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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sc0723님의 서재
  • 키르케 (리커버 특별판)
  • 매들린 밀러
  • 15,300원 (10%850)
  • 2021-04-05
  • : 17,309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키르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신입니다. 동시에 서양 문학에서 등장한 최초의 마녀죠. ‘마녀’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정체 모를 것들이 담긴 솥을 휘젓는 할머니? 온갖 마법을 다루는 여성 캐릭터? <키르케>에서 말하는 마녀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한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 그들을 ‘마녀’라고 부릅니다.

주인공 키르케는 조금은 흐릿한 신입니다. 목소리가 인간과 같고 외모에는 신의 위용이 담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변 신들은 그녀에게 상처를 줍니다. 시간이 지나 약초와 주문을 다루는 그녀의 능력이 발휘되지만, 아버지 헬리오스는 그녀의 능력이 제우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까 두려워 키르케를 아이아이에 섬으로 영구히 추방시키죠.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 오지만 키르케는 자신의 운명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습니다. 

신들의 계획을 듣고 자포자기하며 운명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신들을 막아냅니다. 아들 텔레고노스를 지키기 위해 신들이 섬에 접근할 수 없도록 주문을 걸고,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 트리곤의 시험을 통과하여 그의 꼬리를 빌려와 무기로 사용합니다. 괴물이 되어 사람을 해치던 스킬라를 죽여 자신이 저질렀던 일을 스스로 매듭짓기도 하죠. 인간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아테나나 유희 거리로 여기는 헤르메스와 달리 인간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오히려 인간들의 운명을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키르케가 스스로 정한 운명 중에서도 단연 가장 강렬했던 선택은 신의 위치를 포기한 것입니다. 신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키르케에게는 죽지 못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사랑했던 인간들이 죽어 과거의 역사가 되어도 키르케는 그들이 없는 현재를 살아가야 합니다. 신은 죽지 않아 저승에 갈 수도 없으니 정말 만날 방법이 없었죠. 허무함과 슬픔이 쌓이며 시들어 갑니다. 키르케는 이런 영원이란 굴레에 갇혀 힘자랑만 하는 신들을 가리켜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500p)합니다.

그렇게 키르케는 마지막에는 인간이 되기 위해 수액이 담긴 사발을 마시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죠. 스스로 신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키르케는 불로불사의 능력을 잃겠지만 더욱 생기 넘치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키르케를 마녀로 만들어준 진짜 능력은 약초와 주문을 다루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태도일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키르케와 같은 마녀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주 간절하게 마녀라는 말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게 되고, 또 그것이 당연한 사회가 된다면 마녀라는 단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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