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에 태어난, 한스-울리히 타머는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로 특히,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와 유럽의 파시즘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1962년 언어 학자이자 동화 수집가인 야콥 그림을 기념한 야콥-그림-슐레를 졸업한 후, 헤센의 마르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역사, 고전 문헌,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1971년 유럽의 파시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른스트-헤르만 놀테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0년 역사적인 대학으로 일컫는 뉘른베르크 에르랑겐 역사 연구소에서 미하엘 슈튀르머의 지도로 교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후 1983년부터 2011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뮌스터 대학의 현대사 정교수로 일했고 은퇴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 교수로 재직합니다. 지금도 왕성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앞서 설명한 국가 사회주의와 파시즘 연구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 프랑스의 지적 역사와 사회 연구로도 꾸준한 지적 연구에 힘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Die Französische Revolution"으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가 글 말미에 언급하고 있듯, 이 프랑스 혁명이 유럽인들에게 왜 '대혁명'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는 그만큼 혁명이 후세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일겁니다. 특히나 프랑스는 1830년, 1848년, 1871년의 혁명을 거치며, 공화국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복잡한 심상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현실 정치와 시민들의 이상 사이에서 '어떤 정치적 균형점'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 일인지 대혁명 이후의 복잡하고 치열한 역사적 전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는데요. 이전의 혁명을 뒤로 하고 단순한 왕정복고를 위해 움직인 프랑스 주변의 절대 왕정 국가들과의 불협화음은 공화국 프랑스와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에 이르렀고, 이를 단순한 카이사르-보나파르티즘의 군사-혁명적 준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전유럽에 혁명의 이상을 확산시킨 것도 사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대의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요구했던 만큼의 자유와 경제적 자립이 이뤄졌는지는 그만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 요인에 제일 먼저 추가해야 될 사항은 당시 군주였던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함과 정치적 무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구한말 고종과 이 루이 16세를 자주 비교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세세한 정치적 작업에서 이 두 군주의 차이는 극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목이 잘린 왕과 외세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한 다른 왕의 역사에서의 퇴장이 여러모로 학자들의 호기심을 이끄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루이 16세는 당시 프랑스가 처한 '조세 위기와 국정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법복 귀족'에 힘을 실어다 주었지만 결국에는 저들 신흥 귀족들에게 무참히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의 주요 세력 이었던 구귀족 세력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역설적이게도 구귀족들과 이해관계가 여러면에서 일치한 신흥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베르사유 궁의 왕"으로만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다른 혁명사를 작성한 윌리엄 도일의 분석대로, 밀의 1788년의 대규모 흉작과 1788년과 1789년의 혹독한 겨울은 '수확량 감소'로 이어졌고 농민들은 자신들의 입을 건사하기는 커녕, 다음 농작을 위해 가축용 사료도 비축할 기회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왕과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는 농민들이 몇년 간의 혹독한 시련을 맞게 되었지만 왕과 귀족들은 전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점이 결국 혁명의 불씨를 잉태하게 됩니다. 물론 왕은 '삼부회'를 소집하여 세금 부족에 따른 국가 운영 위기를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앞선 그의 '정치적 무능'이 극단의 위기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루이 14세 시절, 자신들을 프랑스 자체로 여겼던 그 귀족들이 여전히 국왕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었던 점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지방의 정치가 베르사유의 그것과는 확연히 괴리되어 있었고 왕이 파견한 소위 '지방관들'에게만 그 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프랑스 정치가 큰 위기로 내몰렸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제3신분의 혁명적 발걸음은 이미 상징적으로 확인되었고 더욱이 성직자들기 근소한 표차이로 이 혁명에 가세함으로써, 혁명 대표들이 왕의 테니스 코트에서 소위 역사적인 '선언'을 하게 만드는 토대가 됩니다. 후세에 의해 이러한 왕립 회의의 인사들이 결과적으로 '제헌 의회'의 기초가 되었다고 후술되지만 왕은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특권과 권력 유지에 몰두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후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대로 주저하다 군사력을 동원하지만 결국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국왕 고유의 특권과 권력 제한의 움직임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대세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파리에서 도시 빈민들의 식료품 구입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자 쉽게 폭동에 휩싸인 것과 더불어, 이를 지켜본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선언에 다수 시민들의 갈채를 받는 장면은 그만큼 의미심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는 '인권선언'으로 이어지고 "인민주권, 개인의 자유권, 법 앞에 평등, 자유로운 소유권, 대의 헌법의 원칙들"이 그곳에서 개념적으로 도출되기에 이릅니다.
1791년 10월 파리에서 새로운 입법 의회가 선출되어 그 즉시 소집됩니다. 이들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은 지방과 지역의 선출로 일정 수준의 정치 경험을 쌓은 인물들로, 여기에는 자크 피에르 브리소, 콩도르셰, 가데와 베르뇨와 같은 명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코뱅 당과 같은 의회 내의 정치 세력들은 이합집산의 결행 등을 통해, 1792년 9월 21일, 새로 소집된 국민공회가 역사적인 조치인 "왕정 폐지와 공화국 선포"를 역사적인 장면으로 등장시키긴 하지만 이 이후의 프랑스 정치는 그야말로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내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은 프랑스의 경제적 상황을 호전시키고 동시에 사회 재건을 시작해야 될 당위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위해, 역사의 소중한 기회를 허무하게 소모시키기에 이릅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절대로 부패할 수 없는 자', 로베스피에르를 역사 전면에 등장시키게 됩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곳을 탈출을 시도 (바렌 사건) 하다 실패하면서 그에게는 사실상 정치적인 사형 선고가 내려지게 됩니다. 이 당시 전투적 언론과 각 구의 총회는 '반역자 루이 카페'의 처형을 촉구합니다. 더욱이 11월 20일에 튈르리궁에서 왕의 비밀 금고가 발견되면서 여론은 더욱 거세집니다. 이에 왕에 관대했던 '지롱드파'는 8월 10일 사건으로 왕이 폐위당해 이미 그 죗값을 치렀다고 보고 왕의 처형을 반대했지만 끝내 이런 시도는 무산됩니다. "왕의 처형은 민중의 이름으로 결의"되었고 그의 죽음으로 앙시엥레짐과 그 지지 세력은 최종적으로 갈 곳을 잃게 됩니다. 이는 프랑스 정치에서 중요 지위를 차지하던 세력이 공중분해됨과 동시에 정국을 위기로 이끄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5장까지의 진술을 토대로 그 이전의 다른 역사가들은 쉬이 언급하지 않은 "혁명의 테러리즘 (물론 현대적인 표현이긴 하지만)"에 주목합니다. 1794년 7월 27일 그 공포의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지만 이 시기 동안 프랑스 정치에서 유혈이 낭자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코뱅과 상퀼로트의 존재는 단순히 정치적 의미를 넘어, 테러에 대한 소위 그들만의 합법적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합니다. 저자의 입을 통해, "테러는 엄청난 인적 고통을 초래했고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언급되는데요. 여기에는 단순한 정치적 수준의 오해나 아무런 죄도 없는 무고한 자들까지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의 이상이라든가 공화주의라는 숭고한 이념에 사회가 아무리 전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조적 공감대를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각자의 의견 대립이나 충돌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들 혁명파들은 이것의 해소를 위해 손쉬운 폭력과 테러를 사용함으로써 후에 보수주의자들의 우려를 갖게함과 동시에, 정치적 대결에서의 잔혹한 범죄 행위를 스스로 용인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실상 로베스피에르의 그 유명한 '혁명적 처형'은 1789년 이후의 혁명 동인이 사실상 몰락하게 된 상징적 사건이 됩니다. 1799년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의 군사적 재능 뿐만 아니라 혁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프랑스는 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됩니다. 물론 무능한 총재 정부는 차치하더라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정치 세력이나 권력은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육군의 강성함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의 군사적 확장까지 조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외부에서의 요인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그럼에도 프랑스가 유럽의 열강과의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유럽 전체를 자유의 깃발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육군 프랑스의 깃발로 점령했고, 더 나아가 나폴레옹 자신이 '제위'에 올라, 혁명을 과거로 돌린 점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결국에는 이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나폴레옹 3세까지 이 나폴레옹 일가가 미친 영향력이 지금까지 프랑스의 공화주의에 일정 부분, '이 세포적 계승'이 여러모로 미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인 한스-울리히 타머는 이 프랑스 대혁명이 후세에 끼친 영향을 무엇보다도 수시로 행해지는 '정치적 문화의 변화'를 들고 있는 것은 이처럼 단순한 변용이 아니라 그것이 수단 이상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일 겁니다. 이 점은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저자를 통해 파악한 놀라운 부분은 "1790년 1월에는 보르도와 아비뇽의 세파르디 유대인 (디아스포라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 프랑스 유대인은 거의 세파르디)에게 그리고 알자스의 세파르디 유대인에게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 사건"이었습니다.
부르주아 엘리트는 지주 귀족이 소유한 것과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얻고자 노력했다.
대개 계몽주의는 국민의회의 위원회나 정치 클럽에서 정치 실천을 위한 구상과 근거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비로소 열렬히 수용되었다.
오히려 금융과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앙시엥레짐이 드러낸 기능적 무능함과 개혁에 대한 무능함이 문제가 되었다.
1788년의 흉작과 1788/1789년의 혹독한 겨울은 수확량 감소로 이어졌고 농민은 시장에서 곡물을 팔거나 가축용 사료를 충분히 비축할 기회를 잃었다.
귀족 신분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0명의 귀족이 계몽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제1신분의 경우 3분의 2가 하위 성직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혁명 의회 대표들은 6월 20일 실내 테니스 코트에서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행위였다.
공황과 자발적 포기, 과장된 몸짓이 난무하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상위 두 신분의 자유주의적 대변인들은 애국적 희생과 상징적 행위로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봉건적 부과조를 폐기했다.
이는 시장 지향적 농업 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이들의 입장을 반영하며 사유재산적, 농업 자본주의적 질서의 사회적 이해관계와 구조를 명확히 드러낸다.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적 사회라는 이상은 조합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예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예고하는 또 다른 결정을 낳았다.
국민공회가 소집되고 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의 40일은 전쟁과 국내의 학살 및 잔혹 행위로 점철되었다.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혁명은 "열정과 보복 폭력"(퓌레)의 혁명, 즉 두 번째 혁명의 지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