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인간을 구체적인 존재, 물리적 세계의 일부, 생각과 욕망, 계획과 감정, 그리고 꿈으로 직조되어 있는 존재, 창조하고 해석하는 존재로 본다. 2026년에 나온 그의 최신작인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는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이 책은 출간 2년 전에 진행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의 특별 강연을 주요 소스로 해서 만든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양자 현상 및 양자 물리학을 주요하게 다룬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 현상의 발견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놀라운 혁신이다. 실험실에서 관찰된 다양한 현상이 물질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양자 물리학은 아주 작은 영역부터 거대한 영역까지 세상의 사실들을 놀라울 만큼 효과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양자 물리학은 오랫동안 세상이 다른 모든 것과 독립적으로 항상 고유한 속성을 지닌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우리의 세계관 전체를 지탱해온 유서 깊은 사고의 틀을 버리도록 요구한다. 양자 물리학의 세 가지 특징은 기이한 맥락성, 확률성,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불연속성)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수들은 특정한 값(양자화된 값)만 취할 수 있고 다른 값은 취할 수 없다. 입자성이란 우리가 어떤 시스템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유한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개념이다.(70 페이지) 확률성은 어떤 시스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가 최대치에 도달해도 그에 관해 새로운 유용한 정보를 항상 더 얻을 수 있음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확신을 의심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과학의 핵심 메시지다. 과학 문제의 어려움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것보다 당연해 보였던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은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틀렸음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저자는 현실 그 자체, 궁극적 존재론, 최선의 체계, 진리 같은 말들을 세계에 관한 확실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일이 별로 흥미롭지 않다고 말하며 이러한 말들은 심리적, 문화적 고뇌의 투영 즉 과도하게 발달한 뇌를 가진 포유류인 우리 인간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추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필요한 것은 확률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입자성과 확률성, 이 두 가지 원리는 맥락성과 함께 양자 물리학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강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현실의 양자적 구조에는 모든 것을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고정된 기준점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지식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이와 똑같은 구조를 지닌다. 저자는 형이상학이든 인식론이든 근본 물리학이든 자신이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토대를 세우는 것보다 현재 우리의 지식 수준을 고려해 세상에 관해 사고하는데 가장 적합한 개념적 틀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관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어떤 관점 안에 있다. 관점들은 서로 소통한다. 일단 우리는 관점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지식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담고 있다. 현실은 관점들의 반영이며 우리의 지식은 그 일부다.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실,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현실은 바로 이 경이로운 거울 놀이 같은 관점들의 상호 반사(反射)다. 세상은 사건과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로 이 변화가 세상의 존재 방식이다. 사건은 시간 속에서 특정한 위치를 가지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 과정을 시간이라는 순서로 배열해 조직한다. 계절의 변화, 낮과 밤의 교대, 시계의 뚝딱거림, 생각의 연속 등을 우리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부른다. 시간의 흐름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저자는 가장 흔한 오류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포착하는 단 하나의 실체, 단 하나의 구조, 단 하나의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 공통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고도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서로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두 친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 경과된 시간을 다르게 느낀다. 시간의 흐름은 전 우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시간은 장소 또는 궤적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공통된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국소적 개념이다. ‘지금, 여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 없이 지금이라는 단독의 단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멀리 떨어진 별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멀리 떨어진 별에는 우리가 망원경으로 관측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사건들, 누군가가 망원경으로 지금 우리를 관측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건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아닌 중간 시간대가 존재하며 별이 멀어질수록 그 시간대는 더욱 길어진다.
우리들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확장된 현재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과거와 미래에 일어난 사건의 총체로 그들을 현재의 순간과 구분해 생각한다면 현대 물리학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주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에 의하면 시간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우리의 생각이 흐르는 것도 사건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양자 중첩이란 사물 자체가 가진 절대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상대적인 정보의 상태를 말한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물체의 위치를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물체들 집합의 안쪽 경계라고 정의한 것을 인용하며 공간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바로 인접성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은 사물이나 사건 사이의 관계다. 이런 공간 개념에는 거리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다. 두 손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두 손은 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공간은 관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거리를 통해 정의되고 비어 있을 수도 있다고 배운다. 사물이나 사건이 없어도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이라는 실체가 가능하다고 상상한 뉴턴은 특유의 겸손하지 않은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그리고 일반적 상식에서의 공간을 평범한 공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창안한 공간을 진정한 공간이라고 불렀다.
중력장은 질량의 영향을 받으며 질량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결정한다. 중력장이 출렁이면서 퍼져나가는 파동이 중력파다. 이것은 전자기장이 진동하며 퍼져나가는 전자기파와 비슷하다.(101 페이지) 저자가 설명하는 공간은 사물들이 서로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이루는 구조이며 사물들 사이의 인적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 공간이란 사물들 사이의 인적 관계이며 우리는 이 관계를 이용해 사물과 사건의 위치를 파악한다. 절대 운동은 존재하지 않고 상대 운동만 존재한다.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어떤 사물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절대적 장소는 없다. 오직 상대적 장소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공간의 구조가 어디에서나 똑같은 고정된 유클리트 기하학을 따르고 사물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뉴턴의 공간이 현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착각이 생겼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현실을 확장된 실체인 장(場)들의 집합으로 묘사한다. 이 장들은 공간에 자리하지 않고 외부 시간 속에서 진화하지도 않는다. 데카르트의 연장(延長) 실체처럼 장들 자체가 공간적 확장을 규정하고 장들의 진화가 시간이다. 저자는 양자 물리학의 관계 구조와 시공간의 관계 구조가 일치한다고 말한다.
양자 물리학의 개념적 틀은 시스템 사유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양자 물리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 사이에 모순이나 긴장이 존재한다는 흔한 주장과 달리 두 이론은 연인처럼 서로를 감싸안는다고 말한다.(10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두 이론은 자연스럽게 융합되는 관계적 핵심을 공유한다. 두 이론 모두 과정들 사이의 상호작용 네트워크를 다룬다.(123, 124 페이지)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두 이론이 서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성 이론이 깔아준 역동적 시공간이란 무대 위에 양자 물리학의 관계적 속성이 올라타면서 비로소 우주의 진짜 모습이 완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주의 진짜 모습이란 시공간이 없는 루프의 그물망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전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우주란 물질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을 이동하는 곳이 아니다. 시공간마저 모두 녹아내린 자리에서 많은 미시적 루프들이 쉼없이 얽히고 설키며 관계를 맺고 있는 역동적 그물망 자체가 우주의 진짜 얼굴이다. 사회 역학은 시스템들이 다른 시스템들에 대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시공간적 관계를 정의한다.(110 페이지) 저자는 양자는 사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양자는 고정된 속성을 가진 사물이 아니라 대상들이 상호작용할 때만 나타나는 사건이자 관계다.
시간과 관련된 모든 현상은 소산적(消散的)이다. 에너지가 흩어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소산작용이 있을 때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엔트로피 기울기 즉 차이가 존재한다. 거시적 변수들에서 미시적 변수들로 넘어갈 때 소산이 일어난다. 이때 이 에너지는 거시적 변수들보다는 더 이상 포착되지 않는다. 저자는 자연을 더 잘 이해하려면 자연을 우리의 기존 개념에 맞추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의 개념을 분석하고 수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은 생물권의 일부인 우리의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소산적이며 비가역적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다. 과거의 미래 사이의 차이는 통계적인 것이다. 열역학 제2 법칙은 보편적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통계적이란 개별 입자의 움직임 수준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지만 수많은 입자가 모인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확률적으로 한쪽 방향 즉 미래로만 현상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저자는 세상의 기본 물리 방정식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산에 있는 모든 돌을 물리 방정식으로 설명하려면 그 방정식들의 수많은 해(解)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해들을 다 알아내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어떤 대상에 관해 유용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구체적 상황의 측면들을 포착하는 데 적합한 개념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는 것은 과학이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과학의 불통일성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다양성은 과학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관점들이 일관되게 연결된다는 사실은 과학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물리학이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현상이 물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과정이 완전히 똑같아도 우리는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거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저자는 복잡한 현상은 단순한 구성 요소에서 생겨나지만 그 구성요소로는 원리적으로 절대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 질환이라 말한다.(171 페이지) 저자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다는 증거는 엄청나게 많다고 말한다. 부제가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인 것이 이해된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도 생명체가 물리학의 범주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생물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생물학자가 많았다. 오늘날 생화학은 모든 생물학자에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양자 물리학은 화학의 기본 원리가 물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장벽을 허물었다. 저자는 물리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노래라고 말한다. 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말을 걸고, 세상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부르는 다양한 노래들은 서로 공명하고 반영하며 서로에게 말을 건다.
저자는 상대적이란 말과 자의적이라는 말을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가령 달의 속도는 지구에 대한 상대적 속도로 정의되지만 그것이 달의 속도가 자의적이어서 달이 원하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이 그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덕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지 그 자신의 윤리를 어긴 자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모든 지식이 누군가의 지식이라는 사실이 지식을 자의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으며 다른 사람 또는 나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지도 않는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최종적 진리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세상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더 빨리 달리기 위해 훈련하지 빛의 속도에 도달하기 위해 훈련하지는 않는다. 도덕적 판단이 중요한 것은 도덕이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도덕성 붕괴보다 핵전쟁이 문명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더 높다며 절대적 진리의 소멸이 문명을 붕괴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덕성은 우리 존재의 복잡성을 구성하는 실질적 요소다. 그리고 그것은 생물학적, 문화적, 사회적 뿌리를 가지고 있어 우리가 숙고하는 모든 과정의 복잡성과 분리하기 어렵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평등하게 존재하며 그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관계는 신학에서도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고립적이지 않은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고,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다.(201, 202 페이지)
저자는 물리학이 먼저 명확하게 정의된 실체적 바탕을 제공하고 그 위에 관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순진한 유물론과 결부된 헛된 희망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사물(실체)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계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로벨리에 의하면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만 그 대상의 속성이 정의되고 존재하게 된다. 고정된 물질적 실체가 먼저 있고 그 위에 관계가 쌓인다는 생각은 고전적이고 단순한 물질 만능주의(순진한 유물론)가 만들어낸 착각이자 현대 양자물리학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으려는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핵심 지적이다.(202 페이지)
전자(電子)에 관한 모든 설명은 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세상에 관한 물리적 기술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관점에 따른 것이라 설명한다. 세상의 상태에 관한 모든 설명은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본 근사치(近似値)다. 여러 과정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은 세계의 각 부분이 서로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정보다. 따라서 세계는 서로 다른 부분들 사이의 상호(相互) 정보(情報)다. 물리학은 시스템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상호 정보를 다룬다. 세상에 관한 모든 설명은 상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상태에 관한 진실은 언제나 주관적이다.((204, 205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주관성이란 진리가 본질적으로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주체가 없는 객관성은 추상적 개념이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점은 관점이 다르다고 해서 소통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점들은 물리적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들에게 숨겨진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들에 관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수히 많을 뿐이다.(210 페이지) 저자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개별적 자기 성찰조차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접근하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말을 했디고 말한다. 저자가 이 말을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 의식적 자기 성찰은 만능이 아니며, 우리 뇌와 신체가 자연의 거대한 인과법칙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주관성은 현실의 다른 어떤 특성보다 특별히 더 깊이 감춰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는 주관성이나 의식을 과학으로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로운 무언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주관성 역시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세상의 다른 물리적 특성들보다 특별히 더 깊이 감춰진 비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양자역학 해석(관계론적 양자역학)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오직 다른 존재와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속성을 가진다. 주관성 역시 뇌라는 물리적 계가 외부 세계 및 자기 자신과 맺는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주관적 경험이란 결국 계(뇌) 내부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보의 처리 과정이다. 물리적으로 측정 가능한 뉴런의 전기 신호와 우리가 느끼는 주관적 느낌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된 같은 현상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의식을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로 분류하지만 저자는 이를 거부한다. 그는 과거에 인류가 생명(Life)을 물리화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생명의 기운(생기론)으로 보았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극복했듯 주관성 역시 거대한 뇌의 메커니즘이 밝혀지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본다.
저자는 우리가 객관적 지식이라고 믿는 것 역시 결국 하나의 특정한 관점이자 주관성의 변형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지식의 주체인 인간이 결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관찰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연의 한 파편이며 우리가 만든 객관적 이론과 과학적 지식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고 탐색하기 위해 신체와 뇌로 구현해 낸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의 한 파편이며 우리가 만든 객관적 이론과 과학적 지식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고 탐색하기 위해 신체와 뇌로 구현해 낸 도구일 뿐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신체와 뇌라는 말은 한계가 있고 제한적인 도구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인간의 과학과 지식은 우주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그보다 인류가 가진 제한된 감각 기관(신체)과 처리 능력(뇌)을 통해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생존하기 위해 최적화된 지도에 가깝다. 우리는 우주를 '밖'에서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없다. 우주라는 거대한 계(System)의 안에 속해 있는 작은 파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언제나 우리 신체와 뇌라는 필터를 거쳐 들어온 제한되고 주관적인 정보일 뿐이다. 우리의 뇌는 우주의 모든 차원과 법칙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하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간, 공간, 객체의 개념조차도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유용한 도구'일 뿐, 우주의 근본적인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과학이 말하는 객관성은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객관성이란 너와 내가 서로 소통하며 조율해 낸, 고도로 공유된 상호 주관적 경험이다. 즉, 수많은 주관적 관점들이 상호작용(실험과 검증)을 거쳐 서로 불일치를 줄이고 합의에 도달한 상태를 우리는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상의 속성은 오직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만 드러난다. 지식 역시 언제나 특정한 물리적 위치, 시간, 문화적 배경이라는 관계와 맥락 안에서만 성립하는 시각(Perspectival knowledge)이다. 절대적이고 탈맥락적인 객관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저자는 객관성을 절대화하는 태도 역시 또 하나의 거대한 착각이자 주관적 집착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는 과학이 위대한 이유는 완벽한 객관적 진리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의 지식이 언제나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임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은 과학적 지식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식의 본질적인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가 보는 세상 너머의 진짜 리얼리티(관계적 현실)를 더 깊이 탐구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적·철학적 통찰을 담은 말이다. 마음 역시 만물의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이원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탁자가 원자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상적 의미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듯 영혼과 감정에 관해서도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만물의 평등함이라는 것이다.
지식은 과정, 주체, 그리고 나머지 세계 사이의 관계다. 지식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하는 개념적 틀 위에서 형성되는 집단적 현상이다.(223 페이지) 지식은 물리적 현실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고 연구하고 상호작용하는 세계는 다른 시스템들이 우리에게 투영된 모습이며 현실 자체를 구성하는 상관관계 그물망의 일부다. 우리는 이러한 순환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224 페이지)
우리의 지식은 다른 모든 정신적, 영적 삶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불안전하며 그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다. 계몽주의와 특정한 분석 철학이 소중히 여겼던 순수이성, 궁극적 명료함이라는 이상은 비로소 무너진다. 모든 모형은 포착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놓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이론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는 다른 무언가가 간과되어 있다. 우리가 어떠한 질문에 우선순위를 두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228 페이지)
저자는 모든 지도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우리는 무지와 확실성 사이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덧붙인다. 현실의 관계적 본질과 그로 인한 관점주의를 인식하면 현대 과학과 일관되게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가 바로 주관적 관점이다. 진리는 주관적이다. 과학이 많은 질문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한다고 믿지만 이러한 해답들은 타당성과 신뢰성이 높을 뿐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과학 지식과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지식들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세상에 관해 즉각적으로 설명할 때 쓰는 단어인 탁자와 과학적 차원에서 쓰는 단어인 전자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 다 세상을 특정한 수준에서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 단어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실제를 지칭한다. 저자는 뉴턴의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통합되었을 뿐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도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물리학은 타당성의 범위 내에서 훌륭하고 강력하며 정확하다. 뉴턴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사이의 관계는 뉴턴 물리학의 아인슈타인 물리학과 맺는 관계와 같다.
과학 이론은 세계를 이해하는 체계의 일부다. 기존 사고의 틀에 덧붙는 도구다. 그러한 틀이 없다면 이론은 표현조차 될 수 없다. 과학 이론은 결코 세계에 관한 완벽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근본적 수정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존의 세계관을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시켜가며 새로운 이론을 발견한다.
이 말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론과 뚜렷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가진다. 카를로 로벨리의 관점은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존재론(우리가 어떤 틀에 갇혀 생각한다는 점)은 수용하지만 그 틀이 깨지고 바뀌는 과정에 있어서는 쿤의 과격한 단절(혁명) 대신 기존 패러다임 내부에서의 유기적인 확장과 변형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쿤의 패러다임론에 대한 세련된 비판이자 보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신중한 진화 과정에서 과학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학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정의해 왔다. 과학은 우리가 사고를 조직하고 세상을 경험하는 데 사용하는 개념과 도구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기초과학의 급진적 도약은 반증된 이론을 버리고 다른 이론을 찾아 나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혼란 속에서 이미 얻어진 과학적 성과를 신뢰하면서도 방법론적 개념적 틀을 수정하고 축적된 지식이 제기한 수수께끼의 해답이 되는 새로운 종합을 구축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은 개념의 변화를 감수한 끝에 얻어진 것이다.(251, 252 페이지) 결국 과학은 기존의 탑을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것이 아니라 기존 탑의 설계 오류(개념)를 고쳐 더 높고 견고한 탑으로 확장하는 개념적 재구성의 역사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개념은 모호한 실체다. 개념의 사용은 항상 모호하고 가변적이다. 물리학에서 가장 풍부한 개념들은 끊임없이 재정의되어 왔음에도 여전히 모호하게 느껴진다. 엔트로피에 관해서는 새로운 정의가 꾸준히 등장하지만 오늘날까지 에너지에 관한 개념이 물리학에서 차지하는 수많은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정의는 없는 것 같다. 개념과 언어의 모호함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모호함에서 또 다른 모호함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언어는 적응하고 폭증하고 차별화하고 진화하는 무한한 능력을 지닌다. 바로 이러한 특성 덕분에 오늘은 더욱 미묘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무한한 과정이 풍요로운 문화의 바탕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추를 통해 개념을 구축한다. 유추란 개념의 한 측면을 가져와 다른 맥락에서 재사용하고 그 의미 중 어떤 것은 유지하고 다른 것은 버림으로써 새로운 조합이 참신하고 효과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입자 물리학에서의 입자, 시공간의 곡률 등이 모두 은유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너무 많은 것을 뒤에 남겨두면 앞으로 나아갈 도구가 부족해지고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면 이해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한다.(259 페이지) 이 역시 훌륭한 은유다. 너무 많은 것을 남겨둔다는 것은 과거의 지식을 버린다는 것이고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과거의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지식을 무조건적인 진리로 숭배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허구라며 완전히 무시하지도 말며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유용한 은유이자 도구로써 영리하게 쥐고 나아가야 한다는 중용의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저자는 특수 상대성이론을 예로 든다. 이 이론은 그냥 보기에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와 맥스웰 방정식, 두 가지 모두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확신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포퍼와 쿤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을 수정하는데 몰두하거나 고속 체계에서의 속도 상대성 이론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두 이론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갈릴레오의 생각과 맥스웰 방정식 사이에서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점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바로 개념적 틀 즉 동시성의 의미를 바꾸는 것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 역시 같은 전략의 선물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특수 상대성이론 관련 영역에서의 뉴턴 중력, 그리고 뉴턴 힘의 동시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형으로서의 맥스웰 이론에 관한 확실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우리는 이 낯선 세상 속에서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채로 불안하고 조심스럽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