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당연하게 진리라고 부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지식 연대를 결정하는 상징들의 문맥 밖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기호란 서로 내포되거나 구별되는 방식일 뿐이기 때문에 의미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기호의 구조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호한 상대주의라는 씁쓸한 위로를 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같은 진행 과정 하나하나가 바로 하나의 진리이며, 미래의 보다 포괄적인 진리 속에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라는 것은, 사유에 적합한 단어를 찾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문장이 옮기려고 애쓰는 일종의 관념적인 텍스트로서 존재하고 있다. 작가마저도 자신의 작품과 비교할 만한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신이 사용한 것보다 앞서는 어떤 언어도 알지 못한다.
만약 언어가 원본 텍스트의 번역이나 암호화된 이본異本이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우리는 완벽한 표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될 것이고, 결국 모든 언어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소위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어는 사유를 복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해체되었다가 사유에 의해 다시 결합될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치 발자국이 몸의 움직임과 노력을 반영하듯, 언어는 사유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기성 언어의 경험적 활용과 창조적 사용은 구별해야 한다. 경험적인 활용은 창조적 사용의 결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