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근대 개발 시대에 중요한 통찰력을 주었고, 불교는 문명의 위기와 맞물려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기독교와 불교는 지향점과 방법론이 다르겠지만 종교적 깊이, 인문학적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불교와 양자역학], [양자역학과 불교] 등의 책을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때만 해도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책은 불교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존 폴킹혼, 러셀 스태나드 등을 통해서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논의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국의 성공회 신자이자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나드는 양자역학의 '빛과 전자의 파동-입자 이중성'을 기독교의 '예수의 신성·인성 이중성(기독론)' 및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한 바 있지요. 물론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불교가 양자역학과 훨씬 더 근본적인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평가하는 반면, 기독교는 양자역학을 통해 교리의 모순을 방증하거나 비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 그리고 그 물리학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관건은 아니겠지요. 덧붙여 잘 모르지만 불교 성직자들은 이상한 정치적 언행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기독교는 그런 경우가 많은 것도 기독교 책이 잘 선택되지 않고, 불교 책이 잘 선택되는 한 요인이겠지요. 저도 기독교인인데 기독교 설교는 수천년 전에 쓰인 경전을 현대적 맥락하에서 어떻게 살려서 가르치고 갈 길을 제시할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약간 죄송한 말씀이지만 모 교회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쓰신 모 기독교 전문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에서 현상을 분석하고 전개하는 것에는 예리한 구성력을 보이시는 등 충분한 지면을 할애하셨지만 결론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참 소략한 말씀이었습니다. 큰 상찬을 받은 논문인데도 참 허무하게까지 느껴지는 결론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다 된다는 상황이라면 답은 명확하고, 할 바는 별로 없어 그것을 책으로 낼 여지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최근에 안 바이지만 질그릇 이론이 있더라고요.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친히 빚으시고 그 손에 붙잡아 쓰시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특정 정치인을 그런 그릇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행동이 성경적이어서 지지하고 그를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향성이 같아 그를 하나님이 흠이 있어도 쓰신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편향이 보인다고 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볼품없고 깨지기 쉬운 그릇과 삿되고 무도한 그릇은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적당한 구절이 있으면 그것에 현실을 꿰어 맞추는 경향이 기독교인들에게서 자주 보인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수전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해석하기 어려우면 놓아 두어야 할 텐데 굳이 해석하고 적용하려 드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현실을 참고 견디고 기도하고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으로 설익은 결론을 내고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인사들이 기독교 책을 읽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