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 J, 드닌은 1964년 7월 21일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카운티에 있는 윈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코네티컷 주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드닌 가(家) 역시, 아일랜드에서 도래했습니다. 아일랜드 인들 특유의 가톨릭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난 드닌은 1986년, 뉴저지 주의 공립 연구 대학인 럿거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 다시 모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시카고 대학의 '존 U, 네프 사회 사상 위원회'에서 대략 1년 동안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터 대통령이 임명한 미국 정보국 정보국 (USIA) 국장인 조셉 더피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특별 고문으로도 일하는데요. 2년 뒤인 1997년부터 2005년까지 프리스턴 대학에서 조교수로 강의했고, 2005년에는 조지타운 대학의 정교수에 합류하여 2012년까지, 차코풀로스-코우날라키스 정부학 부교수를 역임합니다. 또한 같은 대학의 정부학과에 소속된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에 관한 토크빌 포럼'의 창립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노트르담 대학 교수진에 합류했고, 2018년에는 대학측으로부터 그는 정교수로 채용되기에 이릅니다. 드닌은 포괄적으로 민주주의, 자유주의, 여러 고전 및 현대 정치 사상, 그리고 미국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정치적 지향으로 미국 내에서 저명한 보수주의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는 5권의 논저를 집필했고, 3권의 주요 공동 저자이며, 등재된 수많은 학술 논문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여름 독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이 책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는 2018년에 미국 내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요. 2019년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 보수주의 대회 (National Conservatism Conference)에서 그는 주요 연사로 나서, 국가적 보수주의를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그에 반하여 미국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주요 목표이자 성취였다는 주제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드닌은 2020년에도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두 차례나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Liberalism Failed"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이듬해인 2019년에 번역이 되었고, 지금 서평을 쓰는 판본은 2025년 6월에 새롭게 나온 2판인자 개정판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 처음 번역된 판본을 통해, 서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당시 부족한 이해와 그에 따른 낯 부끄러운 내용으로 말미암아, 이번에 다시 개정판을 잡게 되었습니다. 앞서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의 이력을 짧게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보수적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인물입니다. 이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 종래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혼용 되어 쓰이고 있고, 일반 미국 시민들이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그의 이 논저 자체는 꽤나 논쟁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몇 마디 말로 이 책을 쉬이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저자가 바라 본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자유주의가 그 유구한 전통의 옆 길로 벗어난지 오래되었으며, 수많은 미국의 (정치학자들을 비롯) 사회학자들이 자유주의의 목표에 헌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유주의가 초래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밝히는 부분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목이기도 했던, "자유 의지가 배제된 인간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가 던지는 질문은, 마치 그동안 자유주의가 걸어온 노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미국은 지난 1776년,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기치로 건국해, 마치 구시대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선망하는 국가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과 권력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들'이라는 기치로 새롭게 목도한 '자유주의 국가'의 탄생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국가적 체제 하에 자유주의가 증명한 부분은, "실정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사회 계약의 의미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3장에서 상세히 논증되겠지만, 이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구축했던 것은 '법을 통한 자유'였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혹자들에 의해 존 스튜어트 밀이 마치 보수주의자의 기원으로 오역되기도 하지만 그가 원했던 자유와 그것이 보장된 사회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공동체와 관련된 부분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단순한 상업 발전과 그로 인한 부의 증대가 시민의 자유에 이바지하게 되는 점을 중심으로 두고,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하는 규약들을 밀은 논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사회적 통제가 필요했다고 이해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미리, "공화주의적 자유"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타인들의 자유를 좀 더 인식하는 자유"와 혹은 "타인의 자유는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한 협력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공동체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 논증에서 알렉시스 토크빌이 과거 타운에서 보았던 미국인들의 공동체적 가치와 그런 협력에 대해 다소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이 자유주의가 초래한 병폐의 기본적 사항은 무엇보다 이런 '가치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특별한 개인주의의 강조, 그리고 이기심과 내재되어 있는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정치 질서가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권력에 제약받지 않는 개인주의적 토대는 어느 정도 중요한 얼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심이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대목 역시, 쉽게 긍정할 만한 부분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저자가 2장에서 확인하고 있듯, "보수주의자들이 그 목표를 국가가 비교적 적게 개입하는 가운데 시장의 힘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시장보다 더 공정하게 이익을 분배하고 자원을 지원할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표면적인 대립에 있습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양자의 힘의 차이는 기울어졌다고 봐야 할 텐데요. 비록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그저 단 한 차례만 등장하지만 이 신자유주의가 오로지 "제약받지 않는 시장 자유'와 반대로 '정치적이면서 가치 지향적인 대다수 시민의 자유'에 대해서는 사실상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어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국 정치적 우위를 선점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이행에 자유주의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굳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애초부터 한 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언급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이행과 그 기조 위에 올라탔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는 아주 특별하게 '변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세계 대공황 그 이전과 혼란이 사그라드는 이후, 미국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거나 그에 비견되는 성취를 얻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사용하기 위해, 자유라는 관념이 무엇보다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자의 논증 가운데 7장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두고,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변경할 뿐 아니라 유구한 정체를 사실상 정반대되는 정체로 즉 인민들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사적 개인(혹은 사사주의)으로서 물질적으로 안전한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 정체로 재구성한다는 분석"과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민주주의가 메디슨이 그 실체를 드러낸 소수의 공화주의로 덧씌워졌거나, 혹은 자유주의에 부분적으로 예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자유 진영의 모멘텀이 되었던 신자유주의 역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위해,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정치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이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즉, 이러한 자유주의 하에 몇 세기에 걸쳐, 함양되고 심지어 강조된 개인주의와 그 토대 위에 발현된 이기심, 욕망 추구, 남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감정 등은 전면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적 정체를 보이고 있는 저자 역시, 시민 사회에서 만연된 이 경제적 불평등이 어떠한 파국을 일으키게 될지 우려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핵심 목표이기도 한, "관습과 심지어 법까지 제거하여 우리들 개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믿는 관념 역시, 비틀린 시야를 많은 시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접두사가 붙은 이데올로기와 가치 지향 등이 시민들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일성을 주입하고, 그동안 자유주의적 유산이 사회와 시민들에게 끼친 병폐 및 문제점을 백안시하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판과 같이, "그저 2~3세기에 불과한 경제학이 우리 삶에 강력하게 스며들어, 우리를 주인처럼 부린다."는 서사가 마땅히 자유주의에도 해당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할 수 없는 자유주의"는 그만큼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하에, 점진적인 인문학의 쇠퇴와 비판적 시민성을 잃은 현 체제를 일찍이 샹탈 무페도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저자 역시, 5장에서 현재 미국의 교육 현실과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소위 대학 교육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저자가 언급하는 '자유학예' 자체는 학문의 틀을 옥죄지 않는 인문학적 토양과 전문 분야의 교육과 함께 더불어 상생해야만 그것이 직간접적으로 고착화된 엘리트 지배체제의 보다 큰 개선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능력 만능주의'나 '독식주의'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주의가 개인의 능력과 그에 따른 능력주의를 긍정해온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지향이 정치적 체제 이전에 주요 관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개인들을 능력의 여부에 따라 서열을 나누는 것,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계급주의를 강화시켜온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역시,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삶의 통제력을 상실한 다수의 개인들을 오로지 그들의 책임으로 치부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부조에 대한 일부 계층의 지독한 반발심과 증오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장의 '새로운 귀족정'이라는 제목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시켜온 자유주의가 어찌됐든 배타적인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긍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 하에서 사회적 상향 이동과 하향 이동이 세계화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많은 계급이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많은 시민들이 이런 세계화 상황에서 심각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일 텐데요. 더욱이 소위 지유주의적 지배 계급이 다수 시민들의 경계에서 거리를 두고 그들만의 요새를 쌓고 있으며, 힘과 부를 가진 소위 엘리트 지배 계급이 자신들은 그렇게 잔인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 체제의 불안성과 부실한 토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몹시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국가가 체제의 뒷편에 있는 하층 계급과 지원이 필요한 시민들에 대한 부조 자체를 이들 엘리트 계급들이 표면상으로는 나서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위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수의 부유층과 경제 엘리트들의 안위와 무엇보다 직결되어 있던 2008년 시장에 대한, 막대한 공적 자금 지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고 있는 점은 희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정치적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한 시점에서 이러한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우리가 자유주의와 그것이 추동한 체제에 대해, 사실상 어떠한 성찰도 없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가혹한 현실은 일정 부분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저자의 점진적 평가대로 오늘날 자유주의가 초래한 많은 병폐와 문제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성공했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는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와 그로인해 부정할 수 없는, 체제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오로지 법에만 의존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의 조언대로 도덕이 시민들의 덕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내에서 덕과 이기심의 배치는 실로 교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쪽이 기세를 잃어야만 다른 한쪽이 살아갈 수 있는 전제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도덕감정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 조차 현대에 이르러 귀결된 이런 체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아예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제학자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입니다.) 결국 저자는 7장에서 지목된, 정치에 있어 대중의 관여를 받아들이지 않는 '예속된 민주주의' 앞에서, 간접적으로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에게 있어서도 투표는 하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시민을 옹호하는 현상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사실 저 역시도 시민 정치를 긍정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존 듀이조차도 시민들이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점은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존 듀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깎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처절한 노력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자유주의 이후에 과연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이 책의 결론에서,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걸음을 옮기려면 우선 자유주의의 호소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자유주의가 대개 약속만 했던 감탄스러운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를 변론하는 이들은 "심각한 불만, 정치적 기능 장애, 경제적 불평등, 시민간 단절, 포퓰리즘적 거부 반응 등을 체제의 원인과 무관한 부수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면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마찬가지로 결론에서,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완성해갈수록, 고질적인 병폐를 감추기 위해 미봉책과 장막을 만들어내는 역량 이상으로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병폐를 유발한다"고 대미를 장식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하게 말입니다. 그동안 자유주의가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과 이론들이 결국은 과거의 공동체 관념과 덕을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 것도 사실이고, 스스로 자유주의의 대변자라고 하는 자들 마저, 오로지 장밋빛 전망만 내세우는 데 급급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도출된 역설적 이해에서, 우리의 자유주의는 어쩌면 대적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회를 '야만'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저자의 대안과 같이, 사적 목적이 더불어 공적 목적과 함께 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막대한 불평등은 어떻게 개선시킬 것이며, 낱낱이 깃들어 있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한 속성은 어떤 식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지, 이는 지배 체제(사회의 주가 되어버린)의 논리에 거듭 반하게 되는 양상이니, 어떠한 전환이 가능할지 지금으로선 의문이 들 따름입니다. 이미 저의 뇌리에 박힌 인용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시초인 하이에크가 이 자유주의 사회가 기존 질서 못지 않은 끊임없는 불평등, 어쩌면 더 심각한 불평등을 낳겠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진보를 약속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모두의 지지를 얻을 것이며, 거의 초월적인 양적 성장이 앞으로 초래될 불평등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아주 순진하게 기대했다는 부분은 기존의 자유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글 말미에 질베르 리스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저자는 글에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한계를 갖는 의제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규제 완화와 세계화,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이익에 매몰되는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지, 아니면 금권 정치에 편승한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그런 행태가 부정적인 모습의 최대치인지 아니면 더 무엇이 남아 있을지 궁금한 편인데요. 이러한 현실 모습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미력하지만 지금도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존 듀이의 익히 그 '좌절'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 보이는 '퇴화된 시민들'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시의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노엄 촘스키의 '분절된 시민들'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었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교육이나 성찰의 '퇴화'로는 설명되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러한 수많은 위협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자인 드닌 역시, '자유주의 실패' 이후,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쇠퇴 뒤에 실질적인 '과두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