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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암스테르담
베터라이프  2025/01/30 18:54
  • 암스테르담
  • 이언 매큐언
  • 12,600원 (10%700)
  • 2023-02-28
  • : 2,305
매큐언은 1948년, 영국 햄프셔 주 올더숏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노동 계급으로 군에 입대해, 소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매큐언은 아버지의 주둔지를 따라, 영국 밖에서 생활하다, 12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는데요. 그는 서퍽의 런던 소년들을 위한 중등 문법학교인 울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게 되고, 1970년에 이스트 서식스 주 팔머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소설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6번이난 부커상 후보에 오릅니다. 1998년에 바로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2011년에는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하는 예루살렘 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에는 서식스 대학이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매큐언에게 50주년 기념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2020년에는 독일 문화원이 "독일어와 국제 문화 관계에 뛰어난 공헌을 한 비독일인에게 수여"하는, '괴테상'을 수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1917년에 영연방 왕국 훈장인 '명예 동료 훈장'과 예술과 과학에 기여한 영국의 기사 훈장인 '대영 제국 최고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msterdam"으로, 지난 1998년에 출간되었고, 다만 이번 판의 번역에 쓰인 것은 2016년의 출간본입니다. 국내 초도 번역은 1999년 7월에 있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23년 5월의 개정판 2쇄 본입니다.

이 작품은 '몰리 레인'이라는 여성의 갑작스런 장례식과 함께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됩니다. 영국 내각의 고위 관료이자, 외무부 장관인 '줄리언 가버니', 시사지인 저지의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와 영국을 넘어 유럽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심포지엄 작곡가인 '클라이브 린리', 그리고 앞선 몰리의 법적 남편이라고 볼 수 있는 조지 레인' 등 이들은 극을 진행하는 데 있어, 주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앞선 몰리라는 여성은 앞에서 열거한 인물들과 한때 연인 관계였거나 혹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이 어떠했는지는 앞선 이들의 대화나 회상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앞에서 열거된 두 사람은 명백히 아내가 있었기에 이는 달리 말하자면 외도라는 측면에서, 부도덕한 불륜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몰리는 사망 당시 46세로, 어쩌면 그녀는 당연히 건강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은 현 남편인 조지 레인에 의한 독살이나 사고사를 대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작가가 한발 물러서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몰리의 생전 마지막 상대가 외무장관 줄리언 가버니라는 점은 극에서 상당히 중요한 설정으로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일종의 인종주의자이자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로 극의 배경인 1996년 이후의 영국 사회에서 대두된 한 쪽의 정치 세력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버니는 소위 입지전적인 인물로, 아내인 로즈와 함께 가정을 일구었고 의사인 아내의 경력에도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은 외조도 드러나고 있는데요. 그가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정치 경력을 통해 내각의 장관이 된 이력은 전문직과 고위 정치인이라는 자신만의 성공한 성을 쌓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이 된 몰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심지어 극 중반에 그의 아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몰리가 가버니는 물론 아내와도 직접적인 교류를 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슈베르트를 경멸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베토벤을 향한 애정과 그런 악곡의 창작에 대한 예술을 천직으로 삼고 있던 클라이브 린리는 극 초반에는 상당히 합리적이면서 이성적으로 그려지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내면은 다소 나약하고 어느 정도 충동적인 일면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술가들에게 이런 충동적인 측면은 당연한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가 읊조리는 예술과 삶에 대한 관계와 이것들을 통한 자신의 지향, 여기에 고통스런 노력을 통해 탄생되는 작품에 대해 스스로가 갖는 자부심 등은 예술가들이 흔히 갖는 인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분주한 생활을 영위하는 와중에도 그는 오랜 친우인 버너를 향한 배려와 도의는 꽤나 놀라운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더불어 그 역시도 지난날 몰리와 뜨거운 사랑을 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연인으로서, 그녀에게 청혼을 고민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중견 시사지인 '저지'의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는 직장 내에서 쉽게 적이나 친구를 만들지 않는 그만의 처세술로 사내 요직인 국장의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친구인 클라이브에 대해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듯, 치기 어린 모습도 보이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이 두 사람의 어느 정도 불협화음이 잡히기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진정으로 우정을 나눈 사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는데요. 다만, 앞선 클라이브가 한동안 일이 없던 버넌에게 보인 우정 이상의 호의는 꽤나 특별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약간의 논외지만, 우리가 쉽게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소위 친분이나 우정관계라는 것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배려, 그리고 호의만이 있다면 그 관계는 실로 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데요. 물론 매큐언의 이 작품은 많은 상징과 사회적 관습, 통찰을 담고 있지만 무엇보다 클라이브와 버넌, 이 두 사람의 지난날 함께한 막역하고도 서로 간의 밀접한 기억들은 이런 관계의 불균형이 지속된 상황에서 서로가 순간 분을 못 참고 벌인 충동적인 행동이 극의 충격적인 마무리를 장식한 것은 어떻게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의도된 희극과 유사하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극의 주요 변곡점이었던, 버넌이 왜 줄리언 가버니를 쓰러트리려고 했는지는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런 몰리를 향한 연민과 동시에 줄리언을 향한 사적인 질투가 이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이러한 부분을 자신의 이익과 절묘하게 결부시킨 조지 레인이 그 시점을 이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의 말대로 버넌은 '치솟는 감정의 노예'가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누구보다 스스로 노력해, 치열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믿는 자부심과 국장이라는 지위에 올라서도 신중한 처세를 추구했지만, 경쟁지와 비교해서 실적이 하락하고 있는 현실과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앞선 조지 레인의 의견을 수락한 것은 그의 경력과 삶을 배경으로 했을 때는 큰 패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 조지 레인의 야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또한 신자유주의 하에 있던 소위 경쟁적 기업이라는 맥락에서, 다른 사람의 몰락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등의 합리주의로 포장된 이기주의를 이 부분에서 여실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어찌됐든 이런 서사는 개인의 추락을 떠나 상당히 비극적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매큐언은 일종의 치정극을 기반으로, 당시 영국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자본주의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의 갈등, 지금에서야 성정체성과 관련된 LBGT 문제가 전사회의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그려지는 당시 영국 사회의 성담론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념은 여전히 고심해 볼만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즉, 줄리언에 대한 버넌이 주도한 위기 혹은 그 음모가 성소수자 코스프레로 순간을 모면하긴 하지만 이것은 결국 그의 정치적 경력을 끝장나게 만드는데요. 매큐언은 이 장면을 유독 콕 집어 세르반테스 식의 우스꽝스러운 연출로 비꼬면서, 가히 한편의 코미디 극으로 만들고 있었는데요. 이는 우선적으로 우리 세태에 대한 극명한 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그런 이슈가 어떻게 한 치의 고려도 없이, 어느 정도 사회가 경직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성담론에 무조건적으로 투항하는 모습을 매큐언은 우리 사회를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 회고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읽은 매큐언의 이 작품은 제가 읽은 어떤 장편들보다 극의 짜임새와 사건의 진행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클라이브가 버넌과 다툰 뒤, 충동적으로 감행한 산행에서 맞닥뜨리게 된 그 사건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독창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클라이브가 버넌에게 본심을 드러내어, 마치 데이비드 흄이 애덤 스미스와 맺었던 우정의 한 진면목처럼 부탁하는 그 장면이, 나중에 그렇게 비극적으로 이용될 줄은 저 역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매큐언의 영리한 글쓰기의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뒤이어 조지 레인이 이 두 사람의 몰락을 지켜보며, 마치 아내의 부적절한 정부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처럼 구는 행동 역시, 냉혹한 기시감과 더불어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력해, 사회에서 한 축을 맡게 된 놀라울 만한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보다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점은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임은 아마도 누구나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사회적인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런 승리감에 부적절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아마도 개인적 나약함과는 그저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매큐언은 바로 자신의 이 작품에서 마치 커다란 복지와 사회적 지원의 수혜를 받으며 성장한 68세대가 결국 뒤이어 등장한 마거릿 대처에 적절히 대항하지 않고, 점차 기득권에 안착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도덕적 기준과 보편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저 전문직이라는 이유와 고위 직업군의 종사자라는 자격만으로 본성이 범한 과오가 면책될 수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은 복합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기까지 했는데요. 이는 1980년대의 미국 드라마가 아주 대놓고 성공한 경력을 보유한 중산층들의 외도와 불륜을 극의 소재로 삼은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대미를 포함한 후반부의 전개 과정이 단순히 남녀 간의 치정이 얽힌 복수극을 다룬 심리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인데요. 여기에 작가 본인도 후반부의 서사를 통해, 인간이 불가해한 존재라고 인정했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몰락에 이르게 하는 길은 자신에 대한 과신과 주변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는 안일함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정극이라는 허울을 쓴 이 주요 인물들의 몰락 과정에서도 여실히 자신의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냉혹한 현실과 이를 기민하게 해석할 수 있는 유럽 합리주의의 위태로운 양면적 속성은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극의 대미 즈음에 매큐언은 그 비극적 사건을 두고 "이것이 그들 운명의 희극적 성격이었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에너지, 그런 행운,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 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
그는 외국인 혐오와 과도한 형벌이라는 뻔한 노선을 앞세우며 정치판에서 이력을 다져왔다.
"옳은 지적입니다. 하지만 린리 씨. 이 세상에 오류가 없는 사법체계란 없습니다."
쉽게 기억할 수 있고, 유행을 초월하며, 저물어가는 한 세기와 그 시기의 무분별한 잔혹성을 애도하는 한편 눈부신 창조의 업적을 기리며 폐부를 찌르는 아름다운 멜로디. 먼 훗날 천 연주의 흥분이 충분히 가라앉고 불꽃놀이와 평가분석, 간추린 역사 서술과 더불어 새천년을 기리는 행사들이 끝난 후, 이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는 사라져간 세기의 엘레지로 남으리라.
유럽에서 음악은 줄곧 인간 본성이 불가해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온 인본적 전통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서른 살 때나 지금이나 몸은 결국 별 차이가 없었고,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이었다.
이름을 기억하는 버릇은 노회한 정치가의 처세술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렇다 빛을,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공공의 선이 하나되어 타오르는 불꽃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단호한 손길로 국가라는 기관에서 종양을 잘라낼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견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널리즘이란 어느 면에서 자연과학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기사는 적수인 반대의견들을 물리치고 살아남는 기사이며, 그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집니다.
그 목소리의 설득력은 그녀가 속한 계급이나 장관의 아내라는 위치보다는 전문직 종사자의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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