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도 하늘말나리야>가 2021년 개정판(초판 1999년)으로 재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금이 작가님의 '성장소설 3부작'의 첫 작품인만큼 꼭 읽어봐야할 독서목록이었는데, 현대적 느낌의 산뜻한 애니메이션풍 일러스트 표지로 만나니 더욱 반갑다. (이금이 작가님은 개정판을 출간할 때, 표지만 바꿔 다시 찍는 게 아니라 내용도 현 시대에 맞게 많은 수정을 하신다고 함)
아빠와 헤어지고 시골마을 진료소장이 된 엄마를 따라 달밭마을로 전학온 미르. 부모의 기억이 희미한 채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희.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주던 세계인 엄마를 잃고 입을 닫은 바우. 열세살 세 아이들의 사연과 마음이 각자의 시선으로 교차 서술되는 구성이다. 처지가 같은 듯 하면서도 달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새 헤어짐을 앞두고 뭉클한 우정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의 따뜻한 느티나무였음을 인정하면서.
소희 편에서 '혼자만의 얼굴을 본 사람이 가져야 하는 아주 작은 예의(76p)'라는 제목이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다. 미르는 엄마를 오해하고 속상하게 하고 싶어 뾰족하고 삐딱하게만 행동했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하기 싫어 달밭마을 학교 아이들에게도 마음을 열 의향없이 냉랭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르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아이의 불안하고 외로워보였던 얼굴을 기억하는 소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가만히 관찰하는 감각이 섬세한 바우도 이렇게 생각했다.
소희는 미르가 못마땅하다가도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던 모습이 떠오르면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혼자만의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자기 역시 미르를 재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다.
나는 미르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 애가 보여 준 게 아니었다고 해도 혼자만의 얼굴을 본 사람이 가져야 하는 아주 작은 예의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남의 일기장을 봐 놓고 남들에게 그 내용을 떠들고 다니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너도 하늘말나리아> 81p
바우는 미르가 날카롭게 구는 이유를 이해했다. 자신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엄마 잃은 슬픔을 나타냈듯이 미르는 가시를 세운 모습으로 아빠와 헤어진 슬픔을 표현하는 거라고 바우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면 엉겅퀴꽃이 생각났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 같지만 만져 보면 부드러운 엉겅퀴꽃.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여린 마음을 들키기 싫어 가시 돋친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너도 하늘말나리아> 149p
미르는 소희와 바우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예의없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곧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말한다.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집요하게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예의. 보여지는 것만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예의. 이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익숙해지는 능력 같다. 그 연습 자체가 예의인지도 모르겠다.
소희와 바우가 미르를 이해했다면, 나는 책을 읽으며 소희를 이해한다. 나의 성정(성질과 심정)은 소희보다는 미르 쪽에 가깝다. 소희가 단 한번도 미르처럼 주저앉아 울음이 터트려본 적 없으며, '결손'의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성실한 모범생처럼 지냈다는 이야기에 먹먹해졌다. 부모에 대한 원망조차 없고, 미르나 바우가 엄마아빠를 그리워하고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게 차라리 부러운 이유를 깨닫는 순간엔 [(용서할 수 없는 건 추억이 많기 때문이다(121p)],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희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자신이 말할 대상이 사라졌다고 믿었던 바우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희가 진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러기 힘들다고. 소희가 당당한 건,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소희에겐 소중한 할머니와 가족처럼 도와주는 이웃어른들이 있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느티나무같은 존재들이 있을 때만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이제 바우와 미르는 어떨까? 바우와 미르에게는 친구가 있다. 바우는 미르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타박당하고 있는 걸 목격했던 순간엔 너무 말을 하고 싶었다. 아빠가 미르의 엄마를 좋아한다고 짐작했을 땐, 감정에 완전히 충실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미르에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바우는 자신의 의지를 믿을수록 점점 말이 필요한 순간을 외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바우가 엄마에게 쓰던 편지도 언젠가는 자신을 향하게 될 날도 그려진다. 미르는 엄마가 자신을 더이상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 게 좋았다. 엄마가 마을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직접 지켜보면서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미르는 엄마를 미워하고 반항하는 데 쓸 에너지를 이제 자신과 대화하는 데 써 가겠지?
땅만 내려다보지 않고, 고개를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꽃,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하늘말나리들이 어딘가에서 고고하게 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느티나무가 가르쳐주는 지혜를 터득하면서 말이다.
'오백 살이라고?' 이제 열세 살인 미르는 얼마큼 오래 살아야 오백 살이란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한 자리에 붙박인 채 서 있었을 걸 생각하자 가지 하나하나가 나무가 겪은 일 같아 보였다. 그러자 지금 벌어진 일이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스쳐 갔다.
<너도 하늘말나리야> (3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