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P. 테일러는 1906년 영국, 당시 랭커셔의 일부였던 사우스포트의 버크데일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의 부모는 좌파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테일러는 양친으로부터 그런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는 어려서 퀘이커 교도였던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 문화와 기독교에 극렬하게 저항하게 되는데요. 그는 1924년에 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 옥소포드 대학의 오리엘 칼리지에 입학합니다. 1920년대에 그의 모친인 콘스탄스는 영국 코민테른의 일원이었고, 그의 삼촌 중 한 명은 영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특히 모친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으며, 자유 연애의 열렬한 옹호자였습니다. 테일러 역시도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영국 공산당의 일원이었으나, 1926년 총파업 당시 당의 비효율적인 입장으로 당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그는 공산당을 떠난 뒤, 평생 영국 노동당을 지지했고, 60여년 이상 노동당의 당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테일러는 특이하게도 1925년과 1934년에는 소련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계 제2차 대전과 첨예한 냉전을 겪은 그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19세기와 20세기의 유럽 외교를 전문으로 연구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는데요. 이 즈음에 새롭게 탄생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린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서슴없이 내비친 인물로도 유명했는데요. 1936년에 영국의 재무장과 관련해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피력했고, 1938년의 '뮌헨 협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대의 입장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평생을 사회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한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에서 오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다만, 자본주의가 전쟁과 갈등의 원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1950년에 발발된 한국 전쟁에 대해서도 영국이 이에 참전하는 것을 그는 원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평생에 걸쳐 드러낸 독일 혐오증은 유명했는데요. 1944년과 1945년에 걸쳐, 방송과 출판을 통해 보인 독일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도 꽤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Second World War : An Illustrated Histoy"로 지난 197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본으로 쓰인 판본은 1989년 출판본입니다. 이에 국내 초도 번역은 2020년 10월에 이뤄졌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8쇄본으로, 2024년 1월, 출간본입니다.
우선 저자인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유명한 글은, 최근 국내에에 개정판이 출간된,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으로, 무엇보다 이 책은 출간 당시 영국에서 극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국내 출간 시점에서도 큰 관심을 받은 논저이기도 합니다. 즉, 제가 일전에 서평을 쓴,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상당한 분량으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이 주도하는 '추축국' 진영의 외교적이고 군사적인 전쟁 원인에 대해서는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1938년 즈음부터 시작된 유럽의 외교 위기와 히틀러를 통한 독일의 정세 변화에 관해서는 앞선,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인 A.J.P. 테일러는 전쟁의 주된 요인이었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화의 원인이 베르사유 조약인가 아니면 대공황의 여파로 발생된 것이냐를 놓고, 둘 다 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미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자신의 저명한 논저를 통해, 베르사유 조약의 강압적 측면이 사실상 독일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 감정을 팽배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이 글에선 1차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알자스 로렌 지역을 독일이 상실한 것은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민족적 모욕"이 되었다고 언급됩니다. 이는 조약에 따른 후처리로 인해 동프로이센의 회항이 폴란드 영토로 가로 막힌 점도 한몫 했습니다. 일전에 벤저민 카터 헷이 인용한, 당시 독일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인 쿠르트 슈마허가 "나치의 선동은 인간 내면의 저열한 부분에 끊임없이 호소한다"는 평가는 우리가 여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치 독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히틀러가 선도한 순혈 게르만주의와 반대로 유대인을 유럽의 암세포로 적시하고 무고한 이들을 절멸시킨 소위, '파시즘의 대두'는 우리가 왜 제2차 세계대전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포드와 같은 미국의 기업인들이 소비에트 혁명으로 인해 대두하고 있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크나큰 우려와 반감을 가지고, 이것의 해결책이 히틀러의 파시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히틀러가 이 혁명이 '유대인의 음모'라고 믿었던 부분 역시,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주도권을 잡은 이후, 1938년의 서유럽의 두 강대국과 맺은 뮌헨 협정 이후, 당시 혼란한 유럽 정세속에서 뒤이어 폴란드가 혼란에 빠지자, 영국이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 대해 보장을 약속한 것은, 오히려 히틀러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는 저자의 표현에 흥미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히틀러가 1938년 9월 1일에, 휘하에 있던 독일 장성들에게 폴란드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지시가, 혹여 서유럽에 대한 '공갈협박이'었을지라도 당시 프랑스 정치권이 동맹 관계였던 폴란드의 몰락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는 것이 정설이기도 합니다. 이는 냉엄한 정치의 측면에서, 약소국의 운명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여실히 깨닫게 되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저는 일전에 다른 서평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2002년작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을 자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극 중 바르샤바에 있던 슈필만의 가족이 독일군의 폴란드 진공 즈음에, 프랑스와 영국이 폴란드를 보장할 것이라는 라디오 방송에 결국 피난을 떠나지 않고 이를 기념해, 저녁에 소소한 파티를 하는 장면이 마치 '외교의 냉엄한 역설'을 여실히 드러내는 컷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저자인 테일러 역시, 독일의 침략 야욕에 놓인 폴란드에 대해, 실효적인 보장이 전혀 없었던 '외교적 수사'에 대해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1918년의 기세등등한 전승국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헛된 평화에 대한 현실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처럼 아픈 가시처럼 박혀있는 테일러의 정치적 수사들은 이곳에서 거의 가감 없는 표현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앞서 히틀러의 야욕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이 대전을 수행한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그리고 히틀러는 이들 자신이 정치적으로 선출된 행태가 어떻든 간에, 이들 모두 엄청난 재량권과 실효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행위자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말할 것도 없고 처칠 역시도 의회의 눈치를 보기는 했으나 중요한 의사 결정은 주변의 조언들만 참조하고 자신이 직접 결정했으며, 루스벨트 역시 자신의 고립된 집무실에서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몸소 진행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스탈린의 소련은 이 대전에서 2천만 명의 희생자를 감수했는데, 이 점은 국가 지도자가 주도한 총동원령의 체제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국가 총동원령 자체는 그만큼 국력을 심대하게 소모 시키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히틀러의 그 광오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독일 병사들을 갈아 넣은,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이후, 스탈린그라드 (현 볼고그라드) 전역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인명 경시는 특히 소련군의 한 장성의 말로 대변되는데요. "지뢰를 탐지하기 위해 그저 병사들을 그 지대로 진군시키면 된다"는 언급이었습니다. 이는 그 시대의 비참한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군사 작전과 관련된 일사분란하지 않은 작전 수행과 그 과정에서 보인 장성들의 심각한 패착은 2차 대전에서도 여실히 여러 장면에서 증명되고 있었는데요. 특히, 프랑스 진공을 위해 저지대 국가로의 우회로로 진격한 아주 '비상한 사태'에서 수 틀리면 발을 빼려고 했던 영국 군과 역시나 지휘 체계가 뒤죽박죽이었던 프랑스는 치욕적인 뒹케르크에서의 탈출을 눈뜨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벨기에를 비롯한, 저지대 국가들의 안위가 전통적으로 영국의 안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우회하는 구데리안의 독일 기갑군을 제때에 격퇴하지 못한 점은 연합국에서 프랑스를 이탈시키고, 이후 전황에서 영국이 스스로 고립되는 상황을 자초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1941년 이후, 프랑스의 이탈과 더불어, 고착화된 전황을 타개하고자 영국이 주도하여, 독일내 산업 시설에 대한 폭격을 입안하고 이를 실제로 실현하지만 독일이 입은 피해는 미미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테일러는 이 '공중 폭격'이라는 아이디어가 실제로는 독일보다 영국에 더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영국인들은 이러한 폭격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결정적일 수 있다고 그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고 분석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폭격의 결과물보다, 오히려 독일의 해역을 봉쇄한 실질적 행동이 이 적대국에게 실효적이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독일의 해군 장령인 레더가 히틀러에게 보다 많은 유보트 생산을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저자는 마찬가지로 언급합니다. 이러한 효과적 해안 봉쇄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노르웨이에 대한 수복 작전이 지리멸렬하게 실패하자, 독일과 영국의 해전은 대전 내내 서로 미미한 대응만을 고수하게 되는데요. 테일러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일절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당시 영국이 굴욕적인 뒹케르크 탈출의 굴욕을 다소나마 지울 수 있는 '노르웨이 수복 작전'이 필요했지만 충분한 해군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그저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해, 스칸디나비아의 철광석이 독일의 수중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지중해 제해권과 관련한 몰타와 크레타 섬, 그리고 그리스 문제에 봉착한 영국 정부는 당시 군사적으로 준동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제어할 필요성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영향권이자 중요한 국가 이익 지점인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방비하기 위해서라도 대대적인 해군의 전력 증파가 필요했습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의도치 않은 바이기도 했던, 히틀러가 대전 중 '지중해 사태'에 대해 경시하기도 했고, 이는 어느 정도 전쟁의 작은 전환점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는 테일러의 언급대로, 히틀러는 중동의 석유 획득보다는 코카서스 지대의 원유를 노린 것으로 후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대전제 하에, 히틀러는 자신의 의도대로 소련의 서부 지대를 점령하여 빠르게 모스크바를 굴복시키고 다음 영국을 정리하기로 계획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저자인 테일러의 분석대로, 1938년 이후로 히틀러는 영국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따라서 히틀러는 참모부의 의견을 사실상 묵살하며, 3개의 대규모 기갑 집단군을 동원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대략 1세기 반 전의 나폴레옹의 전철을 고스란히 이행한 히틀러는 점차, 자신과 독일을 패망의 길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무엇보다 과신하는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다시 돌아와, 이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그리스 보존은 영국의 사활적 이익임은 물론, 아드리아해를 통한 이탈리아 군의 진출 저지도 사실상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원칙적으로는 독일과 극심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던 소련의 부담을 덜어내려는, 그동안 실패했던 제 2전선의 구축 시도임과 동시에, 후에 마이클 돕스에 의해 진술되는 바와 같이, 그리스가 서방의 영향에 있는 것이, 지중해 제해권을 가진, 영국에게는 몰타의 안위와도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당시 스탈린이 고려했는지는 다소 불확실해 보이지만, 소련의 그리스에 대한 개입 시도가 처칠에게 거부 당하고 나서, (교환의 성격은 아니겠지만) 루마니아, 헝가리, 그리고 발칸반도가 사실상 소련의 지배가 용인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언급 역시, 기존 마이클 돕스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테일러 역시, 처칠이 스탈린에게 건넨 그 '쪽지'를 통해, 진실이 교차되고 있었습니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그 주변의 북아프리카 전역 역시, 독일 기갑군의 불세출의 명장이라는 롬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리비아가 같은 추축국인 이탈리아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서쪽 인근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운명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지경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롬멜은 자신의 기갑 전력을 아끼면서, 영국의 노회한 장성들을 패퇴시킵니다. 더욱이 본국인 독일에서의 군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롬멜로서는 그가 영국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는 꽤나 귀중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건강상으로 귀국길에 오른 롬멜의 부재를 깨달은 처칠이 몽고메리에게 진군을 재촉하기도 했습니다만 여전히 영국군의 진군은 더뎠습니다. 특히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와 그해, 11월 2일 북아프리카에서 영국이 200대의 전차를 잃은 것은 치명적이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본국에서 증파되는 병력으로 인해, 그런 영국군의 실패가 다소 가려지는 측면도 있기는 했습니다. 다만, 11월 4일 이후 영국군이 종단 돌파에 성공해, 이미 빠져나간 롬멜을 뒤로하고 독일군 만명과 무능한 이탈리아 군 2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은 것은 그 와중의 전과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극심한 소모전을 초래하면서, 그럼에도 영국은 자신들의 중요한 자산인 수에즈 운하를 독일군으로부터 지켜내기에 이릅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2차 대전과 관련된, 거의 독보적인 시리즈였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배경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 즉 '오버로드 작전' 이후, 그 치열했던 프랑스 서부 해안의 전투, 그외에 다소 지지 부진하게 흘러갔던 로리랑 점령, 반대로 인정할 수 없는 소모전을 연합군에게 강요했던, 소위 아르덴 전역은 앞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주요 무대였습니다. 특히 바스토뉴에 고립된 미국 101 공수 사단이 맞이하게 될, 거의 쥐어 짠 전력의 나치 재공세에서 이들이 겨우 버텨내,1944년 12월 말, 패튼의 대규모 공세가 이어진 그 시점에서 프랑스 북부와 저지대 지역의 온전한 해방의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테일러는 연합군의 총 군령권이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 양자간의 공유된 지침이었다면 이제는 아이젠하워가 온전히 군을 통솔하게 됨으로써, 영국은 (미국의) 속국 지위로 떨어졌다는 '다른 역사의 전환점'으로 지목합니다. 이미 영국의 내수 경제와 군수품 조달이 한계에 이르렀고 이대로 가다간 전쟁이고 뭐고 간에, 영국이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아예 흔들릴 지경이기도 했는데요. 마침 이를 구원해 준 것이, 루스벨트였고 만약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이 대전의 양상과 결과는 아주 판이하게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영국과 미국이 주축이 된 서부 전선에서의 동진, 그리고 참혹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수습하고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 등을 수복하며 서진한 소련군이 베를린을 향해서 진군하게 되는데요. 몽고메리는 하루라도 빨리 베를린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지만 아이젠하워는 이를 묵살합니다. 물론 보급과 각 사단의 연계가 필요했고, 독일 내부의 진공은 때에 따라 정치적인 고려가 필요할 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전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민간인을 향한 대규모 항공 폭격, 드레스덴과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 역사의 오점으로 남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본에 대한 두 기의 원자 폭탄 투하, 그리고 1945년 8월 8일, 소련의 대일본 참전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저자인 테일러는 히틀러의 만용과 영토에 대한 야욕으로 시작된 1938년부터, 추축국들이 최대한의 성세를 자랑했던 1942년 이후, 진정한 세계 대전의 서막은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1942년 12월 이후가 연합국과 추축국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고 판단됩니다. 일본은 원할한 내수 자원과 군수 물품 생산을 위해, 지속적인 원료 공급이 가능한 동남아 지역이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대동아 공영권이 발동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에 의해 불세출의 영웅으로 취급받는 해군 장령, 야마모토가 어쩔 수 없이 진주만을 타격했지만 그곳의 막대한 유류 저장고를 없애지 않고 철수해, 진주만 공습은 일본 제국주의에게 절반의 성공으로 그치고 맙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막대한 생산력을 경시했고 그것을 통한 대전의 전개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근본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원인이 주요 패착이 되기도 했습니다. 베를린과 도쿄에서의 항복과 그로 인한 대전의 종전에 대해, 저자인 테일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2차 세계 대전은 좋은 전쟁이었다고 단언하는데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세력이 도덕적으로도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인명을 경시하고 배타적 인종주의에 매몰된 망령된 제국주의 세력을 세계 지도에서 제거한 것이 그는 옳은 결정이었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오늘 국제 체제의 발단이 이 2차 대전이었던 것만큼, 만약 이 대전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아마도 종말을 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한반도의 운명은 더욱 알 수 없었겠죠. 여기서 좀 더 첨언하자면, 테일러는 일본의 당시 행태를 너무나 인명을 경시한 제국 정도로 스치듯 가볍게 보고 있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과거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 일본인들의 패악과 착취가 도를 넘어섰다는 분석 또한,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틀러와 히로히토, 그리고 초전에 지리멸렬한 무솔리니의 이 참혹한 대전에 대해, 명실상부한 숙고와 성찰이 없다면 지금 준동하고 있는 여러 극단주의 세력의 패악을 다시금 경험하게 될 역사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테일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을 통해, 우리의 경종을 울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