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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화 그늘
  •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권오영
  • 17,100원 (10%950)
  • 202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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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 박사 권오영은 고대사는 불확실성(문헌 자료 부족)으로 백가쟁명의 장이 되었는 바 사료가 풍부한 근현대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으로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한 논리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인문학임과 동시에 과학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고대사 해석의 1등 사료인 고고학적 자료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고, 역사학 고유의 방법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눈부시게 발전하는 자연과학, 공학, 통계학, 법의학 등 인접 학문의 방법론을 활용하는 융복합적 연구에 소홀하고, 한반도라는 좁은 공간만을 대상으로 연구와 교육을 전개하는 탓에 한국 고대사회의 특징을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비교사적 시각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에 스스로도 책임을 느끼고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실제 참고할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땅속에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 즉 발굴되는 실물 자료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고대사 연구자들이 땅에서 나오는 이 빅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패가 달렸다. 현재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단연 고대국가 형성사이다. 그 다음은 삼국시대의 지배구조다. 반면 생활사 연구에 뛰어드는 이는 많지 않다. 박물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고대사 관련 강좌를 듣노라면 금세 따분함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사라 하면 온통 정치사나 제도사 이야기뿐이고 고고학은 토기의 형식 분류와 연대 추적을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우리에게 백제 개로왕의 죽음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바둑의 고수인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냈고 도림은 개로왕의 환심을 사 그의 측근이 된다. 결국 도림은 개로왕을 꼬드겨서 왕릉과 궁궐을 더 크게 짓는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한다. 개로왕은 한정된 국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행했고 그 결과 국고가 텅 비어 백성들은 위기를 맞았다. 장수왕은 이 틈을 타 군대를 파견해 백제 도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다. 이때 개로왕이 감행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삼국사기]는 증토축성(蒸土築城)이라 표현했다.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았기에 수수께끼 같은 의미를 풀겠다며 많은 역사가들이 달려들었다. 증토란 흙을 찌다라는 의미인데 흙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라고 보거나 많은 흙을 모았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답은 중국의 섬서성 유림 지역의 통만성에 있었다. 중국 학자들이 통만성을 발굴조사해 성을 쌓은 자료를 분석해 황토와 석회가 사용되었음을 밝혔다.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 많은 수증기가 발생하는데 고대인들은 이 현상을 보고 흙을 찌다 즉 증토라 표현한 것이다. 결국 백제도 토목건축공사에 석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 사례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연구사가 한국이란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황토와 생석회(산화칼슘)를 섞은 뒤 물을 부으면 생석회가 물과 반응해 소석회(수산화칼슘)로 변하는 소화 반응이 일어난다. 이 반응은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격렬한 발열 반응이다. 온도가 순식간에 섭씨 100도~200도 이상으로 치솟기 때문에 물이 끓어오르며 엄청난 수증기(김)가 피어오르게 된다. 조상들은 이 흙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을 보고 '흙을 찐다(蒸土)'고 표현한 것이다.

 

소석회(消石灰)의 소(消)는 사라질 소란 의미다. 생석회의 격렬한 반응(열)이 완전히 끝나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다. 소석회 자체는 생석회보다 전혀 단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드럽고 잘 부서지는 고운 가루 형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처럼 굳는다. 소석회를 진흙(황토)과 섞어 반죽해 두면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천천히 흡수한다. 이 과정에서 소석회가 원래의 단단한 암석이었던 탄산칼슘 상태로 돌아가며(탄산화 반응) 주변의 흙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결합시킨다. 생석회를 그대로 벽에 바르면 문제가 생긴다. 비나 수분을 만나면 그 안에서 열을 내며 부피가 대폭 늘어나 벽이 다 갈라지고 터지는 것이다. 돌덩어리인 생석회로는 벽을 매끄럽게 바르거나 흙과 골고루 섞을 수 없다. 고운 가루 형태인 소석회여야만 흙, 물과 부드럽게 반죽할 수 있다. 돌덩어리인 생석회로는 벽을 매끄럽게 바르거나 흙과 골고루 섞을 수 없고 고운 가루 형태인 소석회여야만 흙, 물과 부드럽게 반죽할 수 있는 것은 단백질 음식을 먹으면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뒤 다시 결합하여 근육을 만드는 단백질로 거듭나는 것을 닮았다.

 

사람의 뼈는 조선시대 후기 무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 이유는 이때부터 황토와 석회에 물을 섞어 회격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회격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질 뿐 아니라 내부 밀폐 상태가 잘 유지돼 나무 뿌리나 곤충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내부 환경도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기에 목관과 수의도 잘 보존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무덤 양식인 회격묘(灰隔墓)는 주희가 편찬한 가정 의례 지침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喪禮)〉 편에 그 제작 방법이 아주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석실묘의 단점을 보완하는 차원이었다. 주희가 살던 남송(南宋)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하면서 부모의 묘를 화려한 돌방(석실)으로 만드는 사치 풍조가 심했다. 하지만 주희는 석실묘가 시간이 지나면 돌 사이에 틈이 생겨 물이 차고 나무뿌리가 뚫고 들어간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했다. 주희는 비싼 돌을 깎는 대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와 흙을 짓이겨 다지면(회격)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돌보다 더 단단해져 부모의 유골을 영구히 보호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비밀을 간파했다. 격(隔)은 관과 흙 사이에 석회 벽을 쳐서 외부 환경(물, 나무뿌리, 벌레)으로부터 관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가로막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갓난아기 때 두개골에 압박을 가해 머리뼈 모양 자체를 납작하거나 길쭉하게 변형시키던 고대의 독특한 풍습인 편두(褊頭)를 이야기한 데 이어 사람 뼈를 잘못 해석해 역사 자체를 왜곡한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는 도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도굴의 역사는 아주 유구해서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만들 때부터 도굴이 심하게 행해졌다고 한다. 무왕의 쌍릉은 고려 때 이미 도굴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쌓인 흙을 퍼내야 하는 도굴 과정에서 말끔하게 유물을 쓸어가기는 어렵기에 조심스럽게 흙을 채굴하다 보면 도굴꾼들이 흘리고 간 유물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으로 백제는 신라나 가야처럼 엄청난 양의 부장품을 무덤에 두지는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는 무덤을 크게 만들고 순장하는 풍습을 빨리 없앴다. 그 이유는 불교를 빨리 수입한 것과 관련이 된다.

 

시인 고고학자 고(故) 허수경은 “마을이 있는 곳에는 무덤도 있다. 꽃이나 음식이나 술을 들고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죽은 자와 인연이 있던 산 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는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덤을 방문하는 이는 도굴꾼 아니면 고고학자들이다. 어떤 맥락에서 본다면 무덤을 쫓아다니는 도굴꾼과 고고학자의 내면은 비슷할 것이다.”([모래 도시를 찾아서] 106 페이지)란 말을 했다. 저자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의 압도적 다수가 수도 또는 수도와 관련된 유산이라는 데에 주목해보자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익숙하거나 잘 알려진 유적 또는 유산의 대부분은 한 왕조의 수도이거나 왕궁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수도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국가가 자국 내의 역사 수도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 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還戶聚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 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 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 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 취락 또는 거점 취락이라고 부른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 도성,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인 장안성도 경주 월성과 마찬가지로 바둑판 모양의 질서 정연한 토지 구획에 나섰다. 그 결과 이런 수도 유적에서는 굳이 땅을 파지 않고도 항공 촬영만으로 정연한 도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중국 요령성 환인에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건설한 왕성이라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있다. 국가를 세우며 경사가 90도에 가깝도록 가파른 산 위에 왕성을 세웠다는 것은 당시 항상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간접 증거’(방증; 傍證)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모두 주변 세력 또는 중국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러니 방어 취락이 빠르게 발전했음을 물론이고 이를 발전시켜 산성을 만든 것이다. 왕성 자체가 산성의 형태를 취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환도산성 외에도 평지에 있는 왕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위성처럼 여러 개의 산성을 배치했다. 때로는 새로 정복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때로는 외적과의 항쟁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에도 산성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시대에 건설된 산성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만 2000개가 넘는 성이 존재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나 유튜버들이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아니라 중국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유물과 정식 학계의 검증 결과는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장안성)이자 중심지였음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다. 장수왕이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을 때 지은 거대한 평지 왕궁인 안학궁(安鶴宮) 터, 안학궁의 배후에 있는 방어용 석축 산성인 대성산성(大城山城),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성곽인 펑양성(장안성) 등이 북한 평양에서 발견되었다. 이 밖에 평양 고산동 고분군, 강서대묘,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등 평양 일대에서 화려한 고구려의 생활상, 사신도, 천문도가 그려진 벽화 무덤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성을 빠져나가 남성으로 향하던 개로왕은 고구려 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는 한강을 건너 고구려 군사기지가 있던 아차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했다. 당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현장은 국내외 사설을 통해 북성과 남성, 대성과 왕성 등의 명칭으로 표현되며 당시의 수도는 위례성과 한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관계를 풀기 위한 논쟁은 100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성의 위치를 명확히 하는 데는 실패했다. 양주, 천안, 광주, 하남 등 모두를 소환해 봐도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문헌 자료를 토대로 억지로 문헌 고증을 하거나 유적의 발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보는 등 초보적인 연구를 지속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라 불리는 전대미문의 홍수로 인해 풍납토성 서벽이 무너지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 성을 백제의 왕성으로 보는 연구자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이라는 주장에 오랫동안 힘이 실렸다. 1980년대에 서울 몽촌토성과 하남 이성산성을 발굴 조사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연구자는 하남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9년에 진행한 풍납토성 동벽 조사로 인해 위례성 위치 논쟁을 종결할 수 있었다. 김부식, 일연, 정약용 등 무수한 인물들이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위례성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풍납토성 발굴조사 덕분이다.

 

혹자는 풍납토성의 규모가 일본의 헤이조쿄보다 작아서 결코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3~4세기 무렵이라고 보면 710년에 완성된 헤이초교보다 4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동아시아 수도제의 발달 과정에서 3~4세기는 왕권과 왕성만 짓던 시기로 주변 지역을 바둑판식으로 나누는 지할(地割)은 유행하지 않았다. 풍납토성이 절대 백제의 왕성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강변에 바짝 붙어 있어 수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 국가의 왕성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과 그 인근이 수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지형을 분석해보면 현재 한강의 흐름은 근대 이후 많이 변형되었으며 과거에는 풍납토성이 지금처럼 한강변에 바짝 붙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형적으로 보면 풍납토성은 단구(段丘) 형태로 된 한강변의 자연 제방 위에 우뚝 솟아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쉽게 침수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지형을 두고 1500년 전의 지형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역사의 연구는 당시 경관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는 공부를 할수록 민족의 기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해결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사료적 가치를 의심받는 문헌을 토대로 짓는 집이 사상누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고 말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인종적 스펙트럼이 획득되는 모습을 보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의 역기능에 대해서도 생각도 되었다고 말한다. 한민족의 순수함과 우월함을 부르짖는 한편에선 차별로 소요되는 이웃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눈부신 과학의 발달은 모든 학문 분야의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양한 주제와 평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실태와 담 쌓고 과거의 주제와 방법론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는 분야가 한국 고대사라고 말한다. 필자 또한 이러한 현상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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