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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폭력의 세기
베터라이프  2025/02/11 21:22
  • 폭력의 세기
  • 한나 아렌트
  • 8,100원 (10%450)
  • 1999-11-19
  • : 1,045
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 니더작센 주의 주도인 하노버의 린덴-리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렌트는 유대인의 부모 밑에서 자라났는데, 부친은 그녀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고, 모친은 당시 열렬한 사회민주당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베를린에서 중등 교육을 수료한 후, 마르부르크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마르부르크 필립스 대학에서, 지적 및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1929년에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카를 야스퍼스 지도 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같은 해에, 그녀는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귄터 스턴과 결혼했지만,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참혹한 반유대주의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1933년, 게슈타포에 의해 잠시 투옥 되기에 이릅니다. 게슈타포의 조사 이후, 방면된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스위스 등지를 거쳐, 파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1937년에는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40년에는 귄터 스턴과 이혼 후,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하게 됩니다. 같은 해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는 외국인 신분으로 구금되었지만 탈출하여 194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녀는 1950년에 정식으로 미국 시민이 되었고, 이듬해인 1951년에 인류에게 있어 거의 기념비적인 논저는 "전체주의의 기원"이 출간됩니다. 이후 미국의 여러 대학을 다니며 학생들을 지도하다, 1975년 갑작스런 심장마비가 찾아와, 이른 나이에 그녀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처럼 그녀의 인생 전반이 파란만장한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정식 서류'가 없는 무국적자로서의 삶을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극복하며, 전체주의를 경험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학문적 책무를 다한 그녀는, 지금도 전세계 지식인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On Violence"로 지난 197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1999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아렌트의 이 책은 제가 2000년도가 되던 해에, 광화문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구입한 것인데요. 몇년 뒤에, 일독을 하고 최근에 이사를 하면서 책 박스들을 정리하다 오랜만에 발견한 것처럼, 다시 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20대 때는 책을 거의 신주단지 모시듯 읽어, 책 상태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개인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유럽에서 유대인의 삶을 무참히 파괴했던 전체주의와 이후, 냉전과 이 시기에 개발된, '대량 살상 무기'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몰락 시킬 수 있는 제2의 전쟁 위기를 몇 번이나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이는 2차 대전을 거쳐, 첨예한 냉전 시기까지 정신력이 탁월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혹은 의지가 박약한 사람에게는 아마도 하루조차 견딜 수 없는 시대였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이는 참혹한 대전에서 수없이 자행된 인종 청소와 그로 인한 인간성 파괴, 또한 부족한 식량 배급에서 겪은 극도의 빈곤 상황 등은 이 사회에서 보다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저로서는 쉽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가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이 갈망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더 나아가 강력한 권력의 존재를 갈망하는 소위 이성의 범주 안에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체제의 격변을 겪은 '살아남은 자'로서, 아마도 제일 먼저 전체주의의 폭력을 규명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러한 그녀의 '학문적 사명감'은 참혹한 분절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의무인 동시에, 그런 증언과 기록들을 몸과 기억에 새겨 넣은 소수의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인류의 성찰이 스스로 시급하다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이 논저는, 기본적으로 1968년 3월의 68 운동 혹은 다른 말로 68 혁명 당시, 유럽에서 강하게 불었던 사회 변혁에 대한 요구와 이를 뒷받침했던 진보에 대해, 학생들과 시민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런 격변의 시기를 거쳐간 사람들의 지향점 등을 살펴보고, 이들의 직접 행동으로 야기 될 수 있는 혁명의 가능성, 그리고 불거질 수 있는 다양한 폭력의 문제, 더 나아가 그런 폭력 담론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 사회 철학적인 의미로서 폭력을 연구한 파레토, 여기에 더해 조르주 소렐의 논저,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하고, 폭력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미들을 섭렵하여, 한나 아렌트 고유의 철학적 답변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론 여기의 논의되는 배경 지식들과 주장이 꽤나 독특한 측면이 있어서 기존의 생각들과는 상당히 상이한 접근법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귀스타브 르 봉과 같은 전형적인 방식의 논증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폭력의 근본적 의미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논증의 대전제로서, 이 폭력과 권력에 대한 세밀한 정치철학적 비교 분석과 손쉽게 인간을 유혹하는 폭력의 문제가 어떻게 체제와 권력을 구축시키는지에 대해서도 그녀의 고유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서서히 밝혀 나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폭력은 사람을 이용하지만 권력은 폭력과 사람 모두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만 할 것입니다.
1장의 서두에서 그녀는 "역사와 정치에 관하여 사유하는 사람은 누구든 폭력이 인간사에서 수행하는 거대한 역할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데요. 이는 전쟁이 구사하는 본질적인 측면을 포함하여, 체제 갈등과 국가간의 대립에서도 이러한 폭력이 최종적 해결책이 되어왔다고 언급됩니다. 그래서 그녀가 분석하는 역사의 역설이라는 것이, 아마도 "오히려 평화가 다른 수단을 통해 벌이는 전쟁의 연속이라는 측면"의 통찰을 담고 있는 것으르도 읽히는데요. 이는 평화시기의 전쟁 억지라는 담론과 갈등의 시기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의 실상과 그 파급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권력과 다소 혼재되어 우리의 감각을 혼란 시키는 점은 명백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아렌트는 자신이 읽어 나간, 사회 과학과 그것을 수행하는 사회학자들이 이 폭력과 권력을 명확히 구분해 내려는 노력을 하고, 이것을 단순 학문 분야의 개념적 구별이라는 전형적 패러다임에 국한되지 않는, 모두를 위한 의무를 강조합니다. 즉, 어디서든 촉발될 수 있는 대량 살상의 가능성과 이런 혼란스런 시기에서 무엇보다 후세와 다수 시민들을 위해 폭력과 권력이 철저하게 구별되어야만 하는 점은 충분히 일독 내내 이해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녀도 민주주의에서의 '법의 지배' 혹은 헌법의 통치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구별되는 '폭력을 통한 권력의 추구'는 시민의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철학의 주요 주제, 그리고 그것을 탐구하는 사유의 방식과 기본 전제들이 정치철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매우 폭넓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폭력의 개념과 권력의 이해 역시, 그 궤가 상당히 교차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반대로 아렌트의 말마따나 권력이, "부를 통해서 측정될 수 없으며, 풍부한 부가 권력을 잠식할 수도 있다"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실상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은 공화국의 권력 및 안전에 특히 해롭다"는 진술이 이러한 논증으로 이해될 수 있겠는데요. 이는 3장 후반부에서 진술되는, "완벽한 관료주의 사회"가 시민의 자유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과 맥락상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마치 많은 돈이 사회에 풀리면 그 사회가 풍족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의 삶 속의 과정을 더욱 긴밀하게 만들고, 개인의 책임을 일원화된 체계 그 범주 바깥으로 내모는 완벽한 관료주의화 역시, 결국은 부정적으로 파급된 역설로 사회와 체제에 영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렌트의 이러한 논증이 다소 과장이 섞였다고 볼 수 있지만 그녀는 이미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경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순혈 게르만주의와 그것을 강도 높은 체제로 만든 기계처럼 일원화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명령에 한결같이 복종하는 시민이라는 굴절된 정치적 관념 말입니다. 

또한, 아렌트는 충동적인 폭력의 파국을 논하는 가운데, 1장을 거쳐, 2장 까지 소위 '참여 민주주의'의 허상에 대해 분석합니다. 이는 의외의 측면에서, 진보주의 운동과 이들과 유사성을 함께하는 '혁명'에 있어, 중요한 정치적 담론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달리 말하자면 위조되어 덧칠해진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으로서의 '극좌 운동'이 오히려, 기득권 엘리트 계층이 달가워하지 않는 '참여 민주주의'를 표면적으로는 더욱 원하고 갈망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도 정치적 역설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도정에서 폭력을 통해, '참여 민주주의'를 달성하겠다는 맹목적인 이상은 이처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약간의 논외이긴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만약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이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가 아니라, 독일, 일본의 지배를 받는 인도였다면, 간디는 그날로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비폭력'의 불안한 미래는 마누엘 카스텔이 탐구했던 것처럼, 공권력과 사회 체제에 대한 '비폭력 운동'이라는 진술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한나 아렌트 식의 명백한 개념화라고 생각됩니다.

뒤이어 2장에서 아렌트는 "우리는 복종 본능, 복종하고 싶어서 어떤 강자에 의해 지배되기를 바라는 열렬한 욕망이, 적어도 인간 심리학에 있어서는 권력에의 의지만큼이나 현저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아마도 더 관련성이 많다"고 논증 가운데 이를 드러냅니다. 이미 유명한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과 방금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인간 대부분이 갖는 강한 권력에의 복종 욕망이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인간의 정치적 본성 가운데, 권력에의 의지 만큼이나 어떤 강한 권력에 복종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고 싶은 생물학적 본능과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아렌트는 현재의 사회과학이 생물학과 자연과학에 논리적 근거를 찾고 있는 행태를 비판하고 있기도 한데요. 각 학문을 넘나들고, 개념 당 다른 학문에서 그 이유의 단초를 찾는 이런 활동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한나 아렌트는 누구보다 이런 생물학적인 본능이나 자연적인 유래에서 인간 행동과 사회적 행태에 대한 유사성을 찾는 행위 자체를 본질적으로 인간을 제한하고 왜곡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보는 듯 싶었습니다. 즉, ' 인간의 권력에의 복종' 자체를 생물학적인 본성이나 본능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 인간을 왜소한 크기로 한정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거의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어쩌면 철학과 생물학,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어느 정도 그 범주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3장에서 보여지는 폭력의 본성은 부분에 따라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1960년대 이후, 미국 사회의 두드러진 흑백 갈등도 그렇거지나와 자본주의화가 거의 공장의 자동화 벨트처럼 진행된 서구 사회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분노 혹은 혐오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양자 전부 사회 통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였죠. 이에 아렌트는 자본주의에서 합리적 측면을 뛰어넘는 개인주의화가 그런 이익 추구 담론에서 주요 논점이 되고, 이러한 토대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가 사실상 '사익 추구 메커니즘'에 방해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서구 사회의 관용의 몰락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그 기형적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책에서 인용된 조르주 소렐 역시, 이 사건이 자신에게 있어서도 충격으로 남게 됩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색출하겠다는 발상과 그것에 휩쓸린 수많은 대중들, 이러한 진행이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조차 일축한 시민들의 무지는 어쩌면 아무 쓸모도 없는 이데올로기 논쟁을 격하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변화 속에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의 위상과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계층의 시선 등을 꽤나 우려섞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었는데요. 노동자 자신들이 조직을 이루어 권리를 위한 최소한의 권력 쟁취를 목표로 하는 (물론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이) 정치 행동이 왜 환영을 받지 못했는지 그녀의 이 책을 통해, 한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계층과 노동자들의 연합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폭력은 도구적일 수밖에 없고, 권력은 그 목표를 지향한다는 한나 아렌트의 단언은 이 책을 다시금 일독한 지금, 저에게는 적지 않은 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폭력에 대한 단초를아렌트는 토머스 홉스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폭력이 개인의 본성을 자극함과 동시에, 본성 자체를 매몰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엘리트 지배 계급이 왜 체제의 안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는지, 정치적 맥락 뿐만 아니라 그 '혁명의 문제'로서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보의 존재 자체는 그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고, 한나 아렌트가 살다간 그 시대의 자화상이 엄청난 대결 구도에 전사회적인 자원을 투입하게 만들었으며, 오직 균질한 사회를 위해 오도된 사상이 있었다는 것도 참으로 불행한 역사의 한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사상과 출판의 자유,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인간이 태초의 조건에서 어떻게 폭력에 손을 내미는 형상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는 몇번이나 곱씹어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시민에게 주어지는 충분한 자유가 폭력이라는 부정의 열매와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아렌트는 그렇게 인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권력에 합당한 자격이 없는 자들의 권력 추구와 그런 목적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기만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맨얼굴을 그만큼 그녀 역시도 수없이 목격했으리라 확신합니다. 결국 모든 정치사회적 수단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과 관념들, 그것이 부분적으로 구축하는 사회의 모습 전반을, 우리는 이를 양가적 측면과 불가능한 예측까지도 떠넘기지 말고 숙고해야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은 참으로 어려운 숙명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글말미에 떠올리게 됩니다. 

  





이른바 권력은 부를 통해서 측정될 수 없다는 것, 풍부한 부가 권력을 잠식할 수도 있다는 것, 많은 돈은 공화국의 권력 및 안전에 특히 해롭다는 것과 불길한 유사성을 갖는다.
정치적 암살은 대체로 우파의 특권이었고, 반면에 조직된 무장 봉기는 군대의 전문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전쟁에 빠져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이란 도재체 존재하지 않는다.
흑인 폭력은 사실상 한 세대 이전 미국에서의 노동 폭력에 비유하여 이해될 수 있다.
동서양 반란의 가장 의미있는 공통분모를 구성하는 ‘참여 민주주의‘요구는 혁명 전통의 최상의 산물에서 유래한다.
우리에게 조작에 관한, 또는 오히려, 조작의 한계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차차 나아질 것이다.
진보는, 확실히, 우리 시대의 미신 박람회에 제출된 보다 심각하고 보다 복잡한 품목이다.
사람은 자기자신과 타인을 자신의 의지의 도구로 만들 때 자신이 보다 사람답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강제력은 적법해졌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강제력이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만일 전통적인 정치 사상 대로, 자신을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정부와 전제 정치를 동일시한다면, 지배자 없는 지배가 분명히 가장 전제적인데, 왜냐하면 행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도대체 책임을 추궁당할 수 있는 위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종 본능, 복종하고 싶어서 어떤 강자에 의해 지배되기를 바라는 열렬한 욕망이, 적어도 인간 심리학에 있어서는 권력에의 의지만큼이나 현저하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아마도 더 관련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상 권력과 폭력의 가장 명백한 차별성들 중의 하나는 권력이 항상 다수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반면에,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어도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세계 질서를 전복시키고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 한다면, 블가피하게 우리 자신의 정치 제도를 먼저 전복시키고 파괴해야만 한다.
이기주의는 , ‘진정한 이해‘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해와 구별되는 세계의 이해에 양보하라고 요구받을 때, 언제나, 가까운 것은 내 셔츠지만, 더 가까운 것은 내 피부이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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