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현실을 감내하면서도, 노예들은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의지를 발휘해 다양한 방식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가장 먼저 실행했던 선택지는 단연 도망치는 것이었다. 물론 도망치다 붙잡히면 가혹한 처벌을 받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이 컸지만, 많은 이들이 그 위험을 감수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이라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87p
「설탕전쟁」 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고진감래였다. 쓰디쓴 고생 끝에 달콤한 즐거움이 온다는 사자성어이다. 그러나 쓰디쓴 고생을 하는 이들과 달콤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들이 같지 않았기에, 나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아간다'는 속담을 함께 떠올려야 했다. 설탕을 얻는 게 이리 고된 일인 지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저 마트에 가서 덜렁 집어들고 값을 치르면 되는 것인 줄 알았지,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그것을 수확해 즙이 마르기 전 짜내어 끓이고 자갈같은 설탕결정체를 만들어내는 수고를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것을 좋아하고 꿈꾸는 것을 이상주의자라고 부른다면 나는 이상주의자이다. 세상의 불공평함과 불공정함을 뼈저리게 알지만 그래도 내가 권한 가지고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공평하고 공정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누군가의 삶이 타인의 삶을 위해 도구처럼 소모되지 않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앞서간 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진 21세기의 세상에도 가난한 자들, 권력 없는 자들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편안함을 위해 자진해서 도구가 되어 소모되며 삶을 연명해나가야 한다.
설탕의 역사가 노예의 역사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설탕전쟁이 설탕을 확보하고자 하는 나라들끼리의 전쟁일까 어렴풋이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착취당하던 노예들과 착취하고자 하는 이들간에도 질기고 질긴 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이라는 처참한 현실과 절박한 심정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이 생산한 설탕의 달콤함을 그들은 알 수 없었다.
탁 트인 바다라면 어디든 좋다.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네르하 앞 지중해도, 쿠바 바라데로의 카리브해도, 우리나라라면 제주도 모슬포의 푸른 남해도 좋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한 손에는 럼주를 들고 입에는 코히바 시가를 문 채, 바닷빛을 머금은 푸른 연기를 천천히 허공에 날리며 하루 종일 늘어져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이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중략) 쿠바 사탕수수 농장에서 럼이 탄생했듯, 세계 각지의 술들 또한 삶의 깊은 고단함과 눈물 속에서 빚어졌는지도 모른다. 167p
아름다운 해변, 럼주와 코히바 시가,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없는 삶의 고단함과 쓰디쓴 눈물 속에서 빚어진 세계 각지의 술들. 술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었다. 삶을 견디기 위해 일시적으로라도 이지를 흐리게 하고 다 놔버리는 순간들이 필요했던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보레는 설탕을 생산한 첫해에 1만 2000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0만 달러에 달한다. 게다가 이 시기의 설탕은 '백색의 금'으로 불리며 식품 보존제이자 의약품으로까지 그 쓰임이 넓어지고 있었다.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해 자본가의 상징이 된 보레는, 이후 정치에 입문해 뉴올리언스 시장이 되기도 했다. 201p
‘백색의 금’이라 불린 설탕은 한순간에 사람들을 자본가와 권력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 부와 명예는 수많은 노예들의 땀과 희생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노예들의 고통으로 보레는 뉴올리언스 시장이 되기도 하고 자본가의 상징으로 이름을 남겼다. 노예들의 고통 끝에 그에게 달콤한 부와 명예가 함께 했다. 가슴에 턱, 하고 무거운 바윗돌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삶이 보레보다는 노예들쪽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묵묵히 참고 견뎌냈더니 달콤한 백색의 금은 커녕 채찍질이 날아오는, 참고 견딜 것 조차 없었던 이가 달콤한 보상을 얻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비참한 삶.
한편, 미국에서는 목화와 설탕이 기존의 담배나 커피를 제치고 미국 남부의 양대 산업으로 부상하며 초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면기cotton gin(목화에서 씨앗을 효율적으로 분리하는 기계)'가 발명되어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노동력 수요 또한 급증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의 노예제 폐지 움직임으로 노예 수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미국은 결국 많은 노예를 밀수입하기에 이른다. 자연히 노예의 가격은 급등했고, 이로 인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212p
미국의 흑인노예, 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목화밭이 떠오르는데 설탕 역시 미국 남부의 양대산업으로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이 구절에서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한껏 찡그리게 됐다. 그들이 얼마나 착취당했을 것이며 얼마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을 것인가.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그들은 얼마나 울어버린 뒤에야 눈물도 메말라버렸을 것인가. 그들의 삶에 즐거운 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 장르인 재즈, 블루스, 리듬 앤드 블루스, 로큰롤은 모두 목화밭이 있던 미국 남부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자주 즐겨 듣는 이 음악들은 수백 년 전 흑인 노예들의 고통과 맞닿아 있다. 213p
오늘날 전 세계인이 즐기는 재즈와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 이 모든 음악이 흑인 노예들의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노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역시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듣고 즐기는 음악조차 사실은 수백 년 전 고통받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을 다시금 곱씹어본다. 쓰디쓰게 고생한 이들이 달콤한 즐거움을 누리는 세상이 언젠가는 오고 말까? 요즘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걱정하던데 너무 똑똑해진 아이들은 이미 알아버린 게 아닐까? 그야말로 설탕전쟁이다. 감래하기 위해 열심히 고진하고는 있지만, 이 전쟁에 이길 자신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쓴 웃음이 난다. 왠지 모르게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노래 한 곡 불러야 할 것 같은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