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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
  • 김종광
  • 15,120원 (10%840)
  • 2025-08-08
  • : 335

대중이여, 어떤 게 진짜 좋은 문학인갑?


창작 동기를 떠나, 독자님들께서는 일단 가볍게 즐기셨으면 좋겠다. 소설이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탄생했고 발전해 온 건 분명하니까.

(p.228, 작가의 말)


재미와 의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소설을 만났다.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을 읽었다. 책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율려국’이라 적힌 지도가 그려진 보라색 삽화가 눈길을 끌었고, 그 아래를 감싼 띠지와 검정 바탕이 독특한 조화를 이루며 묘한 매력을 풍겼다. 보면 볼수록 강하게 시선을 끄는 표지였다. 


책장을 한 장 넘기면, 이십여 년 동안 꾸준히 다작을 이어온 작가의 발자취가 소개되어 있다. 다시 한 장을 넘기면 차례가 나온다. 제목 하나하나가 흥미로웠다. 


낙서인 서열 국민투표

붉은 방의 체 게바라

최고낙서가

인간해방혁명

낙서부인의 재림


작가의 말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소설가 소판돈이 ‘낙서’ 취재 차 가상의 나라 ‘율려국’으로 떠나는 첫 장면부터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점차 진행될수록 점입가경의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어느새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에 점점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소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율려국‘에 대한 도발적인 상상력, 한없이 찌질해 보이는 주인공, 감각적인 언어로 구사되는 문장 덕분에 재밌게 읽혔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반부쯤 들어서면서부터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처럼, 단순히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혁명을 통해 ’인간해방전선‘이 무력으로 율려국을 장악했을 때, 모든 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물대포를 맞으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능력하기만 한 소설가 소판돈을 바라봐야 할 때. 어느샌가 독자는 다른 층위의 이야기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어떤 분노와 슬픔과 연민 따위의, 한데 어울리지 않을 법한 낯선 감정이 서서히 배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


잠깐 화제를 돌려본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나요?

모르겠어요... 아마도 광대일 것 같아요.

(-베르나르 뷔페)


20세기 프랑스의 마지막 구상 회화 작가인 베르나르 뷔페의 말이다. 이는 살아생전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뷔페가 남긴 대답이다. 뷔페는 평생 자신의 자화상으로 수많은 광대를 그렸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각난 눈, 코, 입, 그리고 귀. 서로 다른 색으로 파편화된 얼굴. 


그것은 곧, 광대와 서커스라는 주제를 통해 뷔페가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의 내면과 외면, 그 본질적 이중성에 대한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출처-예술의 전당, 참고)


*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밝힌다. 해학으로 우리 문학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질문해 보고 싶었다고. 답이 아니라, 물음이라고. 흥미롭게도, 작가가 전략적으로 택한 풍자와 해학이라는 방식은 묘하게도 뷔페가 그린 광대의 모습과 닮아 있다.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을 끝까지 읽고 나니, 나도 소판돈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어떤 소설가로 기억되고 싶나요?"


어쩌면 그는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모르겠어요... 제가 소설가인지조차도요.” 라고.


이 소설은 어쩌면 소판돈의 자화상 같은 작품일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깨지고, 부서지고, 조각난 율려국이라는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만 하는 소설가 소판돈의 비극적인 운명. 하지만 그는 끝내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다. 


『소설가 소판돈의 낙서견문록』은 한국 문학판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전례 없는 소설이다. 이 땅에서 문학하고 살아가는 사림이라면, 누구나 이 풍자의 속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나뒹굴며 살아남고자 발버둥 친 소설가 소판돈의 작가적 삶이 결코 소판돈만의 것이 아님을 이 소설은 되짚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 나면 소판돈의 자화상이 바로 나의 자화상이 아닌가, 소름 돋게 만드는 소설이다. 희비극으로 징하게 버무려진 한마당 메타판타지풍자극을 보고 나면 진하게 걸러진 생막걸리가 절로 떠오를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소설가 소판돈은 내게 이렇게 물어오는 듯하다. 


대중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

어떤 게 진짜 낙서인갑?

어떤 게 진짜 좋은 문학인갑?

(-소판돈의 낙서견문록, P.213)


우리는 그의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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