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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화 그늘
  • 케노시스 창조이론
  • 존 폴킹혼 엮음
  • 14,400원 (10%800)
  • 2015-09-15
  • : 608

이론물리학자겸 신학자 존 폴킹혼(1930 - 2021)이 엮은 책이다. 케노시스 창조이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자기 비움이라는 하나의 주제어로 설명한 여러 필자의 책이다. 케노시스는 카발라 용어인 침춤(zimzum)으로 설명할 수 있던 단어이기도 하다. 신학자, 과학자, 철학자 등으로 구성된 필자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분은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다. 그는 하나님은 능력이 전능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전능하다고 말한다. 서론에 나와 있듯 존 폴킹혼은 고전 신학과 과정(過程) 신학 사이에서 중도를 추구했던 인물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은 창조 세계와 상호작용하지만 창조 세계가 스스로 존재하도록 당신이 부여한 자유를 억누르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 가능하다. 이는 신정론 때문에 나타나는 당혹감을 대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사건에 영향을 받으며 세상에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물리학자 이안 바버는 과정신학이 자연 결정론과 신의 결정을 모두 상세히 비판한다고 제안한다. 과정신학은 신의 전능에 대한 전통적 관념론을 거부하는 한편 모든 사건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역할과 자연적 원인의 역할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이안 바버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과정 신학의 이해와 대다수 비움(케노시스)의 신학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한다. 가령 과정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의 전능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과정신학자들은 신의 초월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비판하는 한편 신의 내재를 훨씬 더 중요시하는 계속되는 창조 교리를 옹호한다. 


아서 피콕은 하나님은 계속 창조하시는 창조주시고 세계는 계속 창조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서 피콕은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 동안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가 어디서 발견할 수 있냐는 물음에  대해생물학에 의해 드러나듯 과정들 자체가 창조주로서 행하시는 하나님 즉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며 그것은 자연의 창조 과정과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범신론이 아니라 설명한다. 유신론자는 하나님을 우연을 수반하는 과정에 존재를 건넴으로써 세계 내에서 창조를 수행하시는 분으로 간주한다. 하나님은 법칙 또는 필연과 우연 모두의 궁극적 근거이자 원천이다. 


아서 피콕은 진화에 방향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떤 유기체의 DNA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의 결과는 전체 유기체가 처한 환경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아서 피콕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세계의 진화 과정 안에, 진화 과정과 함께, 그리고 진화 과정의 아래에서 깊이 관여하는 분이라 말한다. 이는 하나님은 진화 과정 안에, 진화 과정과 함께, 그리고 진화 과정의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아서 피콕에 의하면 하나님의 고난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 의도를 지닌 능동적 활동이다. 하나님에게 창조는 사랑으로, 의지를 가지고, 고통 속에 나타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이다. 우리는 예수를 가리켜 인간이 가진 인격이라는 한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신 방식이며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 자연에서 나타나는 존재와 생성에 관한 성찰로부터 이전에 잠정적으로 도출했던 하나님에 관한 개념들과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간주한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셨고 그와 하나가 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 역시 예수가 수난당하고 죽을 때 예수 안에서, 예수와 더불어 고난 받으셨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 유명한 위르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표현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점은 창조 세계와 영속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홈스 롤스턴 3세는 유전자와 유기체가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경험적 증거에 의존하기보다 현상을 보는 일반적인 해석학적 틀의 선택에 의존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홈스 롤스턴 3세는 유전자는 도덕적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기적일 수 없으며 같은 의미로 이타적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전자는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십자가형을 받는 자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홈스 롤스턴 3세는 그리스 사상에서 자연은 그리스어 어근이 의미하듯 출산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며 은유를 사용해 말하자면 지구는 다윈을 따르면 잉태하는 능력이 있는 자궁과 유사하고 뉴턴을 따르면 시계 장치와 유사하며 아인슈타인을 따르면 시공의 모체로부터 끓어오르는 에너지 및 물질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생물과 관련해 자연은 언제나 출산하고 재생하며 산고를 겪는다. 항상 어떤 것은 죽어가고 어떤 것은 살아간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피조물이 모두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란 말을 했다.(8장 22절) 


성서적 모델에서는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고난으로부터 보호받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고난으로의 부르심이며 우리는 그 고난을 통과할 때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부서지셨다. 지구라는 땅은 약속의 땅이지만 피조물이 그것을 위해 죽어야만 하는 땅이다. 예수는 자연 질서의 예외가 아닌, 그 정점을 보여주는 예로 간주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 안에 이기심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자기 비움도 있을 수 없다. 이기심, 자기 비움 공히 범주 오류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둘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자연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동식물계를 포함하는 자연은 단지 그냥 존재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렇게 도덕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자연에는 어떤 선이나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유기체인 자아는 자연 안에서 제한될 수 있을뿐 아니라 규칙적으로 제한된다.


중요한 점은 자유란 결정론(운명)과 엮여 있는 복잡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자유는 환경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다른 피조물처럼 인간도 시간과 공간, 즉 그들이 일해야만 하는 무대 안에서 그들의 개체들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은 생물학에서 윤리학으로, 더 나아가 윤리학에서 영성으로 나아간다. 이제야 우리는 고전적 기독교의 의미에서 본 비움의 가능성에 도달한다. 거기서 이기적인 개체는 타자를 위해 자기를 제한한다. 말콤 지브스는 신앙을 가진 많은 이들이 영혼이라 불리는 존재를 포함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가정하면서 영혼은 우리의 몸과 상호작용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를 떠난다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몸/ 영혼 이원론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의 유산이다. 


말콤 지브스는 특정 뇌 부위(전두엽 중앙 부분)를 손상당한 사람들이 올곧고 양심적인 시민에서 심각한 성격 결함을 지닌 사람으로 변한 예들을 거론하며 도덕성이 우리가 행하거나 근거하는 다른 것들만큼이나 확고하게 신경생물학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이며 따라서 그의 모든 사역의 표시라는 몰트만의 진술과 자신을 희생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기까지 타자를 돕는 것은 동물 세계에서도 널리 퍼져 있다는 드 발의 진술을 병치해 보면 흥미롭다. 프란스 드 발은 이기적 유전자라는 은유를 문제시한다. 그는 만일 당신이 은유를 매우 빈번하게 반복한다면 그 은유는 문자적 진리의 분위기를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도킨스 자신은 유전자에 대한 자신의 의인법적 표현을 경고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프란스 드 발은 의인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신경과학의 주된 사상 유형은 인간이 영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으로 존재한다는 히브리 - 기독교의 인간관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독교 전통이 자기를 내어 주시고 자기를 비우시는 그리스도의 독특함을 지키기 위해 인간 이외의 영장류에서도 비움 행위의 요소가 창발한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인간 이외의 영장류 및 개인과 집단의 인간 행위 안에서 비움 행위를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최고로 그리고 독특하게 드러난다. 독특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를 내어주시는 궁극적인 행동이 본질적으로 그와 그의 행동을 모든 타자로부터 구별한다는 점을 확증하는 우리의 신앙 때문이다. 


존 폴킹혼은 신학적 담론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위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존 폴킹혼은 인간의 구속과 우주의 구속을 위한 상황이 새 창조라고 말한다. 새 창조는 무로부터 이루어지는 두 번째 창조 활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옛 창조가 부활된 변형으로서 옛 것으로부터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새 창조는 첫 창조와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초월적 범주에 속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그 초월적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드러났다. 비움과 관련해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본문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빌립보서(2장 1~11절)다.(빌립보는 그리스 복동부의 필리피를 이르는 말이다.) 


존 폴킹혼은 처음부터 다윈을 환영했고 이를 긍정적으로 신학에 적용했던 기독교인들이 있다는 말을 한다. 찰스 킹슬리, 프레데릭 템플, 오브리 무어, 아사 그레이 등이다.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그들의 반응을 관통한다. 진화된 세계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도록 창조주에 의해 허용된 일종의 창조된 세계라는 것이다. 존 폴킹혼은 삶이라는 연극은 미리 결정된 대본에 따르는 공연이 아니라 행위자 자신들이 직접 연기하는 자발적인 즉흥공연이라는 말에 비움에 관한 언어가 분명하게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명백히 비움 개념이라 말한다. 우주가 진화했다는 점을 과학이 인식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내재하셔서 현존하신다는 점을 신학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은 계속되는 창조라는 개념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다. 


계속되는 창조라는 개념에 비움의 특징이 있다. 이는 창조 세계가 자신을 형성하도록 허용되었으며 그런 창조 개념에 상응하는 진화 과정에 대한 이해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때 그렇다. 이는 외부로부터의 형이상학적 제한이라는 과정신학의 개념과 다르다. 비움의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은 신학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담당한다. 계속되는 창조에 주목하는 것은 존재하는 상태에 있는 우주를 지지하는 이신론을 초월한 것으로 생각된다. 존 폴킹혼은 우리에게 있는 자연 과정의 규칙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다루는 신학적 주장이 서로 화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존 폴킹혼은 인과 관계가 얽혀 있다는 말을 한다. 즉 어떤 사건은 자연 과정에 기인하고 어떤 사건은 인간 작인에게 돌리며 어떤 사건은 신의 섭리로 돌리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존 폴킹혼은 네 가지 비움에 대해 말한다. 1) 전능성을 비움, 2) 단순한 영원성을 비움, 3) 전지함을 비움, 4) 원인으로서 지위를 비움 등이다. 존 폴킹혼은 비움의 신학은 불가피하게 역설의 신학이라 말한다. 비움의 신학은 하나님의 겸비하심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조지 엘리스는 비움은 자기를 비우시는 창조주 하나님 개념과 완전히 결부되어 있으며 이는 종교적 사회적 삶에 관한 자기희생의 관점이 뒤따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통섭이라는 세계관 위에서 비움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방치하거나 포기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어 선한 목적을 위해 창조적, 적극적 방식으로 행동하기 위해 준비된 상태를 말한다. 신약성서의 이 구절이 케노시스를 잘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5~10절) 


타자를 지배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종류의 신조들은 비록 자기희생의 요소를 실제로 포함한다 해도 비움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비움은 자아뿐 아니라 타자를 확증한다. 비움의 참된 본질은 사회적, 정치적 활동이라는 심오한 삶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타주의는 올바른 방향 안에 있는 부분 단계일뿐 비움과 같은 것은 아니다. 비움은 증오에 굴복하기보다 기꺼이 사랑하려는 상태를 의미한다. 조지 엘리스는 비움이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를 실천하는 데서 더욱 강하게 구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주류 기독교는 이를 거부하고 힘과 강압에 기초를 둔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역사 기록은 여러 측면에서 보았을 때 끔찍하다. 조지 엘리스는 비움과 얼마나 나란히 서 있는지를 나타내는 정도가 그 종교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조지 엘리스는 학문의 세계에 대해서도 비움의 논의를 적용한다. 새로운 관점을 입증하기 위해 강력한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기존의 세계관들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을 언급한 것이다. 세상을 새롭게 보기 위해 기존 지식을 기꺼이 내려 놓으려는 태도는 학습을 위한 핵심이다. 본질상 역설인 비움의 실천은 창조성을 위한 큰 여지를 남긴다. 미하엘 벨커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계 동료 인간, 그리고 심지어 동료 피조물과 맺는 관계, 즉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성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런 관계성을 개혁하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하신 자들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전능하심을 제한하신다는 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의 신성에 관한 다른 형이상학적 속성 즉 편재, 전지, 불가침, 자기 충족 같은 것 역시 제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창조하셨고 사랑하시는 자들 없이 홀로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시간을 주셔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므로 그분이 그들과 함께 자기 나라를 임하게 하실 것이라는 점을 하나님의 자기 비하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란 신정론을 예시하며 왜 하나님은 모순과 갈등과 재난을 지닌 세계를 견디고 인내하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물질과 생명이 속한 열린 체계들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미래와 새로운 가능태들의 흐름이라는 선물 안에서다. 성육신이 하나님의 본성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과 그것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에게 일어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중요시하는 전통 신학의 이론에 도전한 것은 19세기 루터파의 비움 개념이다. 


하나님의 본체인 말씀이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히 선하시지만 그 말씀이 육신이 될 때 그는 이런 신적 속성 중 얼마를 스스로 비우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신적 본성에 인간의 본성을 단순히 취하신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고난을 공유하신다는 개념이 단순히 말뿐임을 의미한다고 느낄뿐 아니라 파토스를 드러내는 어떤 것과 성육신의 깊이가 상실된다고 생각한다. 비움의 기독론을 채택하는 다른 이유는 가장 폭넓은 신학 용어로 말하면 플라톤의 하나님 개념에 대한 거부다. 플라톤 철학에서 비시간성은 시간성보다 우월하며 불변은 변화보다 우월하고 지성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가치보다 우월하다. 고전적인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은 플라톤의 하나님 개념과 연장선상에서 구성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비시간적이며 불변하고 지적이며 보편적인 존재로 보았다. 


물질과 관련된 측면에서 시간과 변화는 단순히 실체가 없거나 그저 명백한 무언가가 아니라 실재와 관련된 중요한 측면이 된다. 키스 워드는 어떤 경우든 자신은 비움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 처한 조건을 공유하시고 모든 유한한 행복의 기쁨을 나눌뿐 아니라 고난 받는 피조물의 모든 고난을 느끼신다고 생각한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신이 유한한 경험과 행동을 공유하는 것이 예수라는 지구상의 단 한 경우에 국한될 수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경험을 공유하실 것이다. 키스 워드는 만일 누군가가 “왜 하나님이 그저 선한 것들만을 창조하시지는 않은 겁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우주 안에 실질적이거나 일어날 법한 충돌이나 고난 없이 우리가 거할 수 있는 온전히 선한 우주,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고 창조의 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창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상세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악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연유한다. 비록 그것이 의도적인 방식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라도 그러하며, 또 어떤 면에서 악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선에 의해 항상 반대되고 또 그 선에 의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예수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치유하며 용서하고 악이 가진 힘에 사랑으로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참으로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비움은 성육신에 속하기 전에조차 이성을 가진 피조물의 창조에 속한다고 말하는 키스 워드는 하나님이 자율적 우주가 발전하도록 하기 위해 신으로서 가진 힘을 제한하는 한 우리는 우주의 창조 가운데 일종의 비움을 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키스 워드는 kenosis(비움) - enosis(연합) - theosis(신성화)의 단계를 이야기한다. 창조를 비움과 충만의 과정으로 보는 기독교의 견해는 매우 분명한 우주적 비전을 내포한다. 창조의 시작이 비움이라면 창조의 끝 또는 완성은 신성화다. 폴 피디스는 만일 하나님이 옛날에 한 번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창조하신다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선함을 상상하며 실현하신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라 코클리는 빌립보서 2장의 비움(kenoo)에서 유래한 케노시스가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을 한다. 비운 결과 겸손해진 것인지 십자가를 지신 것인지 말이다. 


새라 코클리는 그리스도가 성육신할 때 정확히 무엇이 비워졌는가? 묻는다. 이는 단순히 비유적 표현인가? 실제로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말인가? 신성과 인성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새라 코클리는 비움에 담긴 젠더적 함축에 대해 논한다. 젠더 문제는 수많은 방식으로 비움이라는 신학적 문제와 얽혀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한이나 비움이 필요한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잘못된 형태의 오만한 인간의 힘 즉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우월주의라고 이름 붙이는 형태다. 새라 코클리는 모든 양육은 모성적이고 모든 잘못된 권력 다툼은 남성적인가? 물은 뒤 확실히 아니라 답한다. 물론 이런 젠더적 연관성은 우리 문화에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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