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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페르님의 서재
  •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무라카미 하루키
  • 11,700원 (10%650)
  • 2012-06-27
  • : 4,999

소설가는 소설을 쓸 때 머릿속에 많은 서랍이 필요합니다. (...) 소설을 다 쓰고 보면 결국은 쓰지 않은 서랍이 몇 개씩 나옵니다. 그리고 그중 몇 개인가는 에세이 재료로 쓸 만하군, 싶은 것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p.6)

 

하지만 내게도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 방침 같은 건 일단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를 내리긴 꽤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p.32)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은 후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가 읽고 싶어져 읽게 된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이 책은 일본의 패션 잡지 <앙앙>의 인기 연재 ‘무라카미 라디오’의 일 년 치 글, 총 52편의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무라카미 라디오’시리즈는 총 3권이 있는데, 그 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이 책의 제목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책을 읽다 보면 책에 수록된 에세이 중 두 편의 제목을 합친 게 이 책의 제목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무라카미식 유머와 글의 색채가 함축적으로 담긴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 편의 글마다 곁들어진 귀여운 삽화들은 에세이와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각 편의 글 마지막에 하루키의 얼굴 형태와 함께 짧은 단상(혹은 아무 말)이 쓰여 있는데, 처음에는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이 달려있을까’라며 추측하게 되고, 이후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선물꾸러미를 풀어보는 것과 같은 약간의 설렘도 느껴볼 수 있었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무척 담백하다. 하루키가 책의 첫머리에서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 말마따나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은 조금 내려놓고 소설가와는 분리된 정체성으로 에세이를 써 내려간다. ‘소설에서 채 열지 못한 머릿속의 서랍들에서 꺼낸 재료’라고 하기엔 짧은 글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감상들이 때론 예리하고 묵직하다. 거창한 재료가 아닌 소박한 재료를 최선을 다해 요리하겠다는 하루키의 목적은 소소한 일상이라는 소재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둔감해졌던 독자들의 감수성이 쉴 공간을 마련해준다. 이 책을 항상 머리맡에 두며 자기 전에 읽었는데, 그만큼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힘 빼고 읽기 좋은 책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하루키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2012년에 출간됐다는 시기적 명분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소설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된 이러한 문제가 에세이로까지 옮겨간 걸 단순히 ‘문학적 표현’이라고 용인하며 넘어가기엔 그의 젠더감수성과 성적 대상화로밖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언어적 빈곤함’에 작가로서의 실력이 의심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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