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얼굴 같은 아빠의 감정을 꼼짝없이 마주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16p
저자가 알지 못하던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된 날, 그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연약한 민낯을 살짝 드러낸다. 그런데 그 날, 아버지의 한 마디 "양씨 집안 여자들은 불행했다"는 말. 그녀 역시 양씨 집안 여자였기에 술 취한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모는 왜 자살했던 것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지금껏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것인지.
당연하게 불행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양씨 집안의 여자들은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고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고모의 서사는 달라질 것이다. 27p
저자는 고모의 서사를 그저 '불행'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을 지도 모르는 고모의 서사를 듣기로 한다. 어떤 일들은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니까. 저자는 아버지가 '불행했던 양씨집안 여자들' 중 하나로 남겨둔 고모의 이야기를 따라가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기를 바랐다.
애도될 수 있는 죽음과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죽음과 삶이 그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들은 모두 누군가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관리되지 않은 무덤과, 공원으로 조성되어 관리되는 무덤. 누군가가 계속해서 찾아오는 무덤과,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 삶이 저마다 다르듯 죽음도 결코 똑같은 모양은 아니다. 163p
이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은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모셨던 첫 고인은 아주 어린아기였다. 시설에서 지내다가 영유아돌연사로 죽은 아이였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설에선 아이가 입던 내복과 양말을 보내왔고 씻기고 입히는 건 너무 금방 끝났다. 입관이랄 것도 없었다. 다음 고인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는데 이 아이는 가족이 있었다. 입관실 복도에 가족들이 미리 와서 울고 있었다. 새로 마련한 이불에, 인형에.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아팠었다. 나중에야 그게 슬픔임을 알았다.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도 그랬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력하게 태어난다. 주어지는 것들을 가지고 삶의 초반부를 꾸려나갈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주어지는 것들이 너무 초라해 삶도 초라하다. 그것조차도 채 누리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마음이 아팠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던 것은 삶에서 애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본능적으로 삶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죽었고, 잊혀져야 했던 고모의 삶을 애도해나가고 있었다. 그를 통해 고모와 같은 양씨 여자인 자신의 삶에 비어있는 어떤 것들을 더듬고 있었다.
윤심덕은 노래로라도 기억될 수 있지만, 고모는 남긴 것이 없었다. 문득 <양양>이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164-165p
사의 찬미로 알려진 윤심덕의 죽음. 남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윤심덕에게 노래가 없었다면 누가 윤심덕을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저자는 고모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지만 고모가 남긴 것을 찾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런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양양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자는 고모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면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고모가 남기지 못한 어떤 것을 양양을 통해 남기는 일.
화목하고 밝은 집 안에 자리한 이질적인 방, 누가 열어 보지 못하도록 꼭 잠겨 있던 방,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죽음이 잠든 방. 그 방에는 혜자 이모가 있고, 주디스가 있고, 엄마가 있다. 조용히 사라진 존재들이 잠들어 있다. 169p
지금까지의 가족의 시간 속에서 지워져야만 했던 이름,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 이름, 지영이었다. 그 이름을 지우는 데에는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지만, 사라진 이름이 다시 새겨지고 드러나는 데에는 몇 배 이상의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다. 자살했다는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질문조차 박탈당했던 이름의 귀환이었다. 마치 나와 손을 맞잡은 것처럼 내 이름 옆에 고모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기뻤다. 지영과 주연. 그 네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184-185p
아리고 쓰렸다. '지영' 두 글자를 새기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과 많은 고민이 필요했던 것이. 시대 속에 그녀의 삶이나 죽음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 되었어야만 했던 것이. 만나본 적 없는 조카가 이렇게까지 고모의 흔적을 더듬었던 데에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 불행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
고모를 알아 갔던 특별한 여정을 통해 저는 사라질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저와 그녀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더 가까워지면 좋겠네요.
고모 이야기가 그 시작이 되길 바라며,
당신을 그리워하는 조카 주연. 196-197p
화목한 가정, 밝은 세상 속 방 한 칸에 가두어져 있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애도되지 못한 존재들. 저자는 고모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공감할 수 없는 세상이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모에게 편지를 띄운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
뮤리엘 루카이저, <케테 콜비츠> 중 199p
세상은 좀 터져도 된다. 많은 여성들의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기를. 그래서 세상이 좀 터지고 확장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