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수전 니먼은 미국의 도덕 철학자, 문화 평론가, 수필가 및 대중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식인입니다. 그녀는 고교 시절, 학교를 중퇴하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는데요.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존 롤스와 스탠리 카벨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그녀는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조교수와 준교수를 역임하고,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철학 준교수를 맡기도 했습니다. 특히 니먼은 록펠러 재단의 연구 펠로우, 미국 학술 학회 협의회 (ACLS)의 수석 펠로우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외 그녀의 학문적 연구 방향은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20세기 후반까지의 철학사 전반을 살펴보고, 이 시기의 라이프니치, 칸트,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 프로이트, 카뮈, 레비나스, 한나 아렌트 등의 사상과 연구를 깊이 천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니먼은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적 명확성이라는 보다 높은 철학적 과제와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탐구를 통해, 인간과 정치,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효용있는 철학'의 방향을 여전히 모색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Left is Not Woke"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번역은 홍기빈 선생이 맡았습니다.
니먼의 이 책은 그녀 스스로가 뒷부분에서 2022년 4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있었던 애쉬비/태너 강좌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 글에서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출간한 논저들 대부분이 '진보주의와 그에 따른 철학의 현실적 문제'가 주요 탐구 주제였습니다. 또한, 이 글 역시,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논저라 여겨지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워크(Woke)는 단편적으로는 깨어있는 자, 혹은 스스로 깨어있는 정치 의식을 기반으로, 남들과 다른 정치적 선명성을 가진 사람의 정치 등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만, 보다 정확한 의미는 오늘날 정체성 정치 운동 내지는 그것을 지지하는 견고한 도덕적 지지행태를 뜻합니다. 즉, 니먼은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결코 진보주의 운동, 좌파와는 다르다"는 이른바 그 한계를 제목에서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특히, 오늘날 정체성 정치 운동 전반이 우리 시대의 오랜 기초가 된 계몽주의와 결별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비판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자인 니먼은 계몽주의에 기반한 보편주의가 결여된 '정체성 정치'는 그야말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요 논점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인 좌파에게 있어서 '보편주의'는 자신들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원리였습니다. 그리고 정치학에서 로버트 달이 스스로 다원주의를 강조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이런 보편주의가 그것의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보편성 및 보편주의가 결여된 좌파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고, 또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부분이 좌파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해석이기도 한데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로, 소위 그간 '좌파의 몰락'이라는 현상을 폭로했던 샹탈 무페의 언급이나,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로 인한, 탈이데올로기, 탈인식론의 입장에서 인간을 체제를 유지시키는 경제적 지위로 해석하는 이런 '새로운 시대'는 진보주의와 좌파를 자의반 타의반 무능력한 무리로 몰아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분석에서 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이 글 5장에서, "자기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라는 아주 직접적인 문구로 시대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이 자기이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보수주의를 결부시켜 생각해 본다면, 정체성 정치와 외형상 아주 확연하게 대립하는 보수 정치에 대한 양자간의 걸개를 대략 짐작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극단적인 측면에서 이타주의를 개인의 이익으로만 치부하는 교묘한 비도덕적 작업과 사회를 이익이라는 수단으로만 해석하는 부류들이 적지 않다는 현실, 그리고 더 나아가 노골적인 탈계몽주의적 관점, 그에 따른 탈정치의 일면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다시금 고민해보게 됩니다.
저자인 니먼은 2장에서, 현재 범람하고 있는 부족주의와 관련해,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각국의 시장과 경제적 이익 등을 여기에 연결시켜, 소위 세계를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방시켜 나갔지만 그저 노골적인 경제적 이익화를 제외한다면 그것의 개방성은 대체로 제한된 의미로 국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개방의 시대에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인종주의'라는 존재는 이렇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니먼은 우리의 역사가 진보되어 왔고, 특히 미국 사회에서 흑백 분리와 같은 과거 지독한 인종 분리 정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미국 정치가 인종적으로 흑인인 대통령을 백악관의 주인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과 완전히 왜곡된 반대편에 있는 인물인 도널드 트럼프를 정치에 등장시킨 것은 외형상 과거의 인종주의를 불식시킨 그런 현상의 반발력이 일으킨 현상이라고 봐야 할까요. 이에 니먼은 진보는 무조건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맥락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었지만 이런 단순한 맥락의 서사는 저로서는 쉽게 납득이 되질 않았습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 특히 대학 전반은 저자의 말마따나, 노골적인 "계몽주의 때리기"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18세기 이후의 계몽주의적 역사가 인간의 권리, 사회적 진보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는 점을 당연히 니먼 만큼이나 동의하고 있는데요. 일전에 다른 독서 모임에서 토론에 참여한 이들이 "계몽"에 대해 매우 반감을 갖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저로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악의 본성'과 다른 영장류에 비해 두드러지는 폭력성과 그것을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제어하고자 노력했던 계몽주의의 노력을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지만 상대적으로 저자는 다른 인용들을 통해, 인간이 그 정도의 폭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철학에 기반한 도덕적 본질의 존재로 규정한 이면에는 계몽주의, 즉 보편주의의 오래된 역사가 기반해 있기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인간의 존재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칸트와 같이, 이성이 기반이 된 도덕적 통제를 강조한 계몽주의자들이 있어 왔기에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규정하게 되지 않았나 고민해 보게 됩니다. 과거 야만의 시대를 거쳐, 이 계몽주의 운동이 인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된 점이 우리가 체험했던 진보의 원동력이 되었던 증거입니다.
우리는 흔히 워크 컬쳐를 일종의 진보주의 운동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인종주의와 관련된, 정체성 정치는 꽤나 단호한 사회 운동으로 보통 여겨지는데요. 물론 일전에 로빈 디앤젤로가 비판적으로 언급했듯, 아직도 미국의 많은 백인들은 작금의 인종주의가 별반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회의 주류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라고 볼 수 있는 인종인 백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미흡하고 미진한가를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한데요. 니먼이 인용한 프란츠 파농의 사례를 다시금 살펴봐도, 인종주의는 인간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동시에 개인의 인격적 개성도 무시하는 심각한 문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워크 운동 자체가 소위 평범한 보수주의부터 극단주의 세력에 이르기까지, 이런 흐름이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은, '사상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그 경직성이 이들에게 부정의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들 극단주의 세력들은 워크 woke 가 초래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한'이 인간의 영혼을 침식시킨다는 말로 강조하니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카를 슈미트 식의 정치적인 자유와 신자유주의 사이에 한가지를 택해야만 한다면 참으로 심각한 딜레마를 초래하게 될 겁니다. 니먼은 마크 릴라보다도 더 카를 슈미트, 혹은 그가 남긴 지적 유산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슈미트는 정치를내편과 적이라는 '피아 식별'로 규정하고 이후의 정치의 건전성을 왜곡하는 줄도 모르고 후세의 지식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추앙을 받은 인물입니다. 이미 니먼도 언급하고 있지만 슈미트는 단 한번도 나치에 부역한 일을 진심으로 반성한 바가 없는 인물입니다. 물론 제 잘낫다고 과거를 성찰하지 않은 한 인물 때문에 정치가 변곡점에 휩싸였다고 싸잡하 치부할 순 없지만 세계 여러 곳에서 보이는 정치적 결단주의의 행태는 그가 어느 정도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카를 슈미트에게 매료되었다는 그녀의 평가는 이 시점에서 복잡한 감상을 들게 만듭니다. 이는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인정했던 부분이기도 한데요. 사회 내부에서 어떤 선택의 여지가 제한받게 될 때, 이 극단의 지점에서 그런 원인을 해석할 수 있는 수단을 찾게 되는 것은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이성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습성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카를 슈미트를 호의의 시선으로 본 연유에도 기존의 보편의 논리와 그것의 궤가 상당히 달라, 이처럼 그간 정치철학에서의 '슈미트 대두'는 그저 신기한 현상으로만 볼 수 없는 특이한 광경이기도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카를 슈미트는 진보 뿐만 아니라 평범한 우리에게도 특유의 사고로 흡사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인 니먼의 분석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 진보주의 혹은 진보주의자는 바로 좌파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좌파는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일련의 자세를 견지하는 정치라고 이 글에서도 드러나고 있는데요. 단순히 사회의 문제만을 나열하는 워크와는 사뭇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해묵은 논쟁들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는 정치적 변절자들도 많은 것도 분명 사실이지만, 워크가 사회적 진보에 이르는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말마따나 워크와 좌파는 분명 확연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좌파는 이라크 전쟁과 같은 부도덕한 전쟁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들며 비판했고, 더 나아가 이를 폭로했던 것이, 이들이 보이는 '도덕적 명징성'의 한 발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독한 편집증적인 태도로 문제를 파고들어, 일부의 이익으로 삼는 그런 행태를 비판해 마지 않는 점은 과거 좌파의 선명성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정한 좌파는 이제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퍙가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하는데요. 즉, "좌파에 입장에 선다는 것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자신과 남들의 삶을 현실에서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지한다는 것을 말한다"는 4장의 논증은 이처럼 분명한 차별점으로 읽힙니다.
끝으로, 니먼은 시장의 자유가 국가의 기초가 되었던 시기를 거쳐, 푸코의 설명대로 이런 신자유주의가 세련된 인식으로 여겨지는 세계의 진면목을 우리는 매일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 정치의 붕괴는 지속되었고 마가렛 대처 식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하는 몇 십년의 시기 동안, 아주 노골적인 정치적 파시즘이 정치 분열을 자양분 삼아, 미국에서 새롭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일 텐데요. 그가 등장할 즈음에 바로 앞선 정체성 정치가 도덕 본질의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고 낯색 하나 바꾸지 않은 노골적인 거짓말이 정치의 주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다음 4년의 트럼프 임기는 분명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적지 않은 위기가 될 것임은 단편적인 추측이 아니라, 직면한 파시즘적 정치로 인해 그 심각성이 대두될 가능성이 몇해에 걸쳐, 농후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진보주의 정치 그리고 좌파의 몰락은 많은 사회가 계몽주의적 보편성에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설사 한줌도 안되는 좌파의 몰락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허위와 거짓 뉴스, 노골적인 거짓의 언사, 인종차별 등 과거 위선적인 조지 W. 부시의 시대조차도 감히 꺼낼 수 없었던 일들이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남을 포용하고 인정하는 것보다 증오하고 백안시 하는 것이 일상사인 인간의 본성에 빗대어 봤을 때, 이는 전자보다 손쉬운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주의는 바로 사람들의 이러한 본성을 더욱 부추겨, 정치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갑니다. 이제 우리 정치와 더불어 세계 정치의 파국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를 무엇보다 고민해 봐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글 말미에 이르러 니먼은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시하는 일종의 '인민전선 popular front'의 아이디어는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는 좌파의 연대, 진보주의의 탁월한 연합이 시민의 연대로 이어져, 도널드 트럼프와 극단주의자들의 발호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밝히는 것인데요. 그만큼 시민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기가 다가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작금의 우리 정치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의 정부 4년 내내 흑인이나 라틴계에 대한 인종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받은 표가 오히려 2016년 선거 당시보다 늘어났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슈미트와 하이데거를 감싸는 이들은, 반유대주의가 나치즘의 본질적 요소였다는 요즘 통용되는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워크 운동 덕분에 우리는 백인이라는 것이 여러 정체성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것, 즉 중립과 규범 사이의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케냐의 몸바사에서 태어나느냐, 미국의 맨해튼에서 태어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달라지고 수명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릴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또한 계몽주의가 내세우는 보편주의라는 것이 점점 비백인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유럽의 특정 이익을 은폐하고 있다는 오늘날의 주장과 위험할 정도로 가깝다.
그러나 2020년 BLM 운동이 이렇듯 보편주의적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 우파는 재빠르게 이를 정체성 정치의 한 사례로 몰아가버렸다.
하지만 유대인은 피해자이며 독일은 가해자라는 관계가 독일의 자기 이미지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 바람에, 독일인은 유대인을 희생자 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인종주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인간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과 동시에 개인의 인격적 개성도 부인하는 것이므로, 인종주의 시스템을 해체할 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은 파농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21세기 초입이라는 시점에서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말들이 실로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남용되고 오용되는 바람에 아예 진실성 자체를 의심받게 되었다.
극심한 검열과 문맹이 만연했던 시대, 누구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사회를 폭파시킬 만큼 위험한 것이었으며, 교회 당국은 막강한 권력을 동원하여 이를 힘으로 억눌렀다.
자신이 자유주의 왼쪽에 있다고 여기는 독자들이 슈미트에게 끌리는 유일한 이유는, 자유주의의 실패와 위선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권‘이라는 개념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 개념이 무엇이건 간에 벌거숭이로 날뛰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권력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리를 내세우고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동할 때도 많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인종주의가 끈질기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창피한 일이며, 반세기 전의 민권 운동을 목도했던 이들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