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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뇽마님의 서재
  • 거인의 땅에서, 우리
  • 이금이
  • 11,700원 (10%650)
  • 2022-01-24
  • : 366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늘 저 위에 고비보다 더 넓은 땅 있어요.

그곳에 양 치는 거인 사는데 밤마다, 밤마다 불 피워요.

불똥이 튀어서 거인 옷에 구멍이 아주 많이 났는데

그 구멍으로 불 보여요. 그게 저 별들이에요.

<거인의 땅에서, 우리> 78p


동서남북으로 보이는 건 지평선 뿐인 넓은 고비사막조차, 거인이 입고 있는 옷 하나로 다 덮히는 세상이란다. 대한민국 속 작은 도시, 사방이 막힌 비좁은 방 한칸에 짱박혀 있는 나는 거인의 손톱 사이에 낀 모래 부스러기의 100만분의 1보다도 작겠군. 이런 곳에서도 나는 '우리'를 떠올릴 수 있을까.


<거인의 땅에서, 우리>(2022)는 이금이 작가님의 2012년작 <신기루>(푸른책들 출판사)의 개정판 장편소설이다. '신기루'의 본질은 '허상'인데, 그 자리를 '거인의 땅'과 '우리'라는 단어가 대체했다. 바꾼 제목이 흡족하다는 작가님의 소감대로, 독자 입장에서도 '신기루'라는 얼핏 울적한 단어가 이 책 전체의 대문이었다면 좀 아쉬웠을 것 같다. 그보다는 더 선명하고, 지속가능하며, 훨씬 희망적이니까.


이 소설은 크게 두 이야기로 나뉜다. 40대 중반 아줌마들 틈에 끼어 몽골여행을 떠난 열다섯살 다인이 이야기. 그리고 자궁암 진단을 받은 후 딸을 데리고 고교시설 문학동아리 친구들과 몽골여행 중인 다인의 엄마 숙희의 이야기.


다인은 지루할 줄 알았던 오지 여행이 잘생긴 지노오빠를 빼닮은 몽골인 가이드 바타르 덕분에 하루하루 1분1초가 귀하다. 심장이 벌렁대고 현기증을 느끼거나, 고독의 똥폼을 잡으며 귀여운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사춘기 소녀의 독백을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바타르 때문에 들뜨고 흥분한 나보다, 쓸쓸함 그 자체인 듯 노을 진 언덕에 홀로 앉아 있는 내가 더 마음에 들었다. 뭔가 한층 고결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103p)"] 수많았던 나의 바타르들을 추억하며 다인을 깊이 공감하고 다독여주고 싶었던 것 외에도, 아이의 현실고발이 뜨끔하다. [아줌마들은 내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도 함께 깨닫고는 체통을 되찾겠다는 듯이 갑자기 근엄해졌다. 만난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유치한 모습을 바닥까지 다 들켰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70p)]


다인의 이야기와 균등한 부피로 담긴 숙희의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이 소설의 장르를 '청소년문학'으로만 분류해도 괜찮을 것인가 손을 들고 질문하고 싶어졌다(근데 어디에??). 이건 내 이야기, 우리 이야기, 엄마들의 이야기잖아. 와락 전환되는 성인의 화법과 심리묘사에 가슴이 콕콕 찔리고, 울컥 코 끝이 찡하다. 고작 6일의 시간 안에서 이들 각자가 살아온 시간들이 와르륵 펼쳐져서 보여지고 만다. "언제 이래 나이를 먹었노.(128p)" 친구의 말에,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는 일곱명의 여성들 얼굴에 '할많하않' 말풍선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사실 숙희는 "내는 저 초원 위를 말 타고 달릴 거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뛴다.(71p)"는 설렘으로 여행을 시작했더라도, 여행 내내 마음의 멀미를 겪고 있었다. 내쳐버린 문학 대신 숙희가 이제까지 붙들고 있던 것들의 '허상'에 대해, 현실을 잊으러 떠난 여행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현실을 처절하게 깨닫고 만다. 하지만 이제 숙희의 마음은 어디로 향할까. 6일전보다는 조금 혹은 훨씬 더 자유로워지진 않을까. 딸 세대가 엄마세대의 생각과 마음을 훔쳐볼 수 있는 취지여도 무척 좋은 책이지만, 40-50대 엄마들에게야말로 우리를 위해 읽자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만약에 그때까지 신기루를 한 번도 못봤으면 어떻게 불안하고 무서운 걸 이겨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중략)…"그리고 엄마,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사막에 신기루가 없으면 너무 지루하고 심심할 거 같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에서는 우물만큼 신기루도 필요한 거였다.

<거인의 땅에서, 우리> 235~236p


다인은 신기루 덕분에 여행이 좋았다고 했다. 숙희에게는 '모든 날이 좋았다'지만 딸 다인과 내내 함께했던 여행이었기에 더 좋았다. 아줌마들은 다인과 만난지 24시간 만에 온갖 유치한 모습을 들켰다. 숙희는 딸 앞에 민망하고 조마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줌마도 여자애였잖아.(208p)" 다인의 말이 맞다. 엄마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수천개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얘들아, 좀 봐줘라. (그리고 엄마, 나도 미안해요)


나 역시 그 어떤 다채로운 도시여행보다 황량했던 울룰루 캠프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난 죽어도 저 백인여자처럼 멀리서도 까벗은 엉덩이가 다 보이게 빈약한 부쉬 뒤에서 오줌을 눌 수 없다며 내 방광에게 기도했다. 동행자가 없는 혼자였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어떨까. 이제는 '깔깔거리며 멀어져간 세 아줌마처럼(57p)' 가장 예쁜 양산을 골라 같이 폴랑폴랑 걸어갈지도 모르겠다. 친구야, 같이 가자! 같이 늙어가는 '우리'가 있어 좋다. 여자애였던 게 분명한 중년의 유치한 친구들과 정말 어디로든 가고 싶어진다. 여자애에서 아주 미세하고 미세하게 각자 거인이 되어가는 중인 우리라면, 여행의 끝은 뭐가되었든 분명 성공일 것 같다.


내 그림자가 대지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멀리멀리 뻗어 지평선에 닿을 듯한 그림자를 보자 나도 거인족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발은 땅을 디디고 머리는 하늘에 닿은 거인이 돼 엄마와 아줌마들과 바타르가 잠들어 있는 게르를,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굽어보았다. 몸만 늘어난 게 아니라 왠지 마음도 함께 커진 것 같았다.

<거인의 땅에서, 우리> 83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고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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