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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洞好世, 얕은 책수레
  • 당신이 모르는 자유주의
  • 디드러 낸슨 매클로스키.아트 카든
  • 19,800원 (10%1,100)
  • 2024-09-20
  • : 495
디드러 낸슨 매클로스키는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입니다. 원래 그의 본명은 '도널드 낸슨 매클로스키'이지만, 1995년에 미국 학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습니다. 따라서 미국 미시간 주의 앤 아버에서 태어난 매클로스키는 1964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70년에는 알렉산더 게르셴크론 교수의 지도 하에,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영국 철강 산업에 대한 그녀의 박사 학위 논문은 1973년 데이비드 A. 웰스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1968년에 그녀는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과 조교수가 되었고, 1973년에 준교수가 되었습니다. 1980년이 되자 시카고 대학에서 동료 교수들이 그녀를 정교수가 되는데 반대할까봐 걱정한 그녀는 시카고 대학을 떠나 아이오와 대학으로 옮겨 그곳에서, 199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일리노이 대학 (UIC)에서 경제학사와 영어 및 커뮤니케이션 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근인 2023년부터는 워싱턴 DC에 소재한 케이토 연구소에서 특훈 교수로 재직중이며, 이사야 벌린 재단의 수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의 연구 활동 중, 총 25권의 연구서를 출간했고 언론에도 수많은 기사를 그녀 이름으로 송고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2006년, 2010년, 2016년에 각각 발표한 부르주아 시대 3부작 시리즈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아트 카든이 풀어 쓴 것으로 원제, "Leave Me Alone And I'll Make You Rich : How the Bourgeois Deal Enriched the World"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이 논저는 매클로스키의 부르주아 3부작을 카든이 풀어 쓴 소위 평역집이라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이 책의 제목에도 드러나듯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맥락은 전통적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 및 그에 따른 복귀, 그리고 현시점에서 산적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인, 소위 '부르주아 딜 Bourgeois Deal'을 기저에 깔고 이를 통해, 전반적인 논증을 확장해 나갑니다. 이 부르주아 딜은 밑바탕에 깔린 윤리 의식과 공공선을 위한 몇몇 적절한 법규 및 효과적인 사회 안전망을 제외하여, 정부의 여타 간섭을 거부하고 부르주아 계층을 포함한 동료 시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라는 함의를 포함하고 있는데요. 부르주아 딜의 기본적인 의미 자체는 도시에 사는 사업 친화적인 중산층 계급이 주도하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룰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여기 매클로스키와 카든, 두 사람이 명백하게 주장하는 바는 모두에게 자유를 보장하되, "그중 빈곤층과 장애인층에게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도움을 주면 누구든지 물질적, 정신적 번영을 이어갈 수 있다"고 첨언하는데요. 이는 첨예한 신자유주의적 논리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듯 여겨지지만 전체적인 논증은 아무래도 일관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의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필자들이(매클로스키와 카든의 공통된 의견이므로) 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이끌어 온 사회경제적 발전만을 우리 인식상의 궤도에 다시 올리려고 하는 나머지 현재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선 거의 일언반구 응답이 없는 부분인데요. 물론 이들이 명백한 신자유주의자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글 중간에 아인 랜드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뜨악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클로스키와 카든이 옹호하는 자유주의란, 자유지상주의의 순화된 버전이 아닐까 지금까지도 고민중입니다. 뒤에 기존의 자유 지상주의가 우익의 자유주의로 변질되었다는 언급을 추론해 본다면 더욱 그런 의심이 드는데요. 더불어, 글의 2부 17장인 제국주의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이들은 영국이 끝내는 자유주의를 채택했기에 인도에 가했던 제국주의적 침탈이 당시 영국 경제는 물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명료화하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미국의 산업을 증진했던 노예들의 착취 혹은 노예 산업 자체에 대해서도 좌파 역사학자들이 이를 과장하고 있다는 식으로 단언하기에 이르는데요. 물론 이들도 분명 학자로서 이런 비윤리적인 역사적 행위 자체를 긍정하거나 부분적으로 용인했다가는 다수로부터 매도를 당할 수 있기에 이것의 후과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노예제는 굳이 역사적, 경제적으로 남긴 오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악해이었다"는 문장을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노예제 존치라는 갈등 때문에 남과 북으로 갈려, 연방이 절단이 날 상황이었음에도 단순히 노예제로 인한 번영이라는 헛소문과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어떤 연계성에도 전자가 미치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이 학자들의 노력은 한편으론 충분히 헛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토머스 멜서스가 살았던 시대의 인구 문제와 더불어 이들 빈곤층의 존재는 허버트 스펜서조차도 고민을 할 정도로 쉽지 않았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빈곤층의 배제와 격리라는 요상한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이겠죠. 물론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기존의 소수 권력을 위한 체제를 사실상 파훼시킨 자유주의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이 자유주의를 통한 번영 자체를 어느 범위에서 어느 수준까지 확장시켜 역사적 인식론으로 재탄생시킬 권리는 학자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겠죠. 만약 필자들이 자유주의의 명확한 신봉자라면 무슨 좌파의 음모나 좌파의 신경쇠약으로 치부하는 일종의 비관론을 기본적인 사상의 자유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더욱이 애덤 스미스가 우려했던 바대로 사회경제적 체제에 있어 노동자들의 살길을 막는 일종의 권력 문제는 특히 자유주의자들이 더욱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일 겁니다. 물론 이들은 조지프 슘페터를 인용하면서 자본가들의 덕과 이를 통한 자본주의의 이행이 지난 세기에 비해 현격한 소득 향상을 불러 일으켰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빈곤의 늪에서 벗어났다 거의 환호하기까지 합니다.

'더 나은 사회 개선'이라는 화두를 이 필자들도 여러 지면에 걸쳐 할애하고 있습니다만 앞서 이들이 정부의 개입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선언을 언급하면서 과연 시장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공동선의 보장이라는 해피 엔딩이 아니라,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정실 자본주의적 측면의 여러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지상 복음으로 치부되는 신자유주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진정한 자유주의는 이것을 누리는 자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도덕적 고결성과 견고한 윤리성이 먼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가 시민들이 삶을 찬미하고 그들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죠. 이사야 벌린 식의 자유 지상주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주의와는 다른 매개임을 인지한다면 더욱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가 되어야 한다는 지지 파파차리시의 의견을 매클로스키와 카든 역시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클로스키의 제한적인 의견이 담긴 이 책은 자유주의와 초기 자본주의적 역사를 함께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대규모 생산과 이를 통한 효율적인 판매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나서, 우리의 삶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러한 진보가 더 나은 삶을 위한 어떤 공동선으로서 이행된 것이 아니라, 자본의 더 많은 축적 가운데, 그 기법의 완성이 사회적인 영향을 얼마간 끼친 것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고도화된 금융 기법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이것의 폭발적 이행은 시스템 자체에서 더욱 불평들을 견인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는 결코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들이 논증 내내 비판하고 있는 좌파의 무능에 대해서는 저 역시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세계의 좌파들이 거의 종교적 교조와도 다름없이 쓸모없는 부류가 되었기에 오늘날 산적한 문제에 있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참, 글 말미에 이 논저의 또 다른 한계점을 적시하고 싶은데요. 아마도 매클로스키는 다음의 심각한 문제가 미중 갈등 이런 국제적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극단주의적 포퓰리즘의 대두를 제일 악으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도 익히 동의하는 부분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이것에 대한 논리 전개와 후속 설명이 매우 미흡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좌파들의 무분별한 반대보다는 정치 무대에서 어떻게 극단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허하되, 그중 빈곤층과 장애인층에게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도움을 주면 누구든지 물질적, 정신적 번영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앞서 설명했지만 마지막으로 되풀이하건대 이 자유주의는 미국에서 한 세기 동안 통용된 정의(즉 정부의 강압에 복종하겠다는 광범위하고 자발적인 협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 같은 부유한 국가는 비숙련 노동, 중독, 양육 실패, 차별, 또는 단순히 지독한 불운 같은 문제가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5~14세의 어린이 중 28%가 풀타임으로 노동했다.
시장 거래의 도입이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아니라는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동유럽과 쿠바. 그리고 최근의 베네수엘라 출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낙원인 자국에서 탈출해 텍사스 파리든 프랑스 파리든 도시로 나가 일용직 노동자로 자진해서 착취당할 기회를 노리고 줄을 서 있는 형편이다.
이제 남아공, 브라질, 아이티, 방글라데시와 같은 중하위권 소득 국가들도 이미 놀라운 평균 실질 소득 수준에 먼저 도달한 수많은 부국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예측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류의 번영을 진정으로 위협하는 것은 독재주의와 이에 딸려 오는 끔찍한 빈곤, 즉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자유주의 이전의 제로섬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다.
1950년대 ‘자유 지상주의‘라는 단어가 (당시의) 우익 자유주의로 의미가 변한 이후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이른바 불가침 원칙에 가까운 게념이다.
현대의 사회 개선을 가능케 한 시계태엽은 자유인의 평등주의와 자유주의라는 탁월한 사상으로 꽃피는 개인들의 아이디어에 비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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