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서점, 중고상점, 백화점, 부엌... 요즘 소설의 트렌드가 '특정한 공간적 배경을 나타내는 키워드'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호텔'이다. 후루우치 가즈에의 소설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는 호텔 라운지 접객직원들과 파티시에들의 이야기다.
원제는 SAIKO NO AFTERNOON TEA NO TSUKURIKATA. 구글 수사로 확인했으니 망정이지, 얼핏 '사이코'(サイコ)로 오독할 뻔 했다(**;;). 일본어 뜻을 찾아보니, 最高(さいこう)のアフタヌーンティーの作り方 (つくりかた) = '최고의 애프터눈티 만드는 법'으로 해석된다. 원제대로, 애프터눈티를 소재로 하기에, 애프터눈티를 구성하는 음식과 차에 관한 정보(종류, 식재료, 역사 등)도 무척 풍성하고 정성스럽다.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는 시각, 후각, 미각을 매료하는 '애프터눈티'를 테이블 중앙에 두고, 그 곁을 둘러싼 모든 세대의 현실문제를 꽤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토핑한 일본소설이다. 달콤 고소한 향을 품은 갖자기 명칭에 눈이 뱅글뱅글 돌면서 마냥 황홀한 벚꽃비 같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절반쯤 이르자 소나기가 되어 가슴을 서늘하게 적셨다. 잠시 현실의 눅눅한 냄새를 맡으며 씁쓸한 혀맛을 다셨지만, 그래도 결국 소설은 계절을 한바퀴 돌아 따스한 봄햇살 아래로 독자를 이끈다.
"과자는 상이란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잔호텔의 애프터눈티를 찾아 홀로 즐기는 손님들에게 진심을 다해 서비스하는 스즈네. 해외유학 경험이 전혀 없어도 실력이 출중한 셰프 파티시에 다쓰야. 고즈넉한 자연풍광이 일품인 오잔호텔의 창가와 그들이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내고 서빙하는 애프터눈티는 편견과 무시에 시달리는 누군가에겐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마인드풀니스'가 된다.
하지만 "비일상을 연출하는 판타지(246p)"인 애프터눈티 뒤에는 영락없이 현시대의 현실이 있다. 다쓰야는 정상이 아니라고 치부받는 '알파벳 난독증'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고, 스즈네가 의지했던 중국인 동료 우스이린은 정규직과 외국인 비정규직 사이의 괴리와 차별 속에서 살아왔다. 가오리는 경력, 자격 모두 완벽한지만 그저 외롭고 피폐한 고령출산자가 되어버렸으며, 여권신장의 시대흐름에 반감이 큰 전형적인 가부장제 남성이었던 원로 파티시에 히데오는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20대의 후배 루리는 '여유와 선택지가 없는 대신 언제나 최단으로 가야한다'며 열심히 파티에 출석한다. 스즈네는 자신이 애프터눈티를 향한 열의만 갖고 주변의 상황과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 같아 자신감을 잃어간다. 스즈네를 비롯한 이들은 결국 어떤 메뉴를 고를까?
각자가 필요로 하는 재료는 모두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재료라도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고 빚어내고 실험하느냐에 따라 다른 맛과 식감, 향이 만들어질 것이다. "솔직히 평소에 선뜻 낼 만한 가격은 아닌 사치스러운 간식이지만 그러기에 열심히 애쓴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기도 한(15p)" 각자의 애프터눈티를 찾아 스푼을 드는 사람들. 각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실히 내 갈길을 가는 이를 누가 조롱할 수 있는가. 그 길에는 거친 돌과 다정한 꽃이 동시에 있다.
현실이라는 건 언제든 냉엄한 법이지.
그걸 안 상태에서
아름다운 면을 보는 것도
하나의 각오란다.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208p
주요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각자 교차하며 서술하는 방식은 여느 소설에서도 늘 흥미롭고 재밌게 읽고 있는데,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경우는 상황이 설명적이면서 동일하게 반복(중복)되는 대목들이 더러 보여서 아쉬운 점은 있었다. 하지만, 짚어야할 것들을 꼼꼼하게 짚어내어 후련하고, 비록 너무 이상적인지도 모를 결말로 마무리졌다할지라도 그 가능성을 엿보는 해피엔딩은 지금 어느 상황에 서 있는 누구에게든 위로와 감동을 전하리라 예상된다. 그게 소설의 역할이지 뭔가. 작가의 고급진 이야기솜씨에 기분좋게 턱을 열고 바라보다가 혀끝이 간질거린다. 당장 나의 '애프터눈티'를 찾아 나서고 싶어진다.
인생은 고생스러운 법이란다.
그러기에 더더욱
단것이 필요하지.
<오후 3시, 오잔호텔로 오세요> 212p
[이런 분들에게 추천]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게 맞는 걸까,
조금은 지치고 자신감이 떨어지신 분
혼밥, 혼술, 혼극, 혼행의
참맛을 느끼며 당당해지고 싶은 분
팍팍한 현실에서도
작은 희열과 보람을 깨닫고 싶은 분
*본 포스트는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