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가 별을 보지 않는다니, 모든 일과 생각이 별에서 시작해 별에서 끝날 것만 같은 그들이 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지 않는 걸까요. 제목에 홀린 듯 이끌려 주문 버튼을 눌렀습니다.
책을 끝까지 읽고 그 이유를 알고 나니 강윤정 편집자의 『문학책 만드는 법』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환상을 들춰낸 뒤 조금은 허름하고, 조금은 때가 탄 현실을 마주했을 때의 그 기분이요. 천문학자는 그리 낭만적이기만 한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보기는커녕 달빛도 잘 들지 않는 연구실에 앉아 별 대신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도록 쳐다봅니다. 그들의 손은 망원경을 조작하는 시간보다 자판을 눌러 분석한 자료를 정리하고 코딩하는 시간이 더 많죠.
천문학자인 심채경은 천문학자 자체가 희귀한 대한민국 천문학계에서도 분명 유의미하고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해내지만, 삶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대학원생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자료가 우주와 별에 관한 것이라는 것만이 이들을 천문학자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몇 안 되는 구분점입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지만, 누군가 인문학을 왜 공부해야 하냐고 물으면 설명하실 수 있나요? 한동안 인문학 열풍이 불었었지만 정작 그것이 왜 필요한지 아는 사람은 거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기 시작한 할머니를 인터뷰한 에피소드를 다룬 꼭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시를 쓰고 뭐가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이제 들국화 냄새도 맡아보고 돌멩이도 들춰보게 됐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들국화라는 존재를 모르지도 않았고, 돌을 처음 본 것도 아니셨죠. 이전에도 분명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시를 배우며 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금 바라보시게 되셨죠. 인문학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 시선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심채경에게 천문학은 인문학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 온갖 것에서 시의 소재를 찾거나 혹은 자연스레 보이는 것처럼 심채경은 세상 온갖 것에서 우주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를 읽을 때면 소행성의 자전을 떠올렸고, 딸이 유치원에서 배워온 노래를 들을 때면 우주로 떠난 관측선 보이저호를 떠올렸죠. 별을 직접 보지 않았을 뿐, 항상 주변의 무언가를 통해 우주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텍스트 너머로 본 심채경이란 사람의 삶에서, 천문학은 마치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문의 윗부분에 쌓인 먼지처럼 그녀 주변의 모든 것에서 한 움큼씩 묻어나옵니다. 저는 이것이 에세이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인문사회과학 도서처럼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장르도 아니고, 문학처럼 흥미로운 전개나 아름다운 문장이 중심인 장르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서 무엇이 묻어나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경험하며 내 시선을 더욱 두텁고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겠죠.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가 다른 분들의 시선도 풍성하게 만들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