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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베터라이프  2025/01/15 18:55
  • 프랑스혁명
  • 윌리엄 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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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6
  • : 1,935
윌리엄 도일은 1942년 3월,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향인 요크셔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로부터 몇년 뒤인, 1964년에 옥스포드 대학에서 역사학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박사 학위 역시, 같은 대학에서 "프랑스 혁명 직전 보르도 의회 의원들과 구체제"에 관련된 논문으로 통과 되기에 이릅니다. 그의 이 박사 논문은 1975년에 "보르도 의회와 구체제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요. 특히 도일은 영국 내에서 프랑스 혁명사와 관련된 권위자로, 이외에도 앙시앵 레짐, 얀센주의, 혁명시대의 귀족정과 같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요크 대학, 노팅엄 대학, 브리스톨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또한 연구의 일환으로 옥스포드, 파리, 보르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지에서 방문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브리스톨 대학의 역사학 명예 교수이며, 동시에 영국 아카데미 회원 및 프랑스 역사 연구 협회 (SSFH)의 이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French Revolution : A Very Short Introduction, Second edition"으로 제목에 설명된 바와 같이 2판으로, 이 책의 초판은 1980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4년 12월에 이뤄졌습니다.

저에게 프랑스 혁명은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과 에드먼드 버크의 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읽은 혁명과 관련된 글은 바로 츠바이크의 책이기도 했는데요. 당시 접했던 판본은 대략 1988년쯤에 출간된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이 글의 저자인 도일은 이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보수주의'라 불릴만한 흐름이 탄생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유주의 역시, 인간 세상에 본격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혁명 이전의 다소 느슨한 동맹 관계라고 볼 수 있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후에 등장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의해 서서히 서로를 향한 전쟁에 나서게 되고, 이 혁명 전쟁에 대한 결말 또한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주도한 불안정한 '구체제의 복귀'로 사실상 마무리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이 미국의 독립과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헌법을 인류 역사에 등장 시킨 소위 마중물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친애왕 루이 15세가 사실상 암군으로서 소기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전형적인 귀족들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현체제의 모순을 넘겨 받은 루이 16세 역시,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한 왕이었습니다. 이미 시스템의 불안정성과 내부 모순을 갖고 있던 당시 프랑스 국정을 유능한 콜베르와 같은 재상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국정을 이끌지 못하고 더욱 나락으로 치달은 이 암군은 후에 등장하는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몰락과 비견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서 저자는 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2장에서 이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는데요. 대표적으로는 프랑스 왕국의 만연된 재정 불균형과 루이 16세의 재위 시기인 1778년부터 미국 독립 전쟁에 프랑스가 물심양면 지원에 나섬으로써 초래된 막대한 재정 지출도 체제의 불안정을 가속화했다고 논증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등장한 법복 귀족들인, "프랑스 전역을 아우르는 파리 고등 법원의 1250명 구성원 모두가 매관매직의 결과로 그 직위를 차지했다"는 저자의 비판적 분석은 프랑스의 정치와 사법 및 재정의 붕괴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드러내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이러한 왕국의 체제적 모순들을 직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알량한 특권 추구와 베르사유에 대해선 일절 소극적인 태도로 행동했던 점도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이에 고귀한 국왕은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가였던 자크 네케르를 '궁정의 고문'과 같은 위치로 영입하여, 오로지 왕실에 필요한 과세에만 집중했지만 이는 프랑스 정국 안정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왕정의 권위와 정치력이 함께 붕괴하여 위기로 치닫던 상황에서 우박을 몰고온 거대한 폭풍우가 프랑스 전역을 휩쓸며, 익어가던 곡식이 거의 초토화 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결과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연유로 1789년의 추수 이전 몇 달 동안은 비참한 경제적 곤경이 빈곤 계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가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그대로 실현 되었습니다. 결국 1789년 7월 14일,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은 그야말로 분노에 휩싸인 민중들의 손으로 거대한 혁명의 불길에 뒤덮이게 됩니다. 민심은 겉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정국의 극심한 악화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의 '영국식 해법'과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바로 국민의회의 기적적인 탄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루이 15세는 그동안 진행된 혁명의 업적 대부분을 비난하는 편지를 베르사유에 놓고 도주하다 동쪽 국경지역인 바렌에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결국의 이 파국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자코뱅에 의해, 왕을 단두대로 보내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극성 분자라고 볼 수 있는 상퀼로트들과 극명한 혁명의 분위기였던 그 해, 가을과 겨울 동안 지방의 특별 재판소에서 거의 1만 4000명이 사형 선고를 받아, 일부는 총살되거나 익사당했지만 대다수는 왕을 처단했던 도구인 기요틴 아래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들 상퀼로트들의 극단적인 행동과 저변의 인명 경시는 혁명을 아귀 다툼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는데요. 이런 정치적 파국에서 아주 불분명한 이유로 다수의 사람들을 소위 반혁명의 잔당으로 몰아 이들은 피의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과거 존 듀이가 프랑스 혁명에 가졌던 그 우려의 본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4장에서 저자에 의해 인용된 루소는 "인간 사회가 절망적으로 타락했고 타락시키지만 단지 전면적인 변화만이 그것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고 가르친 연유에는 어쩌면 그가 인간의 불확실성을 진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결국 이것의 당면한 여파는 당시 국민공회와 정치 권력을 향유했던 자코뱅들의 업보로 돌아오게 됩니다. "절대로 부패할 수 없는 자"였던 로베스피에르의 말로 역시, 마찬가지로 비참했던 역사의 한 장면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툴롱에서 시작된 화려한 군사 경력의 시작과 함께 나폴레옹을 통한, 프랑스의 공화주의는 혁명의 변질로 이어지게 됩니다. 군사 작전과 군 통솔에 있어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인 나폴레옹은 장 란, 조아킴 뮈라, 니콜라 다부와 같은 군 엘리트들과 함께 프랑스를 유럽의 군사 패자로 이끌게 되는데요. 실질적 공화주의의 실험대가 되었던 프랑스의 영토 확장은 아무래도 이러한 현실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던 대다수 왕정 국가들에게,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던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혁명의 수출'과 같은 과민 반응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밀라노를 비롯,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로마 교황청을 손에 넣은 뒤, 프로이센 마저 제압하여 프랑스 북부 저지대를 석권하게 됩니다. 다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의 정치적 패착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러시아 원정의 참혹한 대실패는 그의 몰락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1830년까지 정치적 혼란의 수렁으로 내몰게 됩니다. 다만 프랑스 군이 이르는 지역에 현지 귀족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공화주의 형태의 제한적인 시민 자치를 도입한 것은 실로 사회 변혁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렇지만 북 이탈리아를 비롯한 프랑스 군의 점령지를 전제 정치의 한 형태로 황제 자신의 측근들로 채운 점은 그것이 표면적이라 할 지라도, 혁명의 정신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호 모순이 체제 안에 점철되어 나타나는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군사적 비상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선 역사적 행로와 약간 구별되는 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 저자인 도일은 몇가지 예시를 5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일단 제한적이긴 하지만 전제적 민주주의를 이끈 것과 무엇보다 유럽에 자유주의 관념을 현실적으로 추동한 점을 들 수 있겠는데요. 이때 잉태된 자유주의의 본질은, "투표의 자유, 사상과 신념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자의적인 법이나 세금의 부과 혹은 구금으로부터의 자유"로 크게 대표됩니다. 물론 이 시기의 자유주의 역시, '재산의 평등'은 믿지 않았는데요. 뒤에 미국의 헌법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시기의 법의 지배란, "재산 소유자들의 절대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체제의 본질이 '대의제가 없는 체제'임을 감안해 본다면, 자유주의가 말하는 대의란 어쩌면 '특정 계층의 이익'이라는 측면과 맞물려, 체제의 안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여기에 한술 더 떠, 알렉시스 토크빌은 "프랑스 혁명을 민주주의와 평등의 출현이지만 자유의 출현은 아니다" 라고 역설적으로 논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혁명 기간의 유혈 사태와 민중들이 무분별한 폭력 행위를 지향하게 되는 사태 자체가 사실상 프랑스 정치를 혼란으로 이끌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혁명의 진보는 군주제의 붕괴로 인한, 공화주의 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남성 보통 선거를 채택하고 국민공회를 소집한 일련의 정치적 과정 등은 아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새로운 정치적 모멘텀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진정한 법의 지배에 대한 아이디어가 바로 혁명의 시기에서 점차 규명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루이 16세로 대표되는 베르사유와 귀족 정치가 상당한 사회적 모순에 놓여 있었고, 대다수 민중들의 삶을 불안정성과 경제적 빈곤으로 내몰았다는 점에서 위기 의식 조차 없는 정치에 대해선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현재까지 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후세의 해석은 세대를 거치면서 다소 수정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이 혁명이 내포한 인권과 자유주의, 그리고 법의 지배와 같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인 가치들이 무엇보다 피와 폭력으로부터 잉태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모순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혁명 이전, 1700년대에 불었던 종교 개혁과 그것으로 인한 신,구교의 갈등 그리고 그런 와중에 프랑스 가톨릭계가 이권화하여 민중의 삶과 더욱 멀어진 것은 귀족들의 착취 만큼이나 심각한 사회적 폐해로 가증되었습니다. 사실상 이 앙시앙 레짐 자체가 권력 바깥에 있는 민중의 삶을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안정적으로 향유할 수 없게 만들었고 켜켜이 쌓이는 체제의 모순들이 아주 기본적인 '인간의 삶' 자체를 앞선 측면에서 더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 점이,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루이 16세가 과거 루이 14세의 유산을 그 절대 왕정과 같은 '하나님이 인정한 국왕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을 수도 있고 궁정 정치에서 파리와 지방을 좀 더 개혁하기 위한 적절한 인사는 물론, 왕실 재정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점은, 1세기 전의 영국과는 사뭇 다른 현실적 파탄의 전제라고도 읽힙니다. 그럼에도 후에 등장한 프랑스의 제3 공화국은 물론, 전유럽의 점진적인 공화주의로의 이행은 민족주의의 확산 만큼이나, 그것의 본질적 가치와 정치적 체제의 변화를 이끌었던 세계사적 요인이었던 점은 분명합니다.   






프랑스혁명을 대하는 영어권 대부분의 태도를 위한 기본적인 골격은 혁명의 "최악의 난폭한 행동"이 나타나기 몇 년 전인 1790년에 이미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 의해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전면적인 파괴를 통해 그들이 자유라고 말한 것을 확립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기요틴에 대한 특유한 공포조차도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이나 수백만에 달하는 스탈린 공포정치의 피해자들이나 강제수용소의 조직적인 잔혹성이나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의 집단적인 위협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비하면 보잘것없어졌다.
페인은 버크가 허세를 부리며 자랑했던 영국의 헌법이 연륜이 오래된 인간 지혜의 산물이기는 커녕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사법적 위계질서의 정상에서는 13개의 고등법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최고의 상소 법원으로서 중요한 모든 왕령의 법안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인가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지역에서의 귀족들은 도로의 강제 노역은 고사하고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직접세인 타이유taille 납부하기를 계속 회피했다.
왕과 대신들은 프랑스가 국왕의 가장 탁월하고 교육받은 신민들의 효과적인 동의와 협력을 통해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더 받아들여야 했다.
왕실 회계를 검토하기 위한 상설 청문위원회를 두자는 명사회의 제안을 루이 16세가 거절한 뒤 명사회는 좌초했다.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재산가들은 봉건적 권리를 소유했든 아니든 지방이 무정부상태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경각심을 가졌다.
그것은 혁명의 패배나 존속을 국가 자체의 패배나 존속과 동일시하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1789년 이래로 달성된 그 어떤 것에 대한 비판자라도 반역자라고 낙인찍힐 가능성이 컸다.
새로운 프랑스는 공격으로부터 국토를 보호하려 하기 위해서만 싸울 뿐 왕조들 사이의 사적인 맹약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고 국민의회는 선언했던 것이다.
1815년의 반발이 거든 명백한 승리 이후 100년 이내에 국민 주권은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사실상 현대 정치의 보수주의의 우익은 혁명에 대립되는 모든 것인 만큼이나 프랑스혁명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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