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파일명 서정시> 中
무언가를 잃지 않고서는 대각선이 될 수 없지
낙엽들은 나무를 잃고
나는 오래된 계곡 하나를 잃었지만
그렇다 해도 기억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진 않겠어
다만 비스듬히, 비스듬히, 말하는 법을 배울 거야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길게 성호를 긋고 사라지는 별똥별에 대해
수많은 대각선의 날들, 날개들, 그림자들, 핏자국들에 대해
대각선의 종족이 남긴 유언들에 대해
/<대각선의 종족> 中
시인의 표현을 직접 빌리자면 나희덕 시인은 “언덕의 풀처럼 나지막하고 바람에 잘 쓸리는 사람”(<나평강 약전>中) 같다. 시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존재들과 함께 흔들리며 써나간 시를 읽다 보면, 어둠 속을 걷는데 길을 잃지 않는 느낌이다.
시집의 제목 『파일명 서정시』는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이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던 시기, 서정시가 두려워 이를 가두려 했다는 것만으로 서정시가 가진 힘이 얼마나 컸는가를 입증해준다.
힘이란 무언가를 얻음으로써도 생길 수 있지만, 어떠한 힘은 무언가를 잃었을 때 발휘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잃지 않고서는 대각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잃었을 때만 보이는 세상이 서정시에는 있다. 버림받고 취약하고 학대당한 존재들을 향해, 관망하며 쓰는 시가 있고 직접 그 존재가 되어 생으로 답하는 시가 있다.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는 전적으로 후자다. 우리에겐 길을 안내해주는 표지판보다 어둠을 함께 걸어주는 불꽃이 필요하다, 불온한 말이 필요하다. 서정시가 필요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