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여자의얼굴을하지않았다
#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p.60)
이 책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소련의 여성 군인 200여 명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Q&A가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되는 산문 형식이다. 책을 읽는 내내 여성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내가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에 대한 것 밖에 없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과 함께 연합국에 속했던 소련이 독일의 침공에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에 대해서 무지했다.
소련 여성들은 전쟁의 모든 곳에 있었다. 저격병, 포병, 전차병, 정찰병, 빨치산 병사, 공병소대(지뢰제거) 소대장, 전투기 조종사, 지하공작원, 통신병, 외과의, 간호병, 위생병, 기관사, 연락병, 취사병, 이발병, 제빵병, 물품보급병, 건설기술병, 병기공, 세탁병에 이르기까지 분야도 다양했다. 10대 중반 정도의 소녀 병사들도 많았다.
'긴 머리 대신 뭉툭하게 잘려나간 짧은 앞머리, 뜨거운 죽 냄비와 국그릇들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들을 기다리고 전투에 나갔다 무사히 돌아오는 사람은 백 명 중에 일곱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 혹은 전쟁터에 다녀온 후로는 줄줄이 걸린 붉은 살점의 고기를 볼 수가 없어서 시장에도 못 다니고, 심지어 붉은색이라면 사라사 천도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사연들……'(p.32)
교과서에서 봤던 전쟁은 숫자와 승리와 패배의 기록, 무용담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말 그대로 고통의 기록이었다. 전쟁의 영향을 받는 모든 것ㅡ'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p.18)ㅡ의 참혹한 현실이 그녀들의 목소리로 색깔과 냄새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많은 장면들이 뼛속까지 오한이 들고 눈물이 날 정도로 두렵고 무서웠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참전했던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공훈을 인정받지 못했다. 함께 싸웠던 남자들은 나 몰라라 입을 다물었고, 어떤 여성들은 자기들의 남편에게 꼬리를 친 '군대의 암캐'(p.429)라며 욕을 했다. 소련에서 약 백만 명가량의 여성이 참전해서 싸웠음에도, 이들은 전쟁 이후 결혼을 하지 못할까 봐 참전 사실을 숨기는 일도 많았다.
전쟁을 모래사장에 비유한다면, 몇 년도에 어디서 어느 전투가 이루어졌고, 누가 이겼다는 기록만으로는 모래 한 바가지도 담아낼 수 없다. 전쟁이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속에 새겨넣'(p.286)어, 고작 몇 달 만에 '부드러운 어린애의 모습이 확신에 차, 심지어 어느 정도는 모질고 엄하게까지 보이는 여인의 눈빛으로'(p.285) 변하는 그 과정을 찬찬히 따라갈 때에만 전쟁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허락한다.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p.272)
#문학동네 #다큐멘터리산문 #북스타그램 #서평 #페미니즘 #전쟁 #노벨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