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그레이엄 그린은 1904년 영국 허트퍼드셔의 버크햄스테드 기숙학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이 이곳에서 사감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섯 자녀 중 넷째로, 남동생 휴는 BBC의 사장이 되었고, 위의 형인 레이몬드는 저명한 의사이자 산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친인 찰스 헨리 그린과 모친인 메리언 레이먼드 그린은 사촌 지간으로, 그린 킹 양조장 소유주 및 은행가, 정치가를 아우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린은 캠브리지셔에 있는 삼촌 그레이엄 그린 경의 스턴 하우스에서 보내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는 독서에 대한 흥미와 본격적으로 책을 읽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1910년 부친인 찰스 그린이 버크헴스테드 기숙 학교의 교장이 되자, 그레이엄 그린 역시, 이곳의 학생으로 수학하게 되는데요. 그의 기숙 학교 생활은 최악에 가까워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의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학부생 시절 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지만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이 시기의 그린은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겪었고 대체로 혼자 지내는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잠시 저널리즘에 관심을 갖다가 1929년 첫번째 소설인 '내면의 남자 The Man Within'를 출간합니다. 이 작품이 비교적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는데요. 이후 그를 대표하는 문학적 성격인,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내면의 갈들이 상충하는 주제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그려내는 시대적 자화상, 특히 냉전과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문제"를 써 나가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작품 활동을 기반으로 그린은 1961년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 3인중 한명이었으며,1967년에도 동일한 기준에 올랐고, 1974년과 1980년에도 후보에 고려되었으나 끝내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그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20세기 가운데 주요한 소설가들 중 한 명으로 꼽혔고, 25편이 넘는 소설을 포함해, 도합 67년간의 집필은 현대 세계의 인간들이 보여온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특유의 해학과 냉소를 바탕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권력과 영광'은 1941년에 영국,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작가에게 매년 수여되는 문학상인, 호손든 상을 수상했고, 다른 작품인 '사건의 핵심'은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그리는 1968년에는 셰익스피어 상을, 1981년에는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The Quiet American"으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의 바탕이 된 본은 2004년에 출판된 제이드 스미스 판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3년 4월에 이뤄졌고, 번역은 안정효 선생이 맡았습니다.
극 중에 몇 번이나 '한국 전쟁'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 이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더 엄밀히 말하자면, 베트남 독립 전쟁의 시발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극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적 배경으로 읽혔습니다. 극의 주요 화자이자 주인공인 토머스 파울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 대한 야욕, 즉 철지난 제국주의의 허상을 부여잡은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에 파견된 종군 기자입니다. 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지난 대전에서 간신히 국체를 지킨 프랑스 공화국의 현실을 이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큰 화두였던, '사회참여적 지식인 담론'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자신의 마음 내부에는 현실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과 그리고 삶과 스스로의 모습을 무척이나 냉소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결혼의 실패'라는 문제와 그 귀책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소위 '자유 연애'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여러 사람의 입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유 연애 이면에는 도덕적 비난이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본국과는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 파견을 나온 상황에서도 그는 '후엉'이라는 미모의 베트남 여성과 동거중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던 베트남 여성들은 무엇보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는데, 그녀를 만난 초기에 파울러는 이것을 고민합니다. 과연 그녀가 원해서 자신의 곁에 있는지를 말이죠. 이 때의 베트남은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토호 군벌, 그리고 반군 등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라는 것이 거의 전무했기에, 수많은 민간인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어디에서든 보장받을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후엉과 같은 베트남 여성은 이 혼란스런 시기에 무엇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안전할 수 있는 '보장'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요. 여기에 경제적 보장이 불확실하고 또한 정치적 불안기였기에 프랑스 식민 정부와 그 군대의 존재는 베트남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주변을 맴도는 유럽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이죠.
극을 이끄는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올든 파일은 명목상 미국 영사관에서 베트남 지원과 상무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관료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정체는 CIA 요원입니다. 그는 저명한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동아시아에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갖고 있던, 극 중에서 허구적 인물인 '요크 하딩'의 추종자이기도 했는데요. 파일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프랑스의 패착이 바로 이 지역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인식하고, 이런 정치적 혼란이 결국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 시대 여타 지식인들의 공통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파일은 특유의 이상주의적이면서 사람들에 대한 사려 깊은 면모, 매사를 신중하게 말하는 언행을 보이는 등, 그레이엄 그린이 이 미국인이라는 캐릭터에 들인 노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매큐언의 '이노센트'에서 보였던 영국인 특유의 미국인들에 대한 서사는 그린의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당신들 유럽인들과 우리 미국인들은 다르다는 차별화된 인식과 자신들이 전세계를 위해 분명 일을 할 수 있다는 일련의 자신감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파일이 프랑스와 같은 구대륙 국가들이 보이는 철지난 인식과 보수주의적 관념을 비판하듯, 마찬가지로 여기에 등장하는 프랑스인들과 앞선 파울러 역시, '아메리카', '아메리칸'이라는 극명한 단어로 이들에 대한 이질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파일을 가리키는 '조용한'이라는 수식어는 이례적으로 이 작품에서 5번 이상이나 등장하는데요. 이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때론 겸허한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한발 물러선 채로 객관적인 듯 아니면 중립적인 듯 말하지만 뒤로는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식의 서사들 말입니다. 이는 "말을 잘 꾸며내는 미국인들을 쉬이 믿지 말라"는 금언이 생각날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이미 작고한 그린이 쉽게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파일이 벌이는 그 '수작'을 보자마자, '통킹만 사건'이 바로 뇌리에서 떠올랐습니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자면 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는 베트남 내부의 권력 공진을 꺼낼 필요도 없이, 그 이전 시기의 베트남은 파울러의 말마따나, "봉건시대'와 다름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돈에 따라 베티밍(혹은 베트민)과 정부군에 오가는 '테'장군의 존재나 카톨릭과 여러 종교를 뒤섞어 만든 토착 종교의 소위 교황이라는 자 역시, 정치적 술수를 부리고 심지어 사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파울러와 같은 종군 기자들은 베트남에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질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가운데서 '제3의 세력'을 만들고자 한 파일의 계획(아니면 미국의 작전)은 그저 민간인의 희생만 초래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미국이 파트너를 고르는 능력은 극히 평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고, 혼란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거의 확신하는, 이상주의자의 순진하고 나약한 '정의'는 결국 이 베트남에선 전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파일의 인물상은 작가 자신이 명백하게 의도한 인물 조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시대의 역설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낳는다는 오래된 옛 이야기들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처칠의 제2의 대영제국 건설이 사실상 루스벨트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영국은 종래의 식민지 운영이라는 모험을 하기가 더 곤란해 집니다. 프랑스 4공화국 역시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요. 곧 이어지는 수에즈 침공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그레이엄 그린은 여기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차례 등장시키며 베트남인들에게 왜 저런 구호가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바로 이어지는 서사와 프랑스 식민지 군과 베트남 반군과의 전투를 통해 여실히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그동안 미국이 이 민주주의라는 대의명제를 들어, 타국에 사실상 개입해 왔던 역사를 고려해 본다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내법 조차 어기는) 불법적 행위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명분이 없는 일인지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린이 폭로하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가까운 편견과 그것을 내면화 해 느끼는 우월감은 결국 베트남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역사, 종교, 문화를 통틀어) 전형적인 식민지주의적 폭력성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느 민족과 국가를 미개하다고 인식하는 점은 그 저변에, 이 지역 전체를 관리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그저 최선의 길이며, 이들의 삶에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는 식민지 경영의 참모습과 같은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그린은 여실히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에서 당시 베트남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저 역시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후엉과 하이 자매의 거의 매매혼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 작가 자신의 몰이해에 가까운 극단적인 서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도 민간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설명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놓인, 어쩌면 성 노리개로 불러야 될 정도로 이들이 처한 상황이 실로 녹록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북베트남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기질이 다르다는 점도 이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저는 "베트남이 무너지면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위태롭다"는 극중 서사에 얼마간 집중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냉전이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 말이죠. 아마도 그런 연유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겠지만 "중국인들이 베트남 반군을 돕고 있다"는 묘사도 그렇거니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문맥상에만 이해될 평범한 일만은 아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념적 대립 한 가운데 놓인 민족의 안위는 물론, 이들의 일상의 삶조차, 정말로 위태로운 지경에 놓일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글 말미에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데요. 극 중에서 빵 한 조각을 미처 먹지 못하고 죽은 소년의 시체를 적은 문장을 더듬어보니, 전쟁의 원인은 결국 누군가의 탐욕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그가 단골로 삼는 또 다른 주제였는데 -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하여 그가 일갈하는 확고한 관점들은 정말로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그보다 살해되기 전에 적어도 쉰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었던 그의 진짜 활동 배경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저질러 온 일들에 대하여 사실대로 자세히 알렸다가는 영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가 크게 틀어질 터이므로 공사로서는 매우 언짢아할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고, 단골 코카콜라 가게와 휴대용 의료 장비와 지나치게 큼지막한 자동차와 별로 신식이 아닌 총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 아메리카 패거리 모두에 대하여 짜증이 치밀었다.
베트남은 중세 유럽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족들의 반란이 준동하는 나라였다.
이 전쟁에서 유럽인의 얼굴이란 일종의 혜택이었으므로, 일단 유럽인이라면 적의 첩자이리라고 의심 받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 밑으로 한입 물어뜯었지만 미처 먹지 못한 빵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전쟁이 정말 싫어.‘
그러면 파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인들은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지만 아메리카는 중고품 헬리콥터조차 보내주지 않는다.‘라고 떠들어 대겠고요.
그 질문은 민주주의와 명예에 대한 개념을 영국과는 다른 시각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물려받는 미국인들의 대단히 단순한 심리 세계에나 어울리는 명제였다.
독일군 공습이 벌써 증명한 바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겁에 질린 상태로 살아갈 순 없으므로 일상적인 직장 생활과 우연한 만남과 막연한 불안감이 폭격처럼 이어지는 와중에도 누구나 개인적인 두려움을 잠깐 잊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