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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소파와 까마귀
  • 쓰는 몸으로 살기
  • 김진해
  • 18,000원 (10%1,000)
  • 2025-09-30
  • : 11,360

글쓰기는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입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어 주세요.' 글은 독자와 공명하고 싶을 때 하는 작업입니다. (중략)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곡진하게, 간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얘기만 퍼붓는 사람은 거북합니다. 끝까지 듣기도 어렵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상태를 살피면서 써야 합니다. 16-17p

일기 외에 글을 써본 적이 없던 내게 글을 쓰는 것은 혼잣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자 도통 뭘 써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무거나 자유롭게 써봐주세요, 라는 말을 들어도 써달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때와 달리 써지지 않았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가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라면 납득이 되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고 또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험은 생경하다. 일기는 혼잣말이기 때문에 자리에 앉자마자 내 얘기만 퍼붓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익숙하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고 찾아 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은 그 글이 나에게 와 닿았다는 뜻입니다.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겠고요. 17-18p

그러나 이어 저자는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 이야기한다. 결국 내가 일기를 쓰는 것도 어쩌면 나 자신에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다면 나 자신에게라도.

글은 연속적이고 뒤엉킨(미분화된) 세계에서 어떤 것은 언급하고 어떤 것은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편집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입니다. 24p

예전에 일기를 썼던 것을 돌이켜보면 일기라기보다 일지에 가까웠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이기에, 최대한 기억이 편집 작업을 많이 진행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각자 편집된 기억으로 다투고 상처를 주고받는 게 싫었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써왔던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록해왔던 사람이 아닐까.

주제와 글감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습니다. 글감이 따로 있고 주제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동시적입니다. 글감 안에 주제가 말하고, 주제 안에서 글감이 제 빛을 냅니다. 47p

어떤 게 나은 구성일까요? 저는 제가 선택한 구성이 제일 좋더군요. '이게 제일 좋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그게 좋은 겁니다. '아직 덜된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아직 덜된 겁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81p

유일한 문장은 없습니다. 최후의 문장도 없습니다. 그저 쓸 뿐. 92p

막연하게 글을 써보고 싶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만 있던 찰나에 이렇게 친절한 글쓰기 책이라니. 저자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글 쓰는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한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써도 되고, 그저 써보라고.

이렇게 번역은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107p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역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의 언어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첫 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나의 첫 눈과 상대방의 첫 눈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언어는 고유하고 유일하다. 그래서 서로의 말을 나의 말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서 저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 맞지 않는 지가 갈리는 것 같다.

길게 쓴 문장은 선물을 정성껏 감싼 포장 같습니다. 매번 그러면 실속 없는 겉치레가 되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주머니에서 덜렁 목걸이만을 꺼내 주지는 않습니다. 포장을 뜯을 때 갖게 되는 기대감과 궁금증을 함께 선물하는 겁니다. 그럴 때 곱게 싼 포장은 선물의 일부입니다.

문장을 길게 쓴다는 것은 필요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덕지덕지 붙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둘러싼 시공간, 전후 상황, 동시적 상황, 여러 사건 중에서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를 한 문장에 담는다는 뜻입니다.

(중략) 길게 쓴 문장은 하나의 사건을 곧바로 말하지 않고, 그것과 연결된 사건을 일부러 함께 보여줌으로써 벌어진 사건을 단순화하지 않고 장면을 쉽게 넘기지 않게 만듭니다. 그 장면에 좀 더 머물라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손목을 잡습니다. 글은 독자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문장을 길게 쓰는 것도 익혀봄직합니다. 129-130p

문장을 길게 쓰는 편이다. 간결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알지만 쓰다보면 문장이 길어져 고민이었는데 이 대목에서 위안이 되었다. 간결한 문장도, 긴 문장도 나름의 멋과 맛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보다 그냥 먼저 써보는 게 좋다고 저자는 꾸준히 이야기한다.

글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세계를 감각하기 위한 집요함'이라는 것. 136p

글이 할 일과 생각이 할 일을 분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입니다. 글이야말로 여러분의 삶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뿌옇게 뒤엉킨 생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글이 할 일에 여러분의 생각이 간섭하지 않도록 하세요. 생각은 진부합니다. 그러니 글쓰기 실력을 높이려면 무조건 초고를 빨리 써야 합니다. 156-157p

정말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 너무 명쾌하다.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 여기서 중요한 걸 놓쳤습니다. 바로 '무당집'자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무당집이 기억난다면, 그건 글쓴이에게 중요한 글감이었겠죠. 그런데 '무당이 사는 집이 있었다' '지날 때마다 기웃거렸다' '굿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고만 하면, 독자는 그 집을 실감 나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중략) 물론 모든 문장에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사로잡은 글감에 대해서는 장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183-184p

이 부분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간결해야 하는 것은 간결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은 과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았는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콕 짚어야 하는 부분들은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편안하게 읽힌다는 것이 불편하고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 쉬운 것만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저자가 몸으로 부딪치며 얻어낸 중요한 부분들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

'평정심'은 우리가 추구할 이상적인 상태일 뿐입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리는 감정 자체입니다. 감정과 함께 감정과 싸우면서 삽니다. 사실이나 사건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실과 사건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싸우는 겁니다. 225p

간지럽히는 손가락이 웃으면 안 됩니다. 간지럽힘 당하는 옆구리가 웃어야 합니다. 227p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깊고도 흥미로운 삶을 자신의 내부에서 창조해보고픈 욕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309p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저자가 인간적인 매력과 여유가 넘치는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쓰는 몸으로 살자는 치열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편안하고 유머러스하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니. 도서평론가 이권우 님이 추천사에서 말하듯 방황과 모색의 시간 없이 바로 '쓰는 몸'을 갖추게 해주는 글쓰기 책이다. 정말 저자는 단아하고 명징하고, 진지하고 능청맞으며 부드럽게 성찰하지만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글쓰기도 잘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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