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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홉스
베터라이프  2024/12/14 18:48
  • 홉스
  • 리처드 턱
  • 12,600원 (10%420)
  • 2020-12-28
  • : 463
리차드 프랜시스 턱은 1949년생으로, 영국의 정치 이론가이자 정치 사상가입니다. 그는 유년시절, 영국 뉴캐슬 타인 지역의 오랜 사립학교인 로열 그래머 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의 지저스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턱은 케임브리지에서 역사학으로 학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73년부터 1955년까지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쳤으며, 그 후 하버드 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하여 프랑크 F. 톰슨 정부학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1994년, 영국 아카데미 펠로우로 선출됩니다. 이런 학문적 경력 이외에, 턱은 지난 브렉시트와 관련해. 자유로운 좌파 정책을 펼칠 수 있는 노동당 정부를 옹호했으며, 우익적 목표를 충족시키는 신자유주의적 구조를 강요하는 유럽연합 (EU)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Hobbes : A Very Short Introduction, First Edition"으로 지난 198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미셸 푸코를 통해, 오늘날 새롭게 재조명 되고 있는 토머스 홉스에 대한 리차드 턱 교수의 의미있는 개론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홉스는 과거 데이비드 흄에 의해 철저히 멸시되기는 했지만 근래 푸코의 혁명적 아이디어와 그 이전의 공리주의자들에게 사상적 영감을 제공한 사상가였습니다. 특히 홉스는 당시 종교라는 기득권과 새롭게 대두하고 있던 철학의 분리를 강조했고, 어떻게 보면 루소보다도 더 일찍, 소위 '자기 보전의 권리'라는 인간의 생명 유지와 삶의 보전이라는 측면의 권리를 누구보다 빨리 인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러한 인식 가운데, 커먼웰스와 주권자라는 개념은 당시 영국 휘그당의 정치인들을 비롯, 일반 귀족 계층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바가 있습니다. 다만, 리바이어던 이후, 그가 이신론에 가까운 종교적 회의론자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시 종교 보수주의적 시대에 정확히 배척을 당하면서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곤란한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저자인 리차드 턱은 이러한 홉스의 사상이 근대성과 그 실험이라는 몇 세기의 인류 지성의 개변 시기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밝히고, 또한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공리주의적 아이디어의 배경적 지식을 제공한 이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성과는 충분히 재평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여겨집니다.

홉스도 당시 여느 지식인들처럼, 인문주의자로서의 삶을 견지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현실 정치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하며, 후에 등장할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축소된 의미처럼, 그런 학문의 지향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과거 그리스 철학과 문학의 지향점과 유사한 것일 텐데요. 여기에 스스로 찾게 된 광범위한 '철학'에 대한 관심도 포함해야겠습니다. 물론 초기에 홉스는 갈릴레이를 통해, 과학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 갈릴레이가 신념으로 내비쳤던 '그 위험한 사상'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에 처벌을 받게 됨으로써, 그런 직접적인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홉스 역시, 현실 종교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이런 완고한 종교적 기득권에 대해, 후고 그로티우스가 누구 못지 않은 영향을 홉스에게 끼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홉스가 강고한 칼뱅주의자들에게 뜨악한 감정을 가졌던 것은 이를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홉스는 17세기의 종교가 유럽에 수많은 내전을 일으킨 당사자로 인지하고 이들 대부분이 명백한 '광신도 집단'이라고 인식합니다. 또한, 턱 교수의 입을 빌어, "홉스가 의무보다는 권리와 자유"에 관심이 더 컸다는 분명한 증언은 그가 영국의 유력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역설적으로 당시 통치 시스템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그다지 충족되지 못했던 현실의 한계에서 인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문주의자들은 역시나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약간의 논외지만, 이 글의 후반부 논증을 거쳐, 홉스가 가졌던 이신론과 시민종교에 대한 관념들이 후에 등장할 계몽주의 사고를 미리 예견했던 것이라고 보는 저자의 분석은 저의 시선을 끌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홉스가 불편하게 여겼던, 당시 칼뱅주의자들은 그로티우스를 추방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근대 회의론과 후기 회의주의 철학에 위협으로 여겼던 것도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자들이었는데요. 강경한 그로티우스와 타협하지 않는 칼뱅주의자들이 만난 역사적 사례는 홉스에게도 잠시 크롬웰 시기의 평안함을 제외한다면 이후, 스스로 고유의 사고를 위해서는 그다지 녹록치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귀족과 연계되어 삶을 이어가는 소위 명사라는 입장에서 홉스의 이신론과 도덕적 상대주의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요. 이미 그로티우스는 종교가 강력한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홉스 역시, 매번 그런 내면의 양심을 숨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로티우스는 노골적으로 "국민국가는 다른 국가를 도울 하등의 의무가 없으며, 단지 서로를 해치지 않을 의만을 지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턱의 분석대로, 이런 그로티우스가 홉스에게 남긴 것이 적지 않았는데, 특히, 초기 자연권에 대한 아이디어이기도 했던 그의 생각은, "모든 권리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대명제였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비자유주의적인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그의 생각이 리바이어던을 관통하는, 홉스의 "자기 보존의 권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자기 보존의 권리는 후에 장 자크 루소가 고안해 낸 생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읽히게 됩니다. 다만, 홉스도 존 로크의 작업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고, 후세의 루소가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따라서 시민과 주권에 대한 일반 의지를 고안했던 점은 어떻게 보면 이 시기, 홉스의 작업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디. 

이처럼 홉스의 유년 시절에 유행했던 몽테뉴와 같은 특별한 인문주의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었는데요. 인간들의 신념과 관습의 다양성을 알리긴 했지만, 이것의 공통된 도덕적 분모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 인문주의자들이 세상에 대해 자포자기 하게 된 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위험천만하고 서로가 경쟁하는 이념들 사이에서 인간들 대부분이 자신의 안전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인문주의가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 보존의 욕구는 그 자체로 도덕적 원리라는 일종의 '자연권'이라는 개념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 위해 법을 연구하고 고안한 그로티우스는 물론이거니와, 홉스도 그러한 동질의 생각을 갖게 된 것인데요. 이는 여실히 그의 논저, '리바이어던'에 투영되기도 합니다. 생명과 자기 보존을 위해, 자연 상태에서의 불확실성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 설사 대안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이 자연 상태를 중인들에게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 홉스는 어느 정도 사명감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에 홉스는 그의 저서, '법의 기초'에서, "모든 인간은 자연권으로 인해 자기가 처한 위험에 대한 수단의 필요성과 그 위험의 크기를 스스로 판단한다"고 명백한 주장을 펼칩니다. 이러한 연계는 '시민론'과 '리바이어던'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홉스 정치 이론에서 특색이 있는 것의 거의 모든 부분이 이 단순한 명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저자인 턱은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홉스의 특별한 관점은, "외부세계에 대한 명백하고 객관적인 진실은 없으며, 모든 인간은 무엇이 자신에게 위험한지에 대해 서로 다른 판단을 하리라는 틀링없는 사실이 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서사는 꽤나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평가에 근거하여 행동할 것"이라는 마찬가지의 현실론적인 분석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연 상태로 내몰린 인간'이라는 철학적 서사와 그런 배경을 통한, 현실의 재해석,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이 자기 보전의 권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는 당시 이단아였던 홉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홉스를 짜깁기 했던 소위 대전에 관여한 카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로 대변되는 극단적 전체주의에 있어, 마찬가지로 큰 영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로티우스와 존 셀든을 통해 점층된 사유로 강화한 홉스는 이후, 겸허하면서 중립적인 주권자라는 개념을 (새롭게) 잉태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후에 공리주의자들에게 시민들의 의지를 공리주의적 규범에 굴복시킬 수 있는 전능하고 중립적인 주권자가 필요하다는 이들의 감각으로 이어지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된, 저자의 분석대로, "홉스를 흠모한 공리주의자들은 사회적 목표를 보장하는 국가의 권리에 대한 그의 설명을 빌려 오면서도 그러한 사회적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설명을 끼워 넣었다"고 해석합니다. 결국 토머스 홉스는 이들 공리주의자들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될 사상의 본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홉스를 근대성과 근대주의의 기반을 제공한 인물로도 읽히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의 유명한 논저, '리바이어던'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공부하는 것의 폐단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차 있는 점과 홉스는 이러한 공부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는 의견을 저자는 덧붙입니다.

당시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코먼웰스의 자유로 인해서 그들 스스로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홉스는 이 점을 거부합니다. 또한, 홉스는 이 코먼웰스의 명백한 자유와 이것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주권자의 존재에서, 백성들이 이 주권자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은 권리로서가 아니라 주권자에게 부여된 도덕적 의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백성들의 전방위적인 권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주권자, 양자 간의 도덕적 토대의 이해관계로 읽히기도 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주권자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들의 권리가 협소하다는 사실 자체는 단순한 논리 관계가 아니라, 그것이 기반한 맥락이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권위와 전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비자유적 주권자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무조건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본다면, 홉스가 분석한 주권자의 존재 자체는 비정치적인 의미인 동시에, 어떻게 보면 정치 초월적인 의미로도 읽힙니다. 그런 측면에서 홉스가 종교가 더 이상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란 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끝으로, 저의 이 책과 관련된 서평은 꽤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글 말미에 적어두고자 합니다. 홉스의 핵심 사상을 담은 '법의 기초'와 '리바이어던'을 읽지 못한 관계로, 저는 그저 리차드 턱 교수의 해석에 홉스를 이해하는 데,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 글이 충분한 반면교사가 되었고, 우리에게 법은 강제를 띠게 되지만, 무엇보다 세인 모두에게 도덕적인 측면의 본보기 내지는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소위 이상적인 법철학에 근거한 여러 아이디어들에 대해 고심해 보게 됩니다. 더군다나 앞선 자연 상태에 대한 논법이 홉스와 루소가 서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나, 칸트로 이어지는 철학의 재정립의 시기 이후, 우리가 인식하는 홉스와 그의 리바이어던이 후세에 얼마나 협소한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명철하게 쓰여진 유명한 논저 역시, 후세에 이르러 오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근대 정치의 현실은 조작, 기만, 협박이었으며, 이것을 포착한 고전 작가는 키케로가 아니라 타키투스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우리 내면의 정신적인 삶과 우리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에 대해서도 틀림없이 설득력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비록 데카르트가 윤릭학과 정치학을 자신의 새로운 철학적 기초 위에 두려고 했다고 다소 모호하게 포명하긴 했지만, 그는 눈에 띄게 성공하지 못했고 정치에 관해 좀처럼 쓰지 않았던 주요 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따라서 정부에 의해서 주장되는 권리와 의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자연 상태에서의 권리와 의무로부터 비롯되거나 이와 양립 가능해야만 했다.
"리바이어던"에 담기 내용을 알게 되자 홉스의 오랜 왕당파 친구들은 그와 더이상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고 홉스를 ‘무신론자‘,‘이단자‘,‘반역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홉스는 1666년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투옥되거나 추방될 무서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었다.
언어는 실재와의 관계가 난해하고 논쟁적인 단순한 형식 체계이지만, 추론에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다.
이들 인문주의자가 결국 믿게 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위험천만한 세상, 그것도 경쟁하는 이념들로 인해 두 배로 위험해진 세상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안전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홉스의 우선적인 과제는 상대주의가 옳다는 점과 이것을 자신의 과학철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에 대해서 주권자가 가지고 있거나, 우리를 위해서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수단이 무엇인지 고려할 권리이다.
예컨대 일반적인 경제적 번영은 사회적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를 번영시키는 것은 그 무엇이든 홉스의 이론 안에서 정당한 듯 보인다.
시민과 주권자 모두의 주된 책무는 그들 자신과 동료 시민들의 물리적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비록 교조주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국가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필요 외에는 어떤 종류의 교의도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기독교가 정치적 관점에서 특별히 만족스러운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고대의 종교와 같은 것들이 훨씬 더 좋을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이전 세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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