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사세요?”
대한민국의 어느 날. 이 질문은 여러 의미를 담는다.
- 일하고 있는 곳에서 집은 얼마나 가까운지, 질문한 사람과 질문을 받은 사람이 좀 더 가까운 유대감을 지닐 수 있는 동질적인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최종적으로 질문을 받은 사람의 경제적. 문화적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묘하게 뒤틀린 이 질문의 기능은, 당신이 수도권이나 대도시 혹은 한적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는지, 강 이남과 강 이북에 사는지를 구분 짓기도 하고, 학군 및 생활반경이 좋은 곳에 거주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디 출신(민족적 뿌리)이세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일민족인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크게 와닿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할머니에게 ‘당나귀’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작가는 보스니아계 출신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다. 보스니아 내전과 더불어, 어머니와 함께 독일로 이민을 가고 난민 생활을 하게 된 그에게 있어서 ‘어디 출신이냐?’라는 질문은 혈통과 출생지가 어디냐는 의미만을 담지는 않는 듯 하다. 작가는 ‘어디 출신이냐?’라는 질문 속에 내포될 수 있는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서, 자신의 출신은 ‘지금은 소녀의 기억을 지닌 마피아 같은 크리스티나 할머니, 돌아가셨지만 친절한 할아버지. 콩알로 점괘를 봐주는 외할머니와, 낚시를 좋아하는 외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유머러스하게 대답한다.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우리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가? 국경과 경계선? 당신과 나는 다른 민족임을 증명하는 서류일까?
그 모든 것에 대해 작가는 - 조심스럽게 혹은 과감하게 - 출신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처럼 풀어낸다.
보스니아 내전 및 유고슬라비아 해체과정과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지도자 티토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다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유년 시절 겪은 비셰그라드에서의 추억과, 환상적인 공간 같은 오스코르샤에서의 상상 및 재미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와의 대화, 독일로 이주하면서 겪게 된 학창 시절의 기억들, 또 작가로 인해 재조합되는 할머니-할아버지-부모님 2세대의 추억의 단편들을 읽고 나면 역사적인 지식이 없이도 우리는 작가의 기억을 통해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한 사람을 정의할 수 있는 혈통이란 과연 무엇일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작품 속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유고슬라비아, 이 나라는 사라졌고 나는 난민으로서 살아가야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많다. 나는 콩알로 나의 점괘를 유려하게 쳐 줄 수 있는 외할머니가 있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지만 나의 크리스티나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나의 소중했던 유년 시절, 그것이 나의 출신이고 나를 만드는 기반이다."
"누군가 나에게 출신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길 건너에서 친절하게 웃는 이웃 이야기부터 먼저 꺼낼 것이다."
"소속감이 곧 출신, 전쟁도 곧 출신, 그렇게 지나오며 거쳐간 많은 기억들과 인연이 곧 출신이다."
작품의 초입부에는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거리에 서 있는 소녀 같은 할머니가 등장한다. 할머니의 희미해져 섞여져 버린 기억, 무뎌져 가는 기억들, 오히려 선명해지는 할머니가 젊을 때의 기억, 이를 받아들이고 아파하는 가족들과 작품 곳곳에 퍼져 있는 유머 코드.
작품 곳곳에서는 할머니의 기억, 그리고 작가의 기억이 자주 등장한다. 어머니의 기억이 나타나는 부분에서는 무슬림의 혈통으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아픔, 하지만 젊고 당당한 그녀를 작가는 사랑을 담아 기억한다. 또한 독일의 난민 생활을 하면서, 고학력의 경영학자인 아버지는 독일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일자리 면접 자리에서 결박된 양손이라는 호칭을 듣기도 하는데, 그 순간 글쓴이는 어떤 것을 기억하고 싶었을까?
혈통과 출생지가 사람들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통용되고, 타민족 배척 프로그램이 다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시대에 출신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진부하고, 파괴적으로 기록될 수 있음을 작가는 인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진부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할머니가 기억을 상실해가는 시점에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과 가족들의 기억을 새로 수집하면서, 국경선을 넘어선 고향의 의미를 재탄생 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민족성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이 오롯이 개인적인 기억과 인연에만 출신을 부여하지는 않는 듯하다. ‘정의, 충성, 인내’라는 꼭지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글쓴이의 애정이 드러나고 각 지역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을 동지, 민족의 형제-자매라 칭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젊은 시절 비셰그라드 평화지지 운동을 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고향과 소속되고 싶은 출신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작품 곳곳에서는 독일에서 난민 생활을 하며 겪어야 했던 아픔과 반항적인 모습도 등장한다. 작가는 자신의 반항이 일종의 독일에서의 적응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편이지만, 그가 속한 공간에서의 소속감은 지지하고 싶다고 설명한다.
누구나 자신이 있고 싶은 곳, 자신을 지지해 주는 공간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은 것 아닐까?
그에게 있어 비셰그라드, 유년의 오롯한 추억이 가득한 그곳은 소속감을 절대적으로 잃고싶지 않은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곳이 그의 출신이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가족과 인연들이 곧 출신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행정구역으로 분류되는 공간을 넘어서, 나만이 떠올릴 수 있는 추억들과 소중한 사람들, 언제든 이곳을 잃고 싶지 않다는 소속감이 드는 공간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힘들 때 옆에서 커피 한 잔 건네주는 동료가 있는 공간이라든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단칸방이라든지, 편하게 가족들과 드러누워 TV를 보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늘어놓는 집. 지금보다 좁고 불편했지만 앞 마당에 실컷 그네를 탈 수 있었던 어릴 적 살았던 집에 대한 추억 등.
차별과 분류를 넘어서 스스로의 공간과 출신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책의 리뷰를 마친다.
할머니는 거리에 서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