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는 저 위에 펼쳐진 하늘을 보며 상상력을 키워나간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푸르름, 나아가 지구 밖 우주를 향해.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늘만큼이나 닿지 못하는 광활한 곳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바다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포유류, 고래가 존재하고 있으니, 오늘도 그들은 푸른 심해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거닐고 있을 것이다.
『프롬 토니오』. 이 책은 환상적이면서도 기이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답다. 작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다 밑의 바다, 고래와 영혼의 언어의 세계를 보여주며 몽환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을 펼쳐낸다. 어느 날 이 책의 주인공 미국인 화산학자 시몬 앨리엇은 마데이라 남쪽 해변에서 파일럿 고래 수십 마리가 해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그 이름처럼 날개를 잃고 불시착한 경비행기처럼 보였(p.5)’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이에 거대한 흰 수염고래가 한 마리 있었고, 그 입에서 정체불명의 생물이 나왔다는 점이다. 시몬은 그것을 모포로 덮어 집으로 데려온다.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춰가며 말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점점 하나씩 떠올려 간다.
“내가 누군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할 수 있네. 유토피아는 두 가지의 어원을 갖고 있어. 유토포스(eu-topos), 말 그대로 '좋은 곳'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우토포스(ou-topos),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네. 이 세계엔 유토피아가 없지만 내가 있었던 세계엔 있지. 바다 깊은 곳에 또다른 바다가 있네. 바다의 바다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유토(euto)가 있네. 그곳의 대기가 이렇게 황금빛이었네. 머리 위의 하늘과 흐르는 물결 속에 금이 녹아 있었지. 녹은 철과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 유토. 나는 그곳에서 건너왔네.”(p.96)
그는 자신이 토니오(Tonnio)라고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토니오는 전투기 조종사였으며 비행기가 포격 당해 망망 바다 한가운데 착륙을 시도했었다. 그러던 중 흰 수염 고래에게 삼켜져 지구의 중심을 향해 잠수했었고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바다, 유토라는 세계에 갔다가 다시 거기서 건너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지금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기묘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토니오라는 존재도 그렇고 고래의 언어를 청각은 물론 시각적으로 이미지화한 문장은 읽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지는 듯했다. 특히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바다 아래의 세상이자 세계의 안쪽에 대한 묘사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며 점점 빠져들게 했다.
더불어 이 책은 인물들의 내적 변화를 통해 그것을 읽는 사람 역시 함께 치유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바다에 잠수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앨런을 찾느라 거의 자신의 삶을 포기했었던 시몬도, 가족을 잃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데쓰로도 어느새 저마다의 상실과 슬픔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점차 삶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토니오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기로 힘을 모은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유토라는 세계를 꿈꿀지도 모르겠다. 고래를 보고 싶고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분명 그곳은 육체의 고통도, 나이 듦과 죽음이 없는 초월적인 세상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토니오를 통해 다시 한번 느낀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갈망하고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의미, 그리고 살아있다는 느낌은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것. 전해지는 온도와 정서. 이 모든 것이 토니오에겐 너무도 강한 힘으로 와닿았다. 여기가 유토가 아니라는 확신. 다시 지상의 존재로 돌아왔다는 실감. 육체와 육체를 통해 주고받는 살갗의 느낌과 피부밑을 흐르는 혈액의 뜨거움. 그 느낌은 살아 있다는 선명한 인식과 함께 한 걸음 앞에 죽음이 있다는 절대적 현실을 깨닫게 했다. (p.205)
“그래, 차라리 이렇게 늙어가는 이 느낌이 삶의 감각이지. 죽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안전한 삶은 왜 지루한 걸까. 시몬, 이야기를 더 해도 되겠나? 유토란 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 누구라도 좋으니 붙잡고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진다네.” (p.230)
“...마음의 시간은 흐르지만 유토의 육체는 제자리에 멈춰 있다는 건...... 그것은 생각처럼 좋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더군. 이상하다, 이상하다, 느끼다가 마침내 무감각해지네.” (p.231)
토니오는 시몬과 데쓰로 그리고 우리에게 전한다. 죽음이란 그것으로 끝이 아니며 영혼은 그곳에 머물고 있으니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다고.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프롬 토니오』는 죽음과 사랑과 삶에 대해 따뜻하고 편안하며 부드러운 온기로 한없이 그렇게 마음을 데워주는 책이었다.
“우리들에게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 죽는 순간의 통증? 더 살 수 없다는 아쉬움? 아니야.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지. 떠나는 자도 남겨진 자도 같은 이유로 두려워하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죽음 저 너머로 떠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속에 데리고 간다네. 남겨진 자들은 반대로 죽은 자들을 떠나보내지 않고 기억 속에 담아 함께 살아가지. 데쓰로 자네처럼 말일세. 그것이 기억이고 추억이야. 그것은 환상이나 환영 같은 것이 아니야. 영혼은 바로 그곳에 머문다네. 그리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 내가 앨런을 만나고 온 것처럼. 만날 수 있지. 아니, 반드시 만나게 되네. 죽은 자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누군가가 간절히 찾는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어.”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