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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aghers4u님의 서재
  • 면도날
  • 서머싯 몸
  • 11,700원 (10%650)
  • 2009-06-30
  • : 33,877

“이걸 왜 읽고 있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요.”


 이 짧은 문답에 푹 빠졌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주고받은 문장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둘째는 질문에 답하는 래리의 모습이 너무 공감돼서. 부끄럽지만 시카고 한 클럽 모퉁이에 걸터앉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책을 탐독하고 지식을 갈망하는 래리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는다. 이 책을 읽은 것이 14년 말이었던가. 그 이후로 이 질문과 답안은 수 없이 던져지고 받아졌다. 어느 순간 이 문답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불분명해졌는데, 오늘 글을 끄적이기 위해 다시 한 번 책을 훑자 떠올랐다. 그리고 느꼈다. 난 래리가 되길 원했었구나.


 고전의 매력은 언제 어디서 그 이야기를 읽던 간에 현재·이곳으로 가져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래리의 시대와 나의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이 1920년대 전후로 누렸던 물질적 풍요와 오늘날 느끼는 매일 매일의 배부름에는 차이점이 많지 않다(심지어 방금 편의점에서도 느꼈다). 그리고 1929년 대공황이 가져온 추락과 정신쇠약(그레이 메튜린이 겪었던)도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의 부르짖음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1920년대의 풍요와 1929년의 대공황 사이에는 시대적인 변화가 존재하는 반면 우리는 배부름과 취업난이라는 두 모순적인 상황 속에 양발을 한 쪽씩 넣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이렇듯 두 시대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고, 나는 이런 상황적 유사함 속에서 나 자신과 래리를 동일시한다.


 소설을 읽으려 하면 난 항상 구도하는 인물에게 매력을 느낀다. 구도적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헤세의 소설이나 서머싯 몸의 소설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 갖지 않는 고민들을 갖는다. 그들은 언제나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이 고민이며,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 구도자들에게는 “하지만 래리, 그런 질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물어온 거잖아. 만일 해답이 있다면 벌써 밝혀졌을 거야.”와 같은 핀잔이 주어진다. 그리고 “남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야. 그것은 남자의 필생의 과업이야”와 같은 조언이 뒤따른다. 이는 내 삶 속 모습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할 일은 너무 많지만, 모르는 게 너무나 많기에 읽을 수밖에 없다. 난 항상 뭔가를 하고 싶어서 읽는 건데, 태클이 수 없이 걸려온다. “이걸 왜 읽고 있어?”나 “이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해야 하는데 뭐 하고 있는 거야”같은.


 그렇다면 왜 하필 ‘<면도날>’인가. 교수님이 이야기 하셨듯이 서머싯 몸하면 <달과 6펜스>아닌가. 숭고한 달(예술)을 쫓기 위해 6펜스(물질과 세속)를 내던져버린 폴 고갱의 매혹적인 이야기. 이해 받지 못할 것임에도 타히티로 떠나 간 예술가의 신화. 강렬하다. 비극적이다. 거룩하다. 그럼에도 난 그 소설이 아닌 <면도날>을 손에 잡는다. 왜일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이해를 위해 소설을 좀 더 멀리서 바라보자. 이 소설의 화자는 서머싯 몸, 저자 자신이다. 그는 소설의 주요 인물도 아니고, 사건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도 않다. 그는 전달자다. 그리고 대화하는 이다. 그는 래리의 구도적 삶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비추어준다. 이를 테면, 사교계에서의 명성을 위해 살아간 미국인 엘리엇이나 래리를 사랑하지만 드레스와 모피 코트의 안락함을 선택한 이사벨, 거친 삶 속에서 흔들거리다 죽어간 소피 그리고 대공황의 충격에 추락하지만 다시 제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레이 등. 몸은 그들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대화하고 조언한다(저자의 직접적인 개입은 이 소설이 참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이다). 래리는 이 모든 삶 사이사이를 훑으며 지나간다. 그리고 래리의 구도적 삶과의 대비를 통해 인물 각각의 방향성과 주요 가치가 가시화된다.


 중요한 점은 그 어떤 삶도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래리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래리는 사회에서 도태될 인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며 그는 일생을 명성과 명예만을 위해 살았다. 구도자(래리)의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몸은 그를 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그에게 안식을 전한다. 이사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모피 코트와 쇼윈도의 안락을 위해 래리를 포기한다. 심지어 래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소피를 망가뜨리기 까지 한다. 그녀는 소유한다. 하지만 몸은 그녀와 화해하고 평화로운 삶을 전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래리의 구도적 삶, 그리고 다른 인물들의 세속적 삶. 그 어떤 것도 부정되지 않았기에 독자(나)는 갈등한다. 그리고 몸에게 질문한다. “래리는 어떻게 되었나요?”하고. 몸은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냥 상상할 뿐이다. “아마 래리가 맨날 말했던 것처럼 정비소 일을 했을지 모르지. 아니면 택시 드라이버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래리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행로를 따르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데 만족할 것이다. 다만 적절한 때가 오면 나방이 촛불에 모여들 듯 확신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이끌릴 거라고. 그리하여 궁극적인 만족은 오직 정신적인 삶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함께 나눌 것이다.”


 <면도날>의 매력은 이 지점에 있다. 몸에게 구도하는 삶은 중요하다. “이걸 왜 읽고 있지”라고 묻는다면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폴 고갱을 원하지 않는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추락하고 마는 이카루스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을 위해 6펜스를 내던지지 않는다. 그는 한 쪽 눈을 지그시 감고 6펜스를 들어 올린다. 달과 동전이 잘도 겹쳐진다. 몸은 흐뭇하게 웃는다. 주머니 속에 동전을 넣은 뒤 달빛을 받으며 가던 길을 걸어간다. 삶의 고양을 말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해서 포기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각자만의 길이 있고 그 길마다의 가치가 있다. 늙은 소설가의 관록이 느껴지는 바이다.


 다시 나로 돌아오자. 나는 여전히 구도의 길을 원하는가? 그렇게 믿는다. 나 또한 래리처럼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 잡혀서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삶을 내던지고 싶지는 않다. 이사벨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즐겁게 살 것’이다. 그렇다면 몸은 말할 것이다. ‘그 말도 옳다’하고.


  니체는 태양과 같은 사람이 되라 한다. 스스로를 불태우고 만물을 창조하면서 그것들과 공존하는 태양. 면도날이라는 실존 고민 위에서 우리는 모두 태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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