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때문에 지하철 역을 도대체 몇 번씩, 몇 정거장이나 지나쳤던가.
맨 처음 책을 훑던 때에는 문단 구분도 없이, 그리고 쉼표도 없이 이어지는 모양새가 숨을 턱턱 막더니, 도대체 이게 뭔 짓이던가! 여태 자다가도 한 정거장 이상은 잘 안 지나치던 내가 무려 서너 정거장씩 지나치고, 투덜거리며 되돌아가는 길에 또 지나치는 상황에 빠져 버렸다. 숨도 못 쉬고 눈알을 굴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 책은.
이 책은 '문학은 인간성에 대한 탐구'라는 말을 정말이지 떡! 하니 보여 주었다. 전염병처럼 눈 머는 증세가 퍼져버리는 도시…, 이 극한 상황에서 보여 주는 인간의 오만가지 행동들….
특히 깡패들의 음식 강탈이며 강간 대목에서는, 냉혹하다는 느낌에 진저리를 치면서 작가가 미워졌었다. 그렇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했다. "맞아,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이러고도 남을 거야." ―상상하기도 무서운 우리네의 이 냉혹한 본성을 눈 하나 깜빡 않고 눈앞에 펼쳐 내는 작가의 관찰력, 혹은 인간 존재에 대한 해부 능력이 무서웠다. 소름이 돋도록.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 집단인 1호 병실의 사람들을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문한다.
나는 과연 이런 극한 상황에서, 차라리 못 보는 것이 축복일 이런 상황에서, 의사의 아내 및 검은 색안경의 여자, 의사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특히, 의사의 아내처럼? 자신에겐 다른 이에게는 없는 권력이 있는데, 과연 이 힘을 그처럼 자제하면서 남들과 그 짐을 공평하게 나누어 지려 할 수 있을까? 다른 상황까지는 몰라도, 그 강간의 현장까지도? 또, 깡패들의 두목을 죽이는 장면까지도?
차라리 안 보이는 것이 나을 그 끔찍한 상황에서, 그만한 자제심, 아니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 인물이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인가?
아무튼 엄청나게 사실적인(마술적 리얼리즘)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사실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그건 의사의 아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이 눈 먼 듯 맹목적으로 흐르는 사회·문화에 대한 우의일 거라 생각하든 말든, 여하튼 이 책이 보이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대단하다. 온갖 악부터 선으로 가득한 숱한 이들을 다 꿰뚫어 보고 있으니. 그래도 결말의 내용이나 의사의 아내, 의사, 검은 선글라스의 여자 같은 인물을 보면 이 책의 시선은 따뜻하다. 아니, 순진하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세상에서는 이 순진함이 먹힐까? 아닌 것 같아 슬프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