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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 출구 없는 사회
  • 다니엘 코엔
  • 13,500원 (10%750)
  • 2019-03-04
  • : 183
다니엘 코엔은 1953년 6월, 튀니지의 튀니스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약사인 어머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 중남부의 오트루아르 주의 생디디에앙벨레에서 기초 교육을 수료한 후, 1973년에 프랑스에 소재한 그랑 제꼴 가운데 가장 명문이라고 볼 수 있는 노르말 쉬페리외에 입학합니다. 이후 1976년에 수학 전공으로 학위를 수여 받고, 3년 뒤인 1979년에는 경제학으로 프랑스 국립 박사 학위 (DND)를 취득합니다. 또한 그는 1986년에도 파리-낭테르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동시에 1981년부터 1982년,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의 방문 교수로도 재직했습니다. 그는 앞선 교수 이력 이외에도,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총리와 함께 경제 분석 위원회 (CAE)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국가 부채 전문가로서 라자드 은행의 고문으로 그리스 총리와 에콰도르 대통령에게 국가 부채 협상에 대한 조언으로 유명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아 올랑드의 지지자로서, 프랑스 내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사회적 족적을 남긴 코엔은 2023년 7월, 혈액 질환으로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e monde est clos et le désir infini"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일독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에서 다니엘 코엔이 수차례 인용되었기에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논저 가운데, '악의 번영'은 꽤 많은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는데요. 이번에 소개할 이 글은 인류와 함께 시작된 생산과 그 수단의 증대 그리고 그로 인한 비약적 인구 증가를 바탕으로 한 경제사의 개요로, 경제학이 익숙치 않은 독자들이 보기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비교적 수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코엔은 자신의 논증을 위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시기 별로 요약하고 있고, 더욱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로베르 카스텔과 같은 많은 학자들의 글을 직접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광범위한 경제사나 혹은 사회사를 축약한 내용으로만 보기에는 어폐가 있기도 한데요. 단지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주제로 경제적 사회발전사에 국한되지 않고, 계몽주의가 어떻게 경제적 인간에 기여했는지를 논하면서, 인간이 이룩한 생산의 발전과 사회적 부의 증대의 과정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상세히 고찰해 보는 것이 주된 출판 의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합리성의 체계적 경쟁으로 말미암아, 저자인 코엔의 분석대로 서양과 동양의 격차는 소위 칭기즈 칸의 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여기서 그는 이 '유목민 제국'의 이상하리 만큼 비정상적인 영토적 야욕과 서쪽으로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중국의 경제를 초토화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유목민의 약탈 경제에 그동안 중국 왕조가 구축해 왔던 농경 경제를 비롯, 사회적 경제가 가히 뿌리 뽑혔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더욱이 유럽의 경제 변혁을 이끌어 낸 주요 사건들 가운데, 14세기의 흑사병은 당시 봉건제도에 기반한 유럽의 사회 경제를 대혼란에 빠뜨렸다고 진단하는데요. 일종의 흑사병이 유럽의 임금 노동 체계를 아예 재설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급격한 노동 인구의 감소는 그런 여파를 초래할 수 있겠죠. 즉, "흑사병의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임금 인상을 촉발했고 평균 임금은 평소 수준에 비해 두 배로 뛰어올랐다"고 그는 뒤이어 서술합니다. 또한 저자는 이렇게 수세기에 걸쳐, 인간의 노동 가치라는 소위 임금 상승이 영국의 산업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논의를 확장하여,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대부분 당시의 산업 혁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 혁명'으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그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 발전에 이바지했던 분명한 기여와 이러한 체계적 시스템이 기존의 변화된 신념과 함께, 전세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급격한 인구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도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토머스 멜서스의 기존 연구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한때 주목을 받은 이유일 텐데요. 그렇게 알려진 인식은 뒤이어 등장하는 '서구 유럽의 급부상'과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의 논증은 꽤나 정교해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전통적 자본이 관여하게 되는 막대한 생산물의 증대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기계와 그것이 성공적으로 조합된 산업 혁명의 폭발적 확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노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흔히 '러다이트 운동'이 영국에서 발생한 극명한 사회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기술 발전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러다이트를 끝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정적인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는 말이죠. 이는 한참 후에 등장하는 포드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노동이 사회적 협상과 기업의 권력 경쟁을 통해, 그 사회적 의의가 점차 축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저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명의 과실과 삶의 조건이 비약적 개선되었던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이에도 인간의 원초적 노동력에 대한 하향적 재평가로 수정될 수밖에 없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차츰 산업 전반에 도입되었던 '기계'들의 존재로 말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이행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파고였고, 이 지점에서 저자인 코엔은 직접 인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뉴딜 시대의 극적인 사회적 타협을 제외한다면 전통적인 노동 자체는 과하게 말해서, 종속적 지위로 격하당했다고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코엔은 자신의 이 글에서 꽤 신중하면서도 특별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데요. 과거 프로테스탄트 혁명을 거치면서, 전유럽 사회는 기존의 종교가 분리되는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계몽주의가 세속화와 함께, 세계는 그 전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 본격적인 '진보'의 조건에 대한 사실상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확장된 논증에서 인류가 종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계몽주의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소위 생산 수단의 발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진보'에 대한 감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종교 혁명이 거의 노예 상태에 다름 없었던, 인간에게 종교의 억압을 걷어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막스 베버가 인식한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뒤이어 나오는 "계몽주의는 전반적으로 물질적 진보 개념을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코엔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경제적) 합리성과 계몽주의와의 상관 관계를 논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인식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분석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코엔은 후에 등장하는 걸물인, 애덤 스미스가 이 '진보'의 개념을 정신적 의미로 받아들일 생각을 못했다는 평가에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애덤 스미스는 일의 전문화가 노동자들의 도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해, 이들을 향한 도덕 교육이 사회적으로 지원되어야 한다고 여겼는데요. 이처럼 스미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작은 면에서조차 상반된 인식이 존재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굳이 '도덕 감정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미스에게는 노동이 인간을 예속하게 만드는 여느 '진보'에 대한 도덕적 쇠퇴를 우려했던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코엔은 일종의 동어 반복일수도 있겠지만 후기 자본주의가 구축한 약육강식, 승자독식과 같은 불평등적인 분배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에 놓인 중산층이 과연 '민주주의 이상'에 있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표합니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이후, 녹록하지 않은 사회 환경에 따라, 점차 중산층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들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온전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여겨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핵심 사항으로 발전된 후기 자본주의 이후의 모습이, 시장에서 소비를 해나가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식비, 주거비, 의복비, 교통비"가 소비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에 시민이자 소비자인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는데요. 이에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를 인용한, 코엔은 "초고소득을 올리는 소수의 인원이 빈민층의 소비재를 무료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식으로 만사가 진행된다"는 문장으로 '시장의 구매'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은, 실질적 소비에 대한 허황된 전망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는데요. 이처럼 소비에 대한 진정한 차별, 시장에서의 그런 소비들이 단순히 판매를 넘어,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일자리 창출로 매번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일종의 진실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허망한 구호에 익숙한 현대 사회와 그 양태에 대해, 저자는 르네 지라르를 인용하며, 소위 이중 구속 double blind 을 바탕으로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벌이는 모순된 명령 체계로, 우울하게도 이런 측면의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인간의 욕망과 자아 실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힙니다. 아버지나 아들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일방적 상황을 자초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결코 앞선 양자를 만족 시킬 수 없는 현실을 콕집어 냉소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진술이 오늘날 사회적 인정을 바라는 개인들의 욕구, 그리고 그것이 기반이 된 정체성 실현에 속지 않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를 달리 언급해본다면, "서구 사회를 가로지르는 정치적, 도덕적 위기는 성장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사실에 많은 빚을 지고 있거니와, 시장이 기반이 된 자본주의의 명백한 한계, 이를테면 돈과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코엔은 덴마크 모델을 일종의 검토할 만한 대안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바로 덴마크에 거울처럼 프랑스를 비춰, 자신의 조국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해 보고 있습니다. 과거 프랑스는 유구한 역사에서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국가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마치 "보수주의자들이 경제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어 좌파에 대항했던 것"처럼, 프랑스 역시 거듭된 세계화의 주축 국가로 나아갔다고 증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프랑스인들이 남들과 비견했을 때, 스스로 평등하기를 원하지만, 다른 이기적인 측면에서 남들과 진정 평등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역설 자체는 세계화 시대의 개인주의적 욕망과 이기심의 추구가 그리는 세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 후반부에서 프랑스의 퇴직연금제도의 불확실성과 빈민층을 게토화시키는 일련의 사회화 과정, 그리고 '족내혼'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비슷한 계급 간의 동질혼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후기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분리'를 타파하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프랑스의 과제는 서구 선진 국가들의 거의 동일한 (어두운) 유산으로 시민 사회가 계층과 계급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더욱 고착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파급은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몇 세대에 걸쳐, 그저 자본주의의 당면한 모순만으로는 국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파국'은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정치 또한 한 묶음으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선 '게토화'와 철저히 분리된 계급 간의 영역 고착은 바로 음울한 전망을 대변하는 소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래할 진정한 정치의 위기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예측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최종적으로 코엔이 후반부에 논증하는 소위 '과제들'은 분명 중대한 의미 내지는 의미심장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지속적인 고성장을 기대하지 않는 자기암시 요법보다는, 장기간의 성장 변화를 예측하는 일은 단 10년의 단위로도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경제의 파란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자 행동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우리 모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과거 68혁명의 여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향수는 흡사 진보적 프랑스 지식인들의 전형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바타유가 그동안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변화에 떠밀려온 인류는 이런 유의 노력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변화의 실질적 의미를 언제나 나중에야 깨닫곤 했다.
18세기 말에 멜서스는 인류 역사를 ‘식량이 풍부할 때 인간은 그 수를 불린다‘는 극도로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요약했다.
수치심의 지배를 받는 사회는 타인의 시선이 가하는 외부적 압력에 속박되기 마련이다.
금리 또한 추락하고, 득을 보는 것은 금융 혹은 부동산 자산뿐이다. 따라서 임금 디플레이션이 자산 가치 상승을 야기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변천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사회의 주요 조직 원칙으로서 주술 혹은 신앙이 이성에 자리를 내주는 ‘세계의 탈마법화‘에 해당된다.
두 번째 근대성, 탈물질주의적인 근대성을 향한 희망은 더더욱 혹독한 현실에 격파당할 처지에 있었으며, 과거 모욕당했던 산업사회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더는 과거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 계획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처럼 스스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순전히 인간만의 능력, 그리고 세상을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루소는 ‘개선 가능성‘이라고 일컬었다.
경영자와 피고용자 간의 이익 담합을 일체 막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거버넌스를 제정했다. 경영자를 임금노동자에서 제외한 뒤 그의 보수를 기업의 주식 성과에 연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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