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 사이 놓인 길을 기쁘게 걷다
이금이 작가님의 청소년 성장소설 3부작 <너도 하늘말나리야>,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 초판이 출간된 때가1999년, 2010년, 2014년이다. 그리고 2021년인 지금, 세월의 공백에 구애받지 않고 이 세 작품을 정주행하여 연달아 모두 읽은 일을 올해 가장 '행운'의 독서라고 꼽고 싶다. 소희와 미르, 바우는 물론 재서, 채경, 재이.. 이 아이들을 만난 게 너무나 큰 힐링이기 때문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미르가 세상 쿨한 척 능글능글 웃다가 노트북 앞에서 훌쩍 훌쩍 또는 잉잉 울고 있을 것 같고,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아파트 화단에 핀 이름모를 보라색 꽃을 보며 바우를 떠올렸다(바우라면 이 꽃이 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었겠지?). 소희같은 아이가 정말 존재한다면 분명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다. 설령 작가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을 줄 아는 귀한 인재가 될테니, 든든하다.
수없이 연결된 길 앞에 선 열여섯 살
열세살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다. 소희가 바우에게 받았던 "소희를 닮은 꽃,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이라는 글귀 앞에서 눈물이 핑 돌땐 언제고, "아, 오글거린다!(13p)"고 웃다니 살짝 섭섭할 뻔 했다가, 지극히 정상적인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소희의 방>을 읽으며 먹먹하고 찡해서 몇 번이고 목이 메였다면, <숨은 길 찾기>를 읽으면서는 미르의 맹랑한(?) 독백마다 큭큭큭큭 웃음이 터졌다. 재이가 자기에게 연극의 주인공 라이샌더 배역을 맡기자, 미르가 중얼거린 말, "뭐.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네(58p)". 바우가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얘기를 꺼내자, "죽은'도 싫고 '시인'도 싫고, '사회'도 싫었다(122p)". 바우의 순박한 생각을 보는 재미도 만만찮다. 대본을 읽던 중 라이샌더의 대사가 오글거렸을 때, "처음엔 자기 험담을 하고 다니는 미르에게 주인공 역을 준 재이가 대단해 보였는데 대본을 보니 지능적인 안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66p)". 딱 그 나이다운 솔직함들이 선명하게 와닿아서 역시 좋은 이금이 작가님 소설이었다.
미르는 소희가 특목고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끄럽기 싫어 느닷없이 뮤지컬배우를 꿈꾸기 시작한다. 탐탁치 않게 여겼던 연극부 부장 재이 앞에서 자존심을 누르고 오디션을 보기도 하고, 엄마를 졸라 시내의 뮤지컬 학원도 다니며 예고입시를 준비한다. 어수선한 동아리 발표회 연극무대 위에서 진지하게 집중하여 멋지게 독창하는 대목에서는 나도 현장을 상상하며 들뜨고 감격했다('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란 노래가 실제 있는 곡인지 너무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없어서 좀 아쉬웠다. 어떤 곡과 매칭해볼 수 있을까). 미르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듯이 소질이 없다고 볼 순 없지만, 방학 중 서울 학원을 다니면서 실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자신의 꿈에 대한 의문이 싹튼다.
바우는 소희가 떠난 빈 집 마당에 자기만의 비밀화원을 가꾼다. 재이의 부탁으로 교내 연극무대를 진짜 꽃과 풀로 꾸미는 일을 맡고, 성공적인 공연에 성취감도 느낀다. 처음엔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생명과학고에 진학하기로 했다. 바우가 정원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곳에서는 온전한 자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좋아하는 이성친구 앞에서는 식물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순간 의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열일곱 살을 문턱에 둔 아이들이 아직 자신의 앞길에 대해 명확히 말할 수 없다. 어떨 때 가장 자기다운 지,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더듬거리며 길 위에 제 발자국을 조심스레 새겨나가고 있을 뿐이다.
"보상으로 사랑받는 거 이제 안 하려고. 부모라면 자식이 공부 못해도, 잘못해도 사랑해야 하는 거잖아… 날 위해서도 안 가려는 거야. 이번에 영어 캠프에 가서 많이 힘들었어. …아무리 정소희가 돼서 부잣집 딸 코스프레를 해도 내 속은 달밭마을 윤소희야. 전엔 윤소희를 감추려고만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걸 버리면 내가 아닌 거야. 작가가 되겠다면서 진짜 나를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 (98p 외고에 가지 않기로 한 소희)
정원에서는 낯가릴 일도,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할 일도, 생각을 말로 바꿔야 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냥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고 충만했다.(102p 흙을 만질 때 가장 편안한 바우)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뮤지컬이 진짜 좋은 건지 공부하는 게 싫어선지 잘 모르겠어."
"공연할 때 소름 돋았다는 것도 뻥이었어?"
"아니, 그건 진짜야."
"그럼 지금까지 그만큼 소름 돋았던 적 또 있어?"
잠시 생각하던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197p 무대 위에 선 자신을 좋아하는 미르)
바우는 유학은 몰라도 유럽의 정원들은 직접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모종삽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파고 드는 공부에 심취하게 될 지도 모른다. 소희는 더 큰 세상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져서 독학으로 외고출신보다 훨씬 더 외국어에 능통해질 수도 있다. 미르는 자신이 전율했던 순간을 오래도록 간직하며, 그 기억을 발판 삼아 다른 어떤 일에도 용기있게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의 이 마음과 계획이 변형된다해도 괜찮다. 길은 반드시 어디론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것만을 꼭 믿는다면.
부모에게도 부모만의 길이 있다는 진실
<숨은 길 찾기>에서는 유독 어른들의 마음에 감정이입 해보는 대목이 많았다. 우선, 대학이 아니라 고교 진학에서부터 진로방향이 대략 잡히는 현실파악을 하고 나니, 자녀의 진로이야기를 들을 날이 훨씬 빨리 다가오겠구나 싶어, 내심 긴장된다. 바우 아빠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바우 부모였다면? 바우에게 야망이 없다고 다그쳤을까..? 음..그건 아닐 것 같다. 박사학위도, 출세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전제해야만 하는 것을 분명하게 설정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자녀의 주체성. 스스로 하고 싶었던 건지 말이다. '평생직장이 없는 시대', '콘텐츠 1인기업' 시대가 도래해서 그럴까? 하여간 좋아하는 분야를 벌써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바우가 얼마나 대견하고 부러운지. 심지어 나는 "그나저나, 바우아버님, 회장님이야말로 기왕 유기농농법에 대해 유튜브 한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 라고 말하고 싶은 지경.
미르 엄마가 달밭마을에 오게 된 비하인드 사연이나 재이 엄마의 과거 심경을 들었을 때는 같은 기혼유자녀 여성으로서 마음을 다해 공감이 됐다. 사실 아이들만큼 미르엄마나 재이엄마는 달밭마을에서의 생활을 어떤 마음으로 적응해가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미르엄마가 이혼을 선택한 이유도 너무나 납득이 가고, 재이엄마의 그늘졌던 기억도 그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만약 앞으로 인생의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 자녀를 진짜 존중하는 방법이 뭔지도 배웠다. [그런 사정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 곳을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좀 더 존중하고 믿을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닥친 일인데 아이라는 이유만으로-아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결정이나 판단에서 소외되고 제외되는 것, 진짜 기분 나쁘다 (195p)]
미르 엄마의 이 말에 유독 심장이 찌릿했다- "너희들한텐 3년이 별 게 아닐지 몰라도 엄마 나이엔 아니거든. 아직 용기 낼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거야.(160p)".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보다 눈물을 쏟는 미르의 이 문장에도 그만 코가 시큰하다- "진료소장도, 미르 엄마도 아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한 사람이었다(196p). 바우 아빠가 무던하게 뱉던 이 말은, 마치 느티나무 그림자길 어딘가에 쓰여있는 어느 여행자의 편지같다- "농사 망친 것도 억울한데 굶기까지 하면 더 손해지. 그리고 먹고 기운 내서 일해야지, 엎어져 있으면 벼가 저절로 일어난다냐.(62p)" . 삶의 성숙이 쌓이면 막힌 길도 뚫어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걸까. 소설 속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되려 내게 향해 한번 더 반복해 말해야할 것 같다. 지금의 이 마음과 계획이 변형된다해도 괜찮다. 길은 반드시 어디론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것만을 꼭 믿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