가 보지 않은 영화에 엮인 이야기조차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감독의 의도나 메세지를 파악하려는 시도 대신, 기혼여성들의 삶에 접목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에 집중한 글들이다. 스물여섯명 필자마다의 고유한 문체와 다양한 사연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한편 한편 새롭게 기대하며 읽어나갔다. 입장이 비슷해 구구절절 공감되는 이야기들을 따라 내 삶을 밀고 나갈 힘을 재차 점검하기도 했고, 직접 체험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사유에도 감응할 수 있었다.
'차 한 잔 끝까지 마시기 어려울 만큼 시시때때로 조각난 니콜의 하루가 보여 눈물이 나던 마음(54~61p 단단)'이 내게도 생생하고, 결혼과 출산 뒤 확연히 달라진 삶의 변화가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기에, '출산 후 재채기도 편히 못하게 된 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말자(80~87p 성소영)'고 같이 더 외치고 싶고, '내게는 펭귄처럼 새롭게 변형될 날개가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민영 112~119p)'으로,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나 자신의 안부를 물을 것(178~185p 유보라)'이다. '엄마라서 할 수 있는 실천들이 나를 넘어 주변으로 퍼져나가도록 시도(62-69p 살구)'하면서도 '나를 채우는 사치(154~161p 이성경)'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여행(170~177p 구성은)'도 해보고 싶다.
가족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부부는 '피터지게 싸우다가도 맞장구를 치는 셀린과 제시처럼 일종의 대화(?)'를 거듭하는 관계다(194~201p 인성). 그러므로, 나비님처럼 '배우자를 팀원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설령 그 마음이 바닥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김은희님처럼 '각자 행복을 찾으며 살아온 시간의 소중함'도 인정할 것이다. 또 집 밖에서 만난 이들과도 '같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14~21p 정현주)'과 '친부모, 계부모, 친자식 같은 단어에 속박되지 않고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환대하는 따뜻하고 안전한 느낌(38~45p 김은희)'의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시대를 둘러싼 이해가 깊어질 때 비로소 해묵은 감정하고 화해할 수 있게 된다.(126p 민보영)"는 문장은 이미 볼드체로 보였다. ''외'라는 글자로 떨어져 나온 엄마의 삶을 생각해보는 마음(104~111p 하지현)', '바쁜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이나 에너지를 내어줄 만한 여유가 없을 뿐이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마음(120~127p 민보영)'에 고개를 끄덕였고, '애들이 오면 기쁘지만, 애들이 가도 기쁘다'는 시어머니(70~77p 블랑)의 고백에 풉 웃음도 났다. '세상 속 아줌마 요원들의 세계(202~209p 김수현)' 편은 통째로 코믹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나게 읽었다.
<기생충>을 '거리의 필요성'으로 해석(23~29p 홍애리)한 감상은 새로웠고, '여성이 결혼 뒤 친정에 의지하는 '신모계사회' 현실은 권력과 위계가 여성 중심으로 넘어간 게 아니라 여성이 양육의 주 책임자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현상일 뿐(136~143p 유유)' 이라는 지적은 짜릿했다. '미소가 오늘도 무사히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실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 (128~135p 홍하언니)'을 읽으며 내가 탄 욕망의 기차는 어디쯤 와 있나 돌아보기도 했다.
"영화는 어른들의 사랑이 얼마나 달콤하고 애달픈지,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지, 다들 그 속에서 어떻게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지 보여줬다(221p 심지)"는 누군가의 문장처럼, <우리 같이 볼래요?>는 엄마들 각자가 저마다 서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마음을 보여준다. '강요나 협박에 의해 세뇌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느끼는 강해지는 순간'(88~94p 안성은)의 모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 속에서 만난 이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나이, 직업, 사는 곳, 취향을 불문하고 모인 부너미에서 우리는 모두 '샘'이라 불린다. 기혼 여성으로서 겪은 불평등에 함께 분노하면서도 각자의 속도와 온도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존중한다(216p 이효정)"
엄마라는 정체성은 같더라도, 사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과거의 궤적도, 오늘의 형편도, 내일의 방향도 다르기에 '속도와 온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걸 인정하면서 시작하는 수다. 그럴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해와 감각은 결코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나 역시 지난 6년간 실감했다. 속도와 온도는 다르더라도 결이 같은 이야기들을 자꾸 만날 수 있을 때, 내 현재를 의심하고 비관하는 대신 의미와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스스로 강해지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준다.
<우리 같이 볼래요?>에서 소개한 영화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빠짐없이 챙겨보고 싶다. 물론 같은 영화라도 내게는 다른 장면과 대사가 더 꽂힐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떠랴. 내가 가진 차이도 '우리'라는 세계에서는 분명 의미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 같이 볼래요?> 책이 알려주었는 걸.
더불어, 밑줄 문장들.
- 아는 것이 힘일 때도 있지만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적당한 관계를 맺는 쪽이 이로울 때도 있다. 의도와 목적과 속마음을 어느 정도 지하실에 숨겨두더라도 우리는 공생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택이 탁자 밑에 없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보고들은 것을 안 보고 안 들은 양 자기 자신까지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면, 타인에게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쪽이 모두 '사는 길이다. - 29p 홍애리
- '가족 실천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구성원은 제도로 묶여 있더라도 한 가족이라 보기 힘들다···(중략)··· 가족 실천을 꼭 가사에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 등에 파스를 붙여 주거나 보기 싫게 삐죽 솟아난 새치를 뽑아주는 일, 보드게임이나 배드민턴 짝꿍이 돼주는 일, 문제집 채점을 해주고 숙제를 봐주는 일 등도 가족 실천의 예시가 된다. 내 시간을 너그러이 헐어내어주는 일들 속에 돌봄의 감수성이 스며 있다. - 36p 자일리
-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조금 안심이 됐다. 나만큼 아이도 나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이도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무진장 애쓴다는 사실 말이다. 어쩌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 자유 의지를 방해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겠다. - 52p 쑤리
- '엄마에 관한 세상의 말들이 칼날처럼 공격을 해도 나는 엄마가 되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래서 아직은 완벽하지 않아도 되며, 결코 완벽할 수 없으면, 계속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이다. 자책이 밀려올 때마다 내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 151p 은주
- 살던 대로 살 수도 없고 다르게 살 수도 없는 깜깜하고 막막한 시절,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뿐 아니라 희미한 빛에 의지해 한걸음 내딛는 순간도 소중한 내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찬실은 진정 복도 많다. - 169p 랄라
- 안토니아네 활짝 열린 마당에서는 개별적인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고 각자의 곁이 될 뿐이다. -188p 엘리
- '아줌마'는 흔히 멸칭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어떤 여자든지 돕고 싶고 친구로 받아들이고 싶은 넉넉한 마음은 아줌마 세계에 들어오고 나서야 생긴 변화다. -205p 김수현
"본 포스트는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