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이건 좀 아닌데, 라며 뭔가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있다. 때로는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상대와 비교해 약자이기에 겪는 일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면서도 그것을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기본적인 권리조차 침해당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되려 적반하장으로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그러냐고, 원래 그래왔으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 잔잔한 물결에 돌 하나 퐁당 던져 파문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게다가 잘못된 관행이 자리 잡은 곳은 사람을 참 이상하게 몰아간다. 튀는 사람 혹은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는 식으로.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연결되며 눈총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똑소리 나는 사람은 부당함에 대해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피력하겠지만, 내향적이고 소심한 사람은 그마저도 힘들다. 결국은 끙끙거리며 입을 다무는 것을 택한다. 조금은 제발 누군가 나서서 속 시원히 해결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아주 부끄러웠고 많이 뜨끔했음을 고백해본다. 우리 주변에 있는 문제들에 무관심했고, 어떤 것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마치 저자가 프롤로그에 언급했던 ‘내 방 안의 코끼리’처럼 존재하지 않은 듯 외면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사람의 성향에 상관없이, 무언가를 ‘못’했든 ‘안’ 했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그저 바라기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도 이룰 수도 없음은 당연하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여성 인권의 시작, 참정권으로 시작된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참정권(參政權)은 국민이 국정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참여하는 권리. 선거권, 피선거권,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성참정권은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라고 생각하면 쉽다. 미국이나 영국은 바로 여성의 참정권을 얻기 위해 오래도록 싸움과 투쟁의 시간을 겪었다. 그런데 그 운동마저도 초기에는 인종과 지위에 따른 차별이 있었던, 매우 제한적인 ‘일부’ 여성을 위한 운동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롤모델이었던 미국의 정치 시스템을 따라 자연스럽게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를 쓰고 투표를 하는 것이고, 또 투표하라고 권장하는 것일까? (...중략...) 먼저, 투표를 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p.27)
그렇다면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면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많은 학자들은 여성의 투표권 확보는 정부 정책과 예산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중략. 특히 가정과 연관된 이를테면, 보건과 교육, 그리고 아동을 위한 정책과 예산의 증가 현상이 눈에 띄었다. (p.28)
참정권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여성이자 인간의 존엄성, 기본적 인권 보장에 대해 심도 있게 이어진다. 성차별과 남녀임금 격차, 출산과 육아로 이어진 경력 단절, 시간제 비정규직, 비정규직 안에서도 벌어지는 임금 차이 등 결국 여성은 노동 시장의 구조적 차별을 생생히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법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해야 하고 사회 구조가 변화해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봤을 것이다. 다만, 바꾸려는 노력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함께 해야 함을 저자는 언급한다.
그리고 1장에서는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성향 차이도 두루 살피는데 특히 취약 계층에 대한 언급이 인상 깊었다.
대기업 CEO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개인의 출세이지 전체 여성의 삶의 향상과 하등 상관이 없다. (p.51)
여성 단체나 여성학자, 여성 운동가들이, 대기업 여성 CEO 비율이니 여성 국회의원 비율 등과 같은 기득권에서의 평등보다 취약 계층에서의 평등을 더 목소리 높여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p.52)
물론, 여성 CEO나 여성 국회의원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한국이 여성에게 얼마나 평등한 국가인지를 통계상으로 보여 주기 좋은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차별과 성희롱으로 인해 마트 창고에서 눈물 흘리는 여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p.53)
2장에서는 장애인과 성 소수자에 대해 들여다본다.
지금의 선진국이야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정책이 많다지만 이들 국가에도 장애인에 대한 끔찍한 차별과 폭력의 역사가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에서는 우생학이 큰 인기가 있었다. 나치는 이를 이유로 많은 사람을 학살하는데 여기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 장애인, 유색 인종, 집시 등 많은 소수자가 포함되었다. 미국 인디애나주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지적 장애인에게 불임 수술을 강제로 했다고 한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할까.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네 집값이 내려간다고 특수 학교 설립을 반대하고 나서는가 하면, 교통이든 시설물이든 장애인들이 편히 이용하기에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안 그런 사람보다는 차별과 편견으로 대하는 사람, 내 일이 아니므로 관심 없다며 선 긋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역시 그냥 스스로 변하는 것은 없다.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때이다.
그리고 사회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에게 해야 할 기본적인 책임이 있다. 시민 중 그 누구도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중략...) 때로는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할 필요도 있다. 통합 교육이 그러한 시도의 일부분이었다면, 시민들의 의식 교육 또한 사회가 책임지고 해야 할 부분이다. (p.102)
종종 사회 인식의 전환을 통해 차별을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아쉽게도 선한 시민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의 전환은 많지 않다. 대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을 통해 숨은 이슈는 공론화되고. 공론화를 통해 만들어진 규제와 법을 통해 인식의 전환은 자라난다. (p.118~119)
3장은 공동체에 대한 시각이다.
한국은 미국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이웃과 교류하기보다는 개인의 삶에 더 집중하는 모습까지도. 어렸을 적에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말이 너무나 낯설기만 하다. 어떤 계기가 있지 않은 한, 굳이 이웃과 개인의 삶을, 우리 가족의 삶을 공유하며 정을 나누지는 않는다.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남의 입에 개인의 일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싫고, 언제부터인가 이웃이라고는 해도 외부인에 대한 신뢰는 그리 금방 쌓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이것을 단순히 이웃과의 단절로 볼 게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이 사라져간다며 민주주의의 위기까지도 올 수 있다고 보았다.
사회적 자본은 쉽게 말해 사회 구성원에 대한 혹은 사회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사회는 구성원 간의 신뢰가 두텁고 이러한 신뢰 관계는 그 사회의 경제 및 사회 발전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략...) 사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면,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길 이유가 없다. (p.133)
지역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의 유지도 중요하지만, 공동체를 이야기하자니 책에서 언급한 ‘한민족’에 대한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민족도 아니고 한민족이라고 하면 어쩐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떠오른다. 모두가 하나로 묶여있는 듯 ‘우리’라는 테두리로 소속감을 주는가 하면, 아픈 분단의 역사와 통일도 과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명 차이는 존재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는 북한과 통일에 대해 전혀 인식이 다르다. 젊은 세대에게 북한은 조금은 껄끄럽고 조금은 불편하고 묘한 긴장감과 갈등을 주는, 가깝고도 먼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West-East Divan Orchestra’에 대한 이야기는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총 대신 악기를 들어 함께 클래식 곡을 연주했던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의 젊은 음악가들. 그렇게 서로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가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문장에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여본다.
4장은 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메이저 리그에서 흑인 야구 선수들이 사라져 가는 현상이라든가 개츠비 곡선만 보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지만, 그것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위한 화두에 지나지 않는다. 4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부유한 가정, 부유한 부모 아래에서의 자란 아이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교육, 건강, 식습관, 경제적 여유 측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고 좋은 위치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그리하여 빈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데 그렇게 사회 속의 계급과 집단은 완고해지고 있다.
'문화 자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의 상류층은 단순히 재산뿐 아니라 문화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계급을 완성시킨다고 했다. (...중략...) 음식도 문화 자본 중 하나이다. (p.228)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의 삶의 궤적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무서운 속도로 고착화되고 있다. (p.241)
그럴 수밖에 없다. 몇 년 전에 등장해 한창 유행했던 ‘수저론’으로 설명하자면, 금수저와 흙수저는 일단 그 시작점이 다르다. 그러니 사는 것만으로도 벅찬 흙수저는 아무래도 금수저처럼 빨리 경제적으로 안정화되고 성공하기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제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은가. 열심히 노력해 성공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건 드문 경우고, 단지 노력만 가지고는 참 힘들다는 거. 그만큼 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거 말이다. 그동안 우리가 방 안에 코끼리 없다고 외면해왔지만, 아니다, 코끼리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우리가 못 본 척 넘어가고 있었던 정치 사회 이슈가, 소수자들의 문제가, 약자들의 현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간극을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p.251)’고. 비주류, 사회적 취약 계층, 소수자들과 교류하고 이해하며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첫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