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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언론의 자유
베터라이프  2025/11/17 03:17
  • 언론의 자유
  • 나이절 워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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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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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나이젤 워버튼은 현재 철학의 대중화에 앞서고 있는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브리스톨 대학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1989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다윈 칼리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노팅엄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잉글랜드 버킹엄셔 밀턴 케인즈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오픈 대학에서 선임 강사직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명성을 가져다 준 유명한 작업인 "철학 : 기본 (Philosophy : The Basics)"과 "철학 : 고전 (Philosophy: The Classics)"은 지금까지도 영국에서 철학 입문서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철학 전문 웹로그인 Virtual Philosopher 를 운영하고 있으며, 같은 철학자인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함께, 정기적인 인터뷰 팟캐스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ree Speech : A Very Short Introduction, First Edition"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의 요약된 주장대로 저 역시, 이 언론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 및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이 언론의 자유를 상징하는 여러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언론의 자유를 다시금 고찰하게 된 시점이 바로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가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 소설가 장정일, 연세대 국문과 김철 교수, 유시민 작가 등 국내 지식인 190여명이 박유하 교수의 형사 기소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리 고찰을 해봐도 저자인 박교수의 역사관에 쉬이 동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약간의 첨언이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조선총동부가 엄청난 통치 자료와 해당 사료 및 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소각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 행위는 문서만 없을 뿐이지 우리 민족을 수탈 했던 역사는 거의 자명한 사실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박유하 교수의 (상이한) 개인 의견이 만천하에 피력될 수 있는 자유는 무엇보다 보장되어야 하며, 설사 거기에 허위나 왜곡이 의심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법정에서 밝힐 문제가 아니라, 같은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과 지식인들과의 토론과 논쟁에서 판단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만큼 여기에 침잠해 있는 '사상의 자유'라든지 '발언의 자유'는 한낱 농담이나 소문에 지날지라도 개인의 그런 발언들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 글의 2장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절대적 무오류'에 대한 해석의 기반에서, 왜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이 비록 일치하지 않아, 그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그 자신은 무오류성을 견지한다고 비판합니다. 이는 지구상의 양대 종교라고 볼 수 있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요. 이들 모두가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가 정확히 규명되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존중하고, 그 신성을 주장하는 것도 종교의 영역으로 두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정교 분리 사회에서 이러한 종교계의 주장은 어떤 규명의 대상이 아니라, 쉽게 말해 그냥 그렇다는 식으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공감대 혹은 사회적 합의일 겁니다. 이 언급된 진술이 약간 거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종교의 자유'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는 면모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종교가 당신 자신에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당신의 신이 인정하지 않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의미"라고 볼 수 있겠죠. 뿐만 아니라 저자인 워버턴은 앞서 언급한 존 스튜어트 밀의 다소 이상향적인 진술에서, "(단순한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대토론의 장에서 의견 대립이 있는 자들이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그것의 진위 여부는 물론, 진리까지 규명한다는 밀의 이상"은 지금의 시대에서 아무리 허황된 논법이라 하더라도 그 맥락은 충분히 공감이 될 만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 언론의 자유가 상대방의 입을 막게 하지 않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여겨졌습니다.

언론의 자유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지금도 서유럽에서 끊임없이 논쟁되고 있는 '홀로코스트 논쟁'입니다. 독일의 네오 나치나 영국과 프랑스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이미 한참이나 규명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터무니 없는 거짓 내지는 날조라고 보는 경우가 근래 들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홀로코스트를 날조라고 보는 자들의 문제를 그냥 '지능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영국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웃지 못할 희극이 발생되기도 했습니다. 영국 작가인 데이비드 어빙이 미국의 사학자 데버라 립스탯을 중대 명예 훼손으로 고발한 사건은 바로 이 홀로코스트 날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사건은 2016년 믹 잭슨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이 고소 사건은 어빙이 최종적으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 밝혀졌고, 그에 따라 학계나 방송에서도 거의 매장된 단계로 귀결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 문제와 관련된 첨예한 대립 사항을 과연 법정에 세워도 될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그렇거니와, 저자는 "만일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침묵시킨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한 이해도 갈구도 없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어빙과 같은 사람은 법적인 처벌이 아니라 논쟁으로 낱낱이 논박 당해야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터넷 미디어와 가짜 뉴스의 범람으로 이러한 왜곡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인데요. 이런 자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 국가와 사회를 구렁텅이로 이끌 수 있다는 우려는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벼룩을 잡으려고 초가 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지만, 우리와 같은 모든 시민들이 결코 철인이 될 수 없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는 2장 후반부에서, "노 플랫폼' 논증과 언론의 자유를 구분하고, 앞선 홀로코스트가 거짓이고 이것이 음모라고 믿는 자들에게 어떤 연단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과 이들의 발언을 보장하는 등의 입을 막지 않는 자유인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매번 완벽한 정치적 변별력과 정신적 구분을 갖지 못하고 소위 시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의견 피력이라는 명목으로 진실로 규명되지 않는 의견을 말할 자유는 분명히 보장 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기화로 상대방과 다른 종교, 다른 인종에 대한 아주 무분별한 혐오와 증오를 조장하는 발언은, 언론의 자유와는 다른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반 1장에서, 저에게는 약간 어정쩡한 논의로 '방만한 자유가 아닌 어떠한 선에 이 제한을 그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견제 역시도 사회적인 통념에서 보장 받아야만 하는 정당성이 요구됩니다. 일전에 네이딘 스트로슨은 네오 나치나 극우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이들의 입을 막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조롱하고 피식거리며, 저들을 웃음거리고 만드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저자 역시도 이와 비슷하게 '대항 발언'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몹시 불쾌하고 짜증나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언론 자유도 보장해야만 한다"는 3장의 서두나, 존 스튜어트 밀을 통해, "아주 조장된 폭력의 선동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언급 역시,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의 발언 보장, 그리고 나의 반론을 이어, 이 언론의 자유가 어떤 위법 사태나 오도된 권력에 의해 침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귀에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 것"보다 중요하고 엄중한 가치라고 우리는 이렇게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논증된 내용들이 4장에서, "자유와 평등은 늘 함께 달성할 수는 없다"는 점과 앞선 대립들은 발언의 자유를 언급할 때, 숱하게 머리를 스치는 내용들로, 어떤 메시지에 불쾌감이나, 역겨움, 노여움, 폭력성, 모멸감을 느끼게 될 때, 여기에는 유익과 균형이 고도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항 발언이나 그런 상대방의 발언을 조소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역량을 만든다거나, 한나 아렌트의 분석대로 양심이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굴복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우리는 저들이 양심도 없는 자들이라는 모욕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광범위한 초고속 인터넷 시대를 맞이한 요즘에서 저런 수많은 발언들이 소위 자정 작용을 통해 걸러질 수 있을지가 앞으로 몇 세대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급한 요청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 시대의 이런 획기적인 '통신 방식'의 발전은 수많은 화자들의 의견 개진을 '관리한다'는 말보다 우선 '자정 작용'이 무엇보다 적용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다른 의견'으로 개명된 문제의 발언들이 (인종이나 종교, 성차별과 관련된) 혹여 지독한 혐오에 근거한 폭력으로 촉발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임은 분명한데요. 현재의 기득권 정치 무대가 이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극우 정치와의 연계를 통해서 저들이 뭔가 실익을 얻을 만한 것은 전무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작금의 독일 정치가 제2의 아돌프 히틀러는 안된다는 경각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적 토대와 언론의 자유를 아주 마음껏 이용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 세력과 배타적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아주 실효적인 제어가 필요한 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맥락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분문 40페이지, 172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즉 언론의 자유는 듣기 싫은 말을 들을 때조차 열렬히 옹호할 가치가 있다. 내 발언뿐 아니라 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발언을 보호하는 것도 언론자유의 책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구체적 사례를 이해하려면 해당 표현이 언제, 누구에게, 무슨 의도로, 적어도 예측 가능한 어떤 효과를 노리고 행해졌는지 파악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픽션 작가와 논픽션 작가 모두에게 특히 중요한데 사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그들 활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부가 때로는 언론의 자유보다 국가의 기밀을 더 중시한다는 사실이 이 민주주의 정부가 종국에는 전체주의 체제로 변질되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의 화급한 언론 자유의 쟁점 하나는, 종교인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표현을 제재하라는 요구에 민주주의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침묵시킨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한 이해도, 갈구도 없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노 플랫폼‘ 논증은 관용적인 사람만이 관용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달리 말해 타인의 발언을 제한하는 사람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줄 필요가 없다는 견해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앞서 보았듯 존 스튜어트 밀은 폭력 선동이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한 적절한 간섭 시점임을 분명히 했다.
당신이 언론의 자유에 진심인지 아닌지는, 당신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몹시 불쾌한 예술도 당신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보면 안다.
민주국가가 언론의 자유로부터 얻는 유익은 대중이 아주 다양한 발언자와 의견을 접할 수 있다는 데서 일정 부분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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