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복더위에 찾는 시원한 맥주처럼 쿨하고 통쾌한 책
“빌어먹을! 사는 게 이런 거라고 왜 지금까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은 거야!”사노라면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세상은 지랄같고, 내 뜻대로 되는 건 별로 없고, 인간들은 모두 제멋대로이고, 결정적으로 인생이 그렇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될 때.
이 책에 나오듯 우리는 언제“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진정으로 외치고 행동할 수 있을까? 반항에 찬 중2병에 걸린 소년이 그렇게 외친다고 될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연륜과 경험이 쌓이면 가능할가?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린 연륜과 경험이 차고 넘치는 나쁜‘꼰대’들을 너무 많이 본다. 경험과 더불어 우리에겐 책이, 생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줄 진짜 책이 필요하다. 거기에 읽는 재미까지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인 책.
과학자가 들려주는 솔직하고 유머넘치는 책과 인생 이야기
“책을 읽으며 나는 깨달았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의무, 역할, 사랑, 가족, 여성, 남성처럼 한 단어로 명료하게 정의되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규칙은 과연 누가 정하며,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이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걸까? 계속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만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음을 나는 새삼 느꼈다. 설령 안내된 포장도로 대신에 맨발로 자갈길을 밟게 된다 해도, 그것은 내가 찾은 나의 길일 터였다.”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 쯤은 저런 질문들을 품게 된다.당연한 줄 알았던게 당연한게 아니고, 행복과 성공이 노력과 능력에 비례하지도 않으며, 내가 ‘나’라고 알았던 많은 것들도 알고 보니 진짜 ‘나’가 전혀 아니고, 그럴 때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누가, 무엇이 문제였는지 질문하게 된다. 아니, 세상과 삶의 규칙에 관해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하더라도 막상 행동으로, “맨발로 자갈길을 밟게”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걸 씁쓸하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용기부족이나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를 대면서.
사실 소설이야말로 그런 인생살이의 어긋남, 어리석음, 잘못된 선택이 가져오는 희비극들로 넘쳐나지 않던가? 소설 캐릭터들은 일종의 인생 반면교사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작가는 소설 작품속의 캐릭터와 자신의 경험을 병행하며 씨줄날줄 참으로 재미있고 냉철하게 단 한번 뿐인 생의 행해 과정에서 직면하는 요지경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다.
흔히 과학자는 물질계를 연구하고 인문학자는 인간과 사회를 탐구한다고, 그런 식으로 구분하곤 한다. 일면 타당하지만, 과학자라고 해서 삶을 살지 않는 건 아니고, 인문학자라고 해서 과학과 기술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에 무관할 순 없는게 21세기라는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더욱이 작가가 어린시절 꿈을 바꾸도록 했다고 하는 칼 세이건처럼 훌륭한 과학자들일수록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깊은 학식도 갖추고 있고 글도 뛰어나게 잘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칼 세이건은 우주 코스모스를 다루었다면 작가는 인생이라는 또다른 코스모스를 다룬 것 같은데, 과학자이면서도 이처럼 인문학과 문학에 대한 예리하고 깊은 식견을 갖고 있다는게 놀랍다.
과학자의 글이라 딱딱할지도 모른다는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자답게 객관적이고 냉철하면서도 시종 유머와 감칠나는 흥미로운 표현들이 물흐르듯 계속 이어지고 있어, 그 반전매력에 더 놀라게 된다.나는 그 유명한, 야한 소설로 잘못 소문난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고 실망한 작가의 표현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프랑스 여교수 얼굴에도 육포를 던져 버리고 싶다....여성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체향과 문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은 정말로 드물다.”
“그나저나 왜 남자는 여자가 근육남을 좋아하리라 생각할까? 빨래판 복근이나 역삼각형 상체가 페니스의 능력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닌데.”
“인구가 70억이 넘었고 조만간 100억에 육박하리라고 예견되는 오늘날까지도, 지구를 사랑하는 차원에서 섹스를 줄이자는 고귀한 환경윤리는 아직 제안된 적이 없다.”
사실 이 책이 가진 커다란 장점을 들라면, 무엇보다 깜짝 놀랄 정도로 솔직하고 과감하다는 데 있다. 새침떼기처럼 이것저것 감추고, 고상한 척, 우아한 척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한다. 도발적이랄까, 직설적이랄까. 작가 자신이 말한대로 “체향과 문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제 1 부 <사랑이 정말 이런 건줄 알았더라면>에 나오는 꼭지 제목이「페미니스트지만 섹스는 하고 싶어」라서 더 호기심을 끌었는데, 읽으면서 포복졸도했다.
한국의 여성작가가 쓴 어떤 책에서도 이렇게 솔직하고 재미있는 속내이야기를 들어보기란, 거의 어렵다.
“여성 작가 중에 에리카 종보다 솔직한 작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특히 한국 여성 작가는 섹스라고는 관심도 없고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처럼, 이념에만 치중해서 사회 운동가인 양, 성차별에 관한 리포트를 엮어 책으로 쓴다. 혹은 감상에 흠뻑 젖은 낭만적인 문장들을 아름다워 보이게 모아서 치장하여 책을 만들거나. 때때로 나는 궁금하다. 과연 그녀들은 젖어드는 보지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녀들의 보지는 어떻게 이렇게나 철저히 침묵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한국 여성들이 지긋지긋해 하며 타파해야만 하다고 주장하는 유교문화는 여성이 쓴 책에도 모두 스며들어 있는 셈이다.”
당연하지 않게, 힘들더라도 나만의 삶을 살려면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작가는 책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인생의 요지경 속 같은 코스모스에서 매일매일 부닥치고, 우리를 울고 웃고 행복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 섹스, 결혼생활, 여성으로 사는 것, 행복 등등 모두.
이 모든 주제들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식견이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분명 각 장마다 문학작품이나 책을 다루고 있음에도, 읽지 않은 책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술술 잘 읽힌다는 점이다. 그래서 독서에세이라기 보단 그냥 작가 자신의 이야기들을 살짝 문학작품을 빌려 대신 말하게 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오히려 다음번엔 작가 자신의 이야기만을 담은 에세이를 내면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고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도 너무 많아 오히려 밑줄 긋기를 자제해야 한다. 특히 사랑과 결혼, 섹스, 남자와 여자의 차이 등에 관한 얘기들은 시니컬하면서도 정곡을 콕 찌르는 듯한 문장들로 읽는 독자들을 통쾌하게 만든다.
“결혼이야말로‘사랑과 섹스 최악의 조합’이리라. 사랑하는 상대와 환상적인 섹스를 지속하고 싶은 소망이 결혼으로 표출되지만, 그건 19세기 소설 속에나 있는 허구일 뿐이고, 현실에서 막상 결혼이란 걸 하고 나면 둘 다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지 않나.”
“영원한 사랑도, 환상적 섹스도 없다. 두근대는 가슴으로 도착한 택배상자를 열어보니 벽돌 한 장만 덜렁 들어 있더라는 휴대폰 거래처럼, 소문만 요란했지 정작 내용을 들여다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마치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읽는듯한 문장들이다. 쇼펜하우어도 말했다. 사랑과 결혼은 그저 종의 의지에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는 것이지, 정작 당사자들의 행불행 따위엔 관심도 없다고. 작가 역시 홈 스위트 홈이나 달달한 사랑의 달콤함 같은 건 꿈에서나 가능한 환상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결국 작가가 바라보는 인생이라는 이 작은 코스모스의 풍경은 칼세이건이 우주를 보면서 느낀 아름답고 경이로운 풍경이라기 보단, 오히려 쓸쓸적막 자체인, 고독한 늦가을 풍경을 더 닮은 듯 하다.
“삶은 살아내는 실존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되었고, 그런 삶조차도 단 한 번, 오직 한 번이 전부라는 가혹한 진실. 리허설도 미리 보기도 생략된 채 느닷없이 던져진분이고, 삶에서 언뜻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도 곰곰이 따지고 보면 우연의 겹침과 접힘일 뿐이고 소설 <농담>처럼 사소한 에피소드가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최대의 무게있는 선택으로 자라나 호되게 뒤통수를 치는 날도 있으니 이러한 삶의 외줄타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헛웃음을 짓는 정도가 아닐까?”
그럼 누구나 꿈꾸는 ‘행복의 정복’이란 불가능한 걸까? 우리가 삶을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그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과학에대한 열정? 예술에 대한 열정? 혹은 사랑? 그게 무엇이든, 작가는 열정만이 이 씁쓸한 삶에서 큰 기대는 없다할 지라도 우리가 삶을 살아갈 동기와 힘이 되어준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열정있는 삶이 행복의 비결이 아닐까? 열정을 쏟아 점점 더 완성하고픈 대상이 있다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그 무엇, 평생을 바쳐 창조하고픈 그 무엇이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운이 좋다면 기꺼이 노력하는 동안에 성취감과 행복도 덤으로 따라올 수 있으리라....설사 행복이 가득하진 않더라도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후회는 없지 않을까.”
열정. 작가가 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마침내 얻어낸 그것.“인간은 심장과 맞닿아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인생’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없다.”그래서 작가는 책 속에 나오는 <나이트우드>라는 소설의 대사를 빌어 말한다.“삶이란 손수 발명할 때 비로소 제 고유의 삶이 되기 마련이죠.”
어떻게 해야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손수 발명할 수 있을까? 열정을 바칠 대상은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열정만 있으면 될까? 그건 독자들이 직접 이 책을 통해 작가와 대화를 해봐야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오랜만에 마치 한 여름 복더위에 지쳐 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한 잔 들이킨 듯한, 쿨하고 통쾌한 책을 만난 것 같다. 이 책을 모두 읽고난 후에 드는 생각은 한 마디로 ‘간만에 진실한 목소리를 내는 멋진 작가’를 만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