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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aghers4u님의 서재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 9,000원 (10%500)
  • 2006-10-20
  • : 11,293

 시험을 한 주 앞둔 목요일, 캐롤이 흐르는 카페 한 구석에 여자친구와 앉아있다. 이 아이가 경제 프린트를 넘기는 동안 나는 '사랑의 기술'을 재독한다. 아직 내가 새내기였을 때 그리고 이 아이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던 그 때, 꽉찬 가슴으로 읽어나간 그 책이다. 사랑에 대한 수업을 듣던 그 시절, 프롬의 이론은 내게는 사랑을 담은 편지의 한 구절이 되곤 했다.

 이 책은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장으로 시작된다. 이 장에 따르면 인간의 사랑은 동물들이 보여주는 애착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그 순간부터 다시는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성이 부여된 인간은 자연과 세상에서 부터 분리되는 자신을 너무나 잘 느끼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우리는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치 않지만 죽게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분리 경험은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든다. 그 불안은 우리가 평생 안고 살 그런 불안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이런 불안을 너무나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혜의 열매(이성)'을 먹은 뒤, 그들은 자연과 결별한다. 그리고 서로의 성기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로부터 불안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헤드윅에 등장한 그리스의 남남, 여여, 남여 신화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어떻게 세상과 분리되었을 때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할 것인가. 답은 여러가지다. 개인적으로(술과 담배, 성적 오르가즘), 또는 집단적으로(카니발) 도취와 황홀감을 느끼며 합일감을 느낄 수도 있다. 집단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통해 합일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니면 창조적인 예술의 작업을 통해 세상과 합일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롬에게 이는 모두 부분적인 답안들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가?

 그에게 있어 완전한 해답은 오직 다른 사람과의 온전한 융합인 '사랑' 뿐이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합일'을 이룬다. 이는 나의 부분을 떼어주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을 시장의 논리와 유사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랑은 '능동적'으로 '주는' 행위이고 이는 개인의 통합성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지만(오히려 긍정적이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기위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에 '참여'하지 못하고 '빠지려' 노력한다. 사랑을 주기보단 '받고자' 노력한다. 사랑을 능력의 문제보다는 '대상'의 문제로 기억한다. 누구와 사랑에 빠질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질문이다. 내 사랑의 대상은 누구이고 언제 나는 이 사랑에 빠질까?

 곧 우리는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사랑을 하지만 수동적인 사랑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세상과 분리되게 된다. 인간들의 질문에 대한 최종 답안인 사랑은 여전히 불완전하게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랑의 기술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어떻게 사랑을 '줄'것이고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은 사랑으로서만, 신뢰는 신뢰로서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정치적 문제를 떠나, 인간 실재에 대한 본질적 답안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기술을 길러야 할까. 이 아이를 위해 어떤 것을 줄 수 있을까. 일단 밥을 먹으러 가는 것 부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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