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삶의 의미 (알프레드 아들러 作, 최호영 譯)
‘모든 문제의 열쇠는 관계에 있다’
정신분석이라는 개념으로 근대적 의미의 심리학만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에 걸쳐 사상적 화두를 던진 프로이트와 그에 뒤질세라 스승(?)의 어깨 위에 올라선 분석심리의 거장 칼 융이라는 두 그루의 거목에 가려 국내에서 알프레드 아들러의 위치는 전공자 이외에는 이름조차 서먹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지난 2014년 일본의 아들리안(아들러학파를 일컫는 호칭)인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 받을 용기’가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그의 이름도 한바탕 큰 유행이 됐다.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이다. 근대 심리학의 소위 ‘삼대장’인 프로이트, 융, 아들러는 서로 애증의 관계로 유럽의 ‘마음’이라는 키워드를 파문을 그렸다. 시기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 마르크스가 ‘유물론’으로, 좀 더 올라가 찰스 다윈이 ‘진화론’으로 20세기라는 ‘혼돈의 카오스’를 열어젖힌 이 시기의 유럽은 온갖 천재들의 활약 속에서도 세계대전의 씨앗이 잉태되던 모순의 시절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아들러는 수레에 몇 차례나 받친 적이 있었고 홍역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동생을 병을 잃은 후에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을 혁명적이고 불순한 프로이트의 강연에 빠져, 그의 문하에 들어가 ‘빈 정신분석학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게 된다. 프로이트의 저서인 ‘꿈의 해석’을 서평을 할 정도의 사이었으나, 1912년 프로이트의 이론, 특히 낯선 이들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었을 세상의 거의 모든 인간사를 ‘성적충동’으로 몰아가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설에 반대해 자신만의 사상을 ‘개인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펼치게 된다. 그 덕에 성적 주제에 있어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교육자, 종교인들에게 그의 새로운 심리학은 환영을 받는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사상은 심리학 보다 교육학에서 더 관심 있게 다뤄지기도 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빈에서 정신병원을 시작했으나 나치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장악한 뒤로 유대인인 아들러의 병원은 강제 폐쇄된다. 1934년에 다행히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1937년 5월, 강연을 위해 방문한 스코틀랜드의 에버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아들러의 주된 관심은 병약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나, 우월함과 권력의 추구, 육체적 허약함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출생순위에 따른 성격의 형성 등이었으며, 프로이트의 환원적인 관점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목적론적인 방향을 지향했다.
이번에 출간된 ‘아들러 삶의 의미’는 그 누구의 시각이 아닌 아들러 본인의 사상이 그대로 담긴 만년의 저작(1933년 출간)을 독일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전문가인 최호영 박사가 옮겼다는 것에 그 미덕이 담겨있다. 간혹 거장의 저작임에도 비전공자의 ‘발 번역’으로 책의 품격이 반감되는 일이 종종 있는 터였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만족스럽다.
역시 같은 유태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인간의 심리를 차분하게 그린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이자, ‘의미치료(로고테라피)’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삶의 의미’에 대한 아들러의 천착은 ‘일(공동체 생활), 사랑, 관계’의 세 가지 키워드로 삶의 의미를 풀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오래전부터 나는 삶의 모든 과제를 공동체 생활, 노동, 사랑의 세 문제로 크게 분류해 왔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우연히 제기된 물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언가를 재촉하고 요구하면서 어떤 탈출도 허락하지 않은 채 늘 우리 앞에 놓인 물음이다. 이 세 물음에 대한 우리의 모든 반응은 우리가 우리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내놓는 답변이다.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세 문제 모두 제대로 해결하려면 공동체 감정이 상당한 정도로 필요하다는 점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 물음에 대한 입장을 통해 각 개인의 생활양식이 어느 정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본문 43쪽)
아들러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노동’이라고 한다. 노동은 인간의 열등감을 감소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중국 선종(禪宗)의 거장인 백장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스스로 노구를 이끌고 죽는 순간까지 승려들과 함께 일을 했다고 한다. 백장에게 있어 노동은 자신이 공동체에 ‘기생’하는 부수적 존재가 아니라 온 삶을 도(道)와 일치시킨 독립된 존재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해주는 또 하나의 수행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들러가 강조한 노동은 자신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
또 하나의 조건은 사랑이다. 반려자와의 안정적인 결합은 무엇보다 강력하게 삶을 지탱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아들러가 이 책에게 가장 크게 주목한 것은 관계(공동체)이다. 한 인간의 열등감, 고독, 우울증 등 주된 부정적 심리상태가 공동체의식을 키우는 과정에서 보이는 부작용이라 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는 “우리는 먼 미래에 인류에게 충분한 시간이 허용될 경우, 공동체 감정의 힘이 마침내 외부의 모든 저항을 무찌를 것이라고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다”고 까지 말한다.
특히 아들러는 한 인간이 아동기에 느끼게 되는 열등감은 정신병적 현상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동기부여를 제공하고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며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당대 부모의 양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그는 아동이 공동체 감정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네 가지 요소로 ‘신체적 소질의 결함과 약점, 방치와 관심부족, 권위주의적인 강제와 가혹한 예속, 부모의 응석받이 또는 과잉보호’로 꼽았다. 이러한 문제가 아이로 하여금 공동체의 미덕인 협동 또는 공존하지 못하는 기생적 존재로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더 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대책 없는 아포리즘의 끈 구름잡기식의 장광설이나, 사람의 상처를 무자비하게 도려내는 독설이 아닌 냉정한 진단과 구체적 처방이 담긴 ‘아들러 삶의 의미’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엔 백여 년 전 활약한 그의 지혜를 왜 지금 세대가 다시 소환됐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