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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베터라이프  2024/12/29 21:28
  • 인간의 조건
  • 지그문트 바우만.스타니스와프 오비레크
  • 15,300원 (10%850)
  • 2016-10-20
  • : 302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11월,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태어났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의 폴란드에서도 전유럽의 반유대주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바우만도 폴란드인들로부터 그가 유대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는데요. 당시 포즈난은 작은 인종의 용광로로 불릴만큼 여러 인종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는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곧 1939년이 되자,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되었을 때, 바우만의 가족은 동쪽의 소련 지역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그는 소련이 통제하는 폴란드 제1군에 입대하여 군에 복무했고, 이에 콜베르트 전투와 베를린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이미 소령 계급이었던 바우만은,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목적으로 당시 바르샤바에 있던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근하자 갑자기 불명예 전역을 당하게 됩니다. 당연히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반시오니스트였던 바우만은 자신의 부친과 다른 정치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폴란드 당국으로부터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폴란드 시민권이 제한되자,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1971년부터 영국에 거주하면서 런던 정경대(LSE)에서 공부하고, 이후 리즈 대학에서 사회학 교수로 채용됩니다. 이때부터 바우만은 특유의 비판적 사회 이론가로 근대성에 대한 집요한 고찰, 홀로코스트 문제, 포스트모던의 소비주의와 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권력화 등을 일생에 거쳐, 주요 학문 주제로 천착하게 됩니다.

스타니스와프 오비레크는 1956년생으로, 폴란드의 신학자, 역사가, 문화인류학자 및 인문학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런 경력 가운데, 이례적인 부분은 그가 지난 30여년간 예수회에 소속된 사제였다는 점입니다. 이에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폴란드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 도시인 크라쿠프의 예수회 신부단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83년까지, 이탈리아 나폴리에 소재한 교황청 신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마찬가지로 신학을 공부합니다. 오비레크는 이전부터 카톨릭 교단의 정치화와 세속 권력에 대한 문제에 일관된 비판적 인식을 보였고, 유대교와 다른 신앙을 믿는 종교인들과 심지어, 불가지론자들과도 그는 지속적인 대화에 나섰는데요. 특히 2002년과 2003년, 로마 카톨릭과 대립하는 일련의 사건 뒤에,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이후, 전임 교황을 비판한 계기로 관구장 슈토프 디렉으로부터 1년 간의 대중 매체들과의 접촉 금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는 2005년 가을에 수도회를 탈퇴하고 사제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합니다.

이렇게 바우만과 오비레크의 대담을 실고 있는 이 글은 전작인, "신과 인간에 대하여"에 이은 두번째 기획집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On The World And Ourselves"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16년 10월에 이뤄졌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일종의 서신을 통해 이뤄진 두 사람의 이 대담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폴란드 내의 종교 및 정치를 포함한 주제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요. 그런 연유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폴란드 정치 상황과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종교적 배경 등을 숙지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은 이미 웹상에, 사실에 근접한 여러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으니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는 명확히 수식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우만과 오비레크 두 사람은 명실상부한 '추방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의 역사로서, 유구한 카톨릭의 연혁들을 이해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여기 지면을 통해, 유동하는 근대의 문제점,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여러 사회적 파행들, 인간 소외,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현재 인류가 해결해야만 하는 사활적 조건들과 그 문제점들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이와 관련해, 두 사람은 "대안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으로 대처와 레이건의 소위 "대안은 없다"는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언급이며, 인간의 정신과 그것을 이루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일방적이고 단방향적인 사회적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거듭 견지하기에 이릅니다. 이미 바우만은 자신의 여러 논저들을 통해,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그 비인간적인 주장에 대해 수차례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 3장에서, 바우만은 자신은 더 이상 경제학자들과 토론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의 양심 고백처럼 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이런 배경에는 경제학에서의 경제적 논법이 사회에 어떠한 개선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현실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것이 경제학의 한계인지 아니면 그것에 준하는 무엇인지는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종교적 차원이거나 혹은 자신이 항유하는 삶의 조건에서 행복이라는 담론은 사회나 인간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종교가 인간의 삶에 끼친 영향을 논하는 과정에서, 오비레크는 행복에 대해, "진정한 행복은 장애물을 피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과 끊임없이 맞서 싸운 데서 오는 것이고, 이것이 충만된 삶의 비결"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인용의 확대된 의미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보다 우리의 행복은 자본주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왔다는 것을 먼저 인지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의 행복 뿐만 아니라 "소외된 자들, 배제된 자들, 분노한 자들"이라는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마도 충만된 삶의 현격한 조건으로도 읽힙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논의되는 오비레크의 여러 주장들은, 자신이 과거 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관해서도 그는 면밀하고 정확한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3장 후반부에서, 두 사람이 공통된 맥락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강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든지, 이런 신자유주의적 문제와 가이 스탠딩이 도출한 '프레카리아트 계층'의 출현이 드러내는 경제적 불평등의 총체적 문제에 누구보다 평생을 천착한 지그문트 바우만에 보이는 오비레크의 경의는 그가 단순한 사제가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바우만의 저명한 논저이기도 한, '부수적 피해'는 어느 헐리우드식의 액션 스릴러 영화에 등장하는 요소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액체 근대라는 바우만의 통찰이 담겨 있지만,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소위 현대적으로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 어쩔 수 없는 (정치경제적인) 소외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들이 이미 있어 왔습니다. 그런 지칭으로서 우리는 이 부수적 피해를 어쩔 수 없는 전근대 시대의 빈민 계급과 일맥상통한 의미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을 '사회적 실패자'로 규정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죠. 어떻게 보면 이 '용어'는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인 현실이라는 고도의 책임 회피와 체제의 문제인지 아니면 인간 자체의 결함인지, 지금도 가늠하기 힘든 난해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칸트로 이어지는 인간 도덕의 계보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데이비드 흄으로 대표되는 역사를 먼저 살펴봅니다. 인간 자체는 도덕적 본질의 그 무엇으로 판단했던 카를 야스퍼스의 논법에서, 이는 나치의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인 동시에, 현재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는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매끈한 답변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들의 본색을 이미 알아챈 데이비드 코츠는 어떤 느낌이었을지 이 시점에서 매우 궁금해 집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에 바우만은 1장에서, "밀턴 프리드먼은 사회의 심리학적 중심 원리가 탐욕이라고 역설했고, 아인 랜드는 제 잇속만 차리는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합리적인 이기주의'를 권유"했다는 식으로 이를 비극적으로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이런 이기심과 이기주의에 명백히 반하여 등장하는 '보편적 존엄성'과 '사회적 선의 필요성'과 같은 종래의 도덕주의적 가치들은 그야말로 현재로선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엄연히 치부되어 왔습니다. (혹은 조장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냐"와 같은 발언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도덕적 존재인지 아닌지의 논란을 떠나 기존의 종교가 그것의 대안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1장과 2장이 (폴란드 카톨릭의 현실을 포함하여) 명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과거 정교 일치의 로마 교황청의 정치적 영향력 같은 역사가 아니라, 현대에 이른 종교가 자본과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유주의 국가들의 개신교와 돈(혹은 자본주의)이 구조적으로 혹은 계층화된 시스템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현실이나, 현재 유럽의 카톨릭이 서구 자본주의를 옹호하면서 대안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종교에 대해 점차 폐쇄성을 띠고 있는 장면과 같은 우리가 직면한 실체적 문제들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본질에서 종교의 편협화와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태도 등의 양태는 1장을 거쳐, 2장에서 더욱 확대됩니다. 이에 바우만은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정부의 무능이나 나쁜 의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정치의 분리, 그리고 그로 인한 기존 정치제도의 만성적인 권력 결핍" 등에 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종교의 무능도 포함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 상태에서 나날이 등장하고 있는 극단주의적 선동 정치인의 사례는 약간의 논외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과거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에 대한 인식, 공공선에 대한 함의 또한, 이제는 교과서에서나 접할 정도로 감각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본 적이 없는' 근 백년이 넘는 시간은 파국의 전체주의를 잉태했고, 또한 1세기가 채 안되는 시점에 이르러, 현대화된 극우 파시즘을 기존의 정치 무대로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 두 명의 현인이 이끄는 대로, 종교의 총체적 부실과 더 많은 경쟁과 그에 따른 승자독식 사회를 규정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나날이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의 상황은 이런 조건들이 중첩되어, 나날이 사회적 개선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놓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3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협력의 가치에 냉소를 보내면서 세상으로부터의 격리와 자신만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태도의 전형"이라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어두운 본성의 표상 또한, 개선을 어렵게 하는 다른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거의 강고한 인식의 벽처럼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희화이긴 하지만, 은둔의 삶을 살고 있던 칸트를 흄이 강하게 일깨웠듯, 우리에게도 다시 예전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무엇보다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신의 도움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겐 무엇보다 필요한 문제일겁니다. 
토크빌의 주요한 언급처럼, 인간은 지난 역사를 쉽게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거의 명백합니다. 지난 폴란드에서의 경험으로 공산주의 역사의 본질을 깨달은 바우만이나, 과거 요한 바오로 2세를 통해, 지금까지 카톨릭이 누적해 온 문제들을 직면하게 된, 오비레크에게는 그저 축소된 개인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이들이 겪어온 지난 날의 기억은 그야말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인간은 누구에게나 성장할 기회가 몇 번이나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자신의 삶과 동시에 "이 행성과 인류의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점은 앞선 행복에 대한 문답에 대한 매개와 마찬가지로, 개인들의 문제와 그것에 작용하는 세계로서, 양자는 서로 불가분에 있다는 분석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바우만은 평생 동안 사회학자였지만 '사회학자들도 인간이므로 절망하고 한탄할 권리' 또한 갖고 있다 고백합니다. 물론 이러한 읊조림은 그가 생전에 가졌던 현실 문제에 대한 소회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따라서 바우만은 그 무엇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품위있고 존엄한 삶을 위한 기회들이 부당하게 분배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없다"는 우리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대의를 갖고 우리에게 응답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건 없다고 말입니다. 끝으로 약간의 논외지만 이 책에서는 바우만이 어린 시절 폴란드에서 몸소 겪었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혐오에 대해서도 관련한 몇 가지 일화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한나 아렌트가 왜 '어두운 시대'는 일반적이었다고 말했는지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작금의 현실에도 매우 잘 들어맞는 시민이 아닌, '인간 무리'의 습성이기도 한, "권위가 명령하고 군중이 복종하는 곳이라면 별다른 저항 없이 어디든 가는 대다수, 어떤 상황에서도 악행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소수, 기회만 있으면 피에 대한 선호를 보여주는 소수가 있다."는 우리의 다른 실체는 일견 우발적 핵전쟁의 시작이라는 인류의 공멸 가능성보다도 더 쉽게 다른 식으로 파국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숱하게 듣고 있는 "비판적 인식 또는 그런 책임감"은 이처럼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대형 사고가 한반도 남쪽에서 있었습니다. 희생당한 모든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빕니다. 부디 평안하소서.
-이 책의 한가지 아쉬운 부분은 2장에서 극단주의자들을 빗댄 '외눈박이 키클롭스 (혹은 사이클롭스)와 같이 연계되어 논증되는 '자유의 독'에 대한 장면이었습니다. 후자인 자유의 독은 뒤에서 대략 유추해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명확히 이를 적시하고 있지 않은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3장 초입에서,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표상일 뿐이다."는 주지의 문장과 함께 차근히 논증되는 내용들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표상은 관습과 계산 등에 따라 항상 바뀐다는 뒤이어 해석도 매우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작금의 문명이 과연 어떠한 본질을 갖고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개는 쉽지 않고, 자비는 원한다고 주어지지 않으며, 실수의 결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도 악의 문제를 단순히 권위와 권력에 대한 불복종의 문제, 금제와 명령에 대한 위반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의 존엄성을 부정하거나 타인이 존엄성을 획들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타인에 댛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 세계는 다양하고 불확실하고 다면적이고 애매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장애물을 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과 끊임없이 맞서 싸운 데서 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충만된 삶의 비결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 이 시대에는 지구화와 정보혁명이 야스퍼스의 시대처럼 새로운 각성, 지역적인 각성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각성의 조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은 자유의 문제로서 결코 강요될 수 없으며, 이단(즉, 믿음의 대상에 대한 대안적 해석에 의거한 저항)은 어떠한 쇠로도 부술 수 없고 어떠한 물로도 태울 수 없고 어떠한 물로도 익사시킬 수 없는 영적 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불복종을 정당화했습니다.
프레카리아트는 ‘즉자적 계급‘(누군가는 그것을 인식할 수도 있지만)에서 ‘대자적 계급‘(자신의 이익과 소명을 의식하고 하나로 결합한 정치 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극히 미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따른 것만큼 확신을 갖고 자신의 적들을 증오했으며 가차 없이 파괴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발상을 하게 된 시발점이었다는 홀로코스트 역사가들의 지적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학자인 스탠딩이 대안적 해법들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옹호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프레카리아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 지구적인 상호 의존의 시대에 타자의 이익에 대한 첵임의 짐을 벗어던지다는 것은 결국 공익에 대한 책임을 벗어던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적 세계‘에만 초점이 모아지는 현상, 요컨대 이타주의에 대한 이기주의의 우위는 오늘날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오히려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난 권력들과 해마다 만성적인 권력 결핍과 그로 인한 비효율성을 드러내고 있는 정치로 분열된 세계에서 시대착오적인 민족국가가 여전히 낡은 형태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 원인입니다.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정부의 무능이나 나쁜 의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정치의 분리, 그리고 그로 인한 기존 정치제도의 만성적인 권력 결핍입니다.
지멜은 갈등은 서로 간의 사랑을 만들어내건 증오를 만들어내건 간에 서로를 소외시키는 황무지로부터의 출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함으로써 초래된 법적 결과들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강자들에게 얼마나 유리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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