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開城)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기본 요소인 사신사(四神砂)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신사란 풍수의 대상이 되는 땅의 동서남북에 있는 산을 말한다. 그런데 개성은 일찍부터 물과 관련된 지세 즉 구불구불 흐르지 않고 거의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으로 인해 수덕(水德)이 불순하다는 말을 들어 왔다. 개성 내부에서는 상대적으로 물이 귀했지만 비가 많이 오면 그 물이 한 방향으로 쏟아져 내려와 수해로 연결될 가능성이 컸다. 크게 보아 개성은 예성강과 임진강, 넓게는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 우리 국토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며 오래전부터 중요하게 여겨지던 곳이다.
태조 왕건은 918년 6월 태봉의 철원 도성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한 지 7개월 만인 919년 1월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력 징발 등 경제적 부담도 크고 이전 수도에 터를 잡고 사는 세력의 반대도 많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태조는 건국 직후 반란이 이어지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천도(遷都)를 단행했다.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로 구성됐던 개성부는 현종 9년인 1018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혁파되고 개성현 지역과 장단현 지역을 중심으로 특별구역이 재편성되었다. 그것을 경기(京畿)라 부르게 되면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제도적으로 경기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이후 경기 영역은 몇 차례 개편이 있었지만 왕도를 지원하고 보유하기 위한 특별구역의 위상은 고려 말까지 계속 유지됐다. 경기는 고려 왕도인 개경을 유지하고 보위하기 위하여 개경 바깥에 설치한 특별 구역이다. 경(京)은 천자의 도읍, 기(畿)는 천자가 직접 관할하는 도성 주변의 땅을 의미했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무역을 가볍게 하고 왕의 교화도 먼저 시작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 경기 지역은 수도 개경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어서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요역(徭役)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조세 부담이 많은 곳이었다. 또 국가의 위급한 일이 생기면 경기 지역에서 군역 징발(徵發)을 먼저 했고 경기는 다급한 재정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시세인 과렴(科斂)이 자주 시행된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경기는 다른 지역보다 부담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세 감면과 구휼(救恤)이 자주 수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개경 도성 밖 사방에 설정된 사교(四郊)는 도성과 경기에 속한 군현 경계까지의 공간으로 조선 시기 한양의 성저십리(城底十里)와 비슷한 공간이었다. 사교는 도성은 아니지만 도성의 배후지로서 역, 절, 왕릉, 제사 공간 등 중요한 시설이 설치된 곳이었고 도성 안에서 할 수 없는 의례를 하는 공간이었다. 또 사교는 왕이 사냥을 하거나 군사가 주둔하고 훈련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제사 공간인 태묘는 나성 밖 동교에 있었다. 또 고려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원구단(圜丘壇)은 원나라 이후의 천단이 북경 남쪽에 있었던 것과 같이 남교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원구가 회빈문 밖에 있었다고 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동남쪽에 있었던 적전(籍田) 역시 의례 시설에 속한다. 이 외에 송악산 정상과 박연폭포 근처에 있던 신사(神祀), 개경 주변에 분포한 왕릉과 절이 위치한 곳 역시 사교의 범위에 포함할 수 있다. 성을 성곽이라 하는 것은 보통 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내성을 성(城)이라 하고 외성을 곽(廓)이라 한다. 고려 시기의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했다. 개경의 주요 길은 궁궐, 관청, 시전(市廛) 등 중요한 시설과 성곽의 성문을 연결했다.
왕조시대 궁궐은 도성의 핵심 공간이었다. 궁궐은 국왕의 정치 공간이자 생활공간이었고 또 의례 공간이기도 했다. 고려 시기 개경의 정궁 곧 본궐은 송악산 남쪽에 있었다. 고려 말 이후 전각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고려 본궐터인 만월대의 경관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과 사뭇 다르다. 북한의 개성에 있는 고려 궁궐터는 지금 가기도 어렵지만 그것 말고도 고려 궁궐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우선 송악산 남쪽의 본궐은 이름도 없다. 원래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본래는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고려의 본궐은 고려 초기부터 전쟁과 화재 등으로 훼손되었다가 중건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제일 먼저 확인되는 궁궐의 피해는 거란의 2차 침입 때인 1011년(현종 2년) 1월로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을 떠난 나주까지 내려갔다. 개경에 돌아와서 본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궁인 수창궁으로 들어갔던 현종은 이후 두 번 궁궐 공사를 했다. 강화 천도 직후까지 남아 있던 개경의 수창궁은 몽골과의 전쟁 기간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연경궁은 본궐 동쪽 가까운 곳에 있던 이궁이었다. 본래 현종의 비 원성태후의 궁이었던 연경궁은 덕종 때 왕의 누이 연경궁장공주에게 지급되어 공주 궁으로 바뀌었다가 1098년 숙종이 태자를 세우고 첨사부를 설치한 이후 공주 궁에서 왕의 이궁이 되었다.
고려 시기에 태묘와 사직이 정비된 것은 성종대였다. 이때 유교의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정치제도를 정비했고 건국 이래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태묘와 사직을 설치했으며 아울러 유교적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했다. 태묘와 사직은 도성의 상징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격식이 있었다. [주례]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태묘는 왼쪽에, 사직은 오른쪽에 위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태묘는 동쪽에, 사직은 서쪽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려 시기 수도인 개경에 설치된 대표적인 교육기관이 국자감이다.
국자감은 교육기관이지만 교육만 맡았던 것은 아니다. 국자감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과 과거의 첫 번째 시험인 국자감시를 주관했다. 그래서 국자감에는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 시설, 관원이 배치되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시장은 꼭 필요한 시설일 뿐 아니라 도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인구의 집중과 시장의 발달에서 도시가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는 도시사의 고전이론이다. [주례] 고공기에 조정 곧 관청은 궁궐 앞에, 시장은 뒤에 둔다고 한 것은 시장이 아주 오래전부터 도성에 꼭 필요한 시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개경의 절은 풍수적으로 개경을 비보(裨補)하는 기능을 했다. 고려 태조는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개경에 절과 탑을 세워 개경의 풍수를 보완하는 작업을 했다. 고려왕릉은 조선 건국 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훼손되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도굴 등으로 본 모습을 잃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고려 왕릉을 정비하고 그중 일부는 발굴조사도 했다. 최근에는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 일부가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지만 주로 개성 주변에 있는 고려 왕릉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조선 건국 후 고려 왕릉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조선 태조 즉위교서에서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했지만 태조 때에는 고려왕릉의 관리까지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조선 초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는 부실했고 숭의전에 모신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을 제외한 다른 왕의 능들은 거의 방치되었다. 조선 초 고려왕릉에 대한 관리는 1476년 성종 7년에 완성한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그 내용은 역대 시조 및 고려 태조 이하 4위(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능침은 소재지의 수령이 매년 돌아보고 또 밭을 일구거나 나무 하는 것을 금(禁)한다는 것이다.(141 페이지)
고려는 몽골과 전쟁 중이던 1232년 7월 강화로 천도 했다가 1270년 5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919년 고려의 수도가 된 이후 개경은 강도(江都)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외적의 침입과 정변 등으로 궁궐 등 주요 시설이 훼손되기도 했지만 수도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1232년 수도를 강도로 옮기면서 개경은 수도의 지위를 내어주었다. 고려 말 개경의 위상은 공민왕 이후 천도 논의가 등장하면서 흔들렸다.
고려 전기에는 정종(定宗)이 서경 천도를 주장했고 문종과 숙종 때는 남경을 건설했으며 인종 때에는 묘청이 중심이 되어서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또 강도로 천도했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는 1290년 원나라의 반란 세력인 카다인이 침입했을 때 충렬왕이 잠시 강도로 피신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천도 논의는 없었다. 고려 말에 대두된 천도 논의에는 개경의 지리적 위치가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기 때문에 내륙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가 보이기도 하지만 천도론은 대체로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개경의 지덕이 쇠했다는 지기쇠왕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아울러 천도론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불안정한 정국의 변화를 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고려 말 천도 대상지로 주목된 곳으로는 철원, 연주(지금의 연천군), 강화, 충주, 기달산, 회암(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등 다양했지만 실제 왕이 움직인 곳은 남경 곧 한양(백악)뿐이었고 그것도 천도라기보다는 몇 달 정도 왕이 거처를 옮긴 정도였다. 공민왕 후반기 이후 궁궐 운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수창궁과 화원이다. 고려 초부터 중요한 이궁 중 하나였던 수창궁은 몽골군과의 전쟁 중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370년(공민왕 19년) 공민왕은 수창궁 터에 행차해 조영(造營)을 명령했는데 이때 훼손된 본궐의 강안전과 연경궁 대신 수창궁을 중건하여 사용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수창궁은 공민왕 대에는 완공되지 못했고 1384년 윤 9월 낙성되어 그 후 중요한 궁궐로 기능했다. 수창궁에서 공양왕과 조선 태조가 즉위한 것은 고려 말 수창궁의 위상을 보여준다. 또 충혜왕 때부터 보이던 화원은 1373년(공민왕 22년) 6월 2층 8각전을 건설한 후 우왕 때 주요한 궁궐 공간이 되었다. 우왕 14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압박하자 수세에 몰렸던 우왕과 최영이 머문 곳이 화원이었는데 그것은 당시 화원이 우왕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개경의 태묘는 나성(羅城) 밖 부흥산 남동쪽에, 사직은 나성 안 오공산 남쪽에 있었다. 나성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외성이다. 수도 방어와 도시 구획을 위해 쌓은 성곽이다. 나성을 기준으로 보면 태묘는 나성 밖, 사직은 나성 안에 있게 되어 그 위치가 자연스럽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태묘와 사직이 설치되었던 성종 때는 아직 나성이 축조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태묘와 사직은 모두 도성인 황성 밖이었다. 또 사직은 궁궐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태묘는 궁궐에서 상당히 먼 곳에 있게 되어 태묘와 사직의 위치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성이 많이 어그러진다. 그렇지만 개경 궁궐의 위치 역시 서쪽의 오공산과 동쪽의 부흥산의 중심이 아니라 북쪽에 치우쳐 있었다. 즉 아직 나성이 축성되기 이전에 동쪽의 부흥산 남쪽에 태묘를 설치하고 서쪽에 오공산 남쪽에 사직을 설치했는데 나중에 나성이 축성되면서 결과적으로 사직은 성안에, 태묘는 성 밖에 위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