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시대의 중국 -사토 마사루-
1949년 건국을 선포한지 60여 년 만에 세계경제를 호령하는 강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지난 30년간 유지해온 ‘도광양회韜光養晦(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운다)’ 정책에서 ‘저우추취走出去(대외진출)’를 장려하며 본격적으로 세계무대를 향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과거 ‘시장과 기술의 교환’ 정책을 통해 육성한 자동차산업과 중화학산업, 합자기업 설립을 모태로 기술 모방 전략을 도입했던 가전산업과 IT산업은 이미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 주도로 추진된 신에너지 산업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했다.
현재 실행 중인 ‘제13차 5개년 개발계획(12·5 규획)’에서는 2030년까지 중국 경제를 견인할 에너지, 정보기술, 바이오 등 7대 산업에 대한 로드맵과 투자방안을 구체화시키며 미래 중국의 모습을 단계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제1세대 지도자인 마오쩌둥을 시작으로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를 거쳐 5세대 지도자에 오를 시진핑은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실용주의’와 ‘현장 중시’ 철학을 기반으로 정치적 이념보다는 지역 경제 발전과 부의 재분배를 통해 계층 간의 마찰을 최소화하고 국민 정서 융합에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정부 관료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젊고 근면하며 중산층을 중시하는 검증된 정치인을 지도부에 등용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와 같이 역사적 당위성을 운영하는 ‘중국식 사회주의’ 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실현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경제 부문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만성적 인플레이션은 서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키고 규모 산정조차 힘든 지방정부의 부채는 부동산 버블의 뇌관을 자극한다. 기업 생산력을 저해하는 전력 부족 현상은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한편 서남부 지역에서 반복되는 자연 재해는 해마다 주요 식품 가격 폭등을 견인한다.
중국의 경제와 사회 상황, 안보 환경, 국제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고, 중국의 행동 원리를 분석해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경제성장과 정계의 파벌 싸움, 공산당의 현안 대처 능력, 대미관계 등을 변수로 한 방정식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행동이 100퍼센트 심모원려의 책략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때로는 내부의 노선 대립에서 나온 결과물일 뿐이다.
중국은 거대한 코끼리다. 코에 상처를 입어도 다리를 다쳐도 거대한 몸의 일부가 아플 뿐 전체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 중국 문제를 분석할 때 특정된 분야만 보는 부분 균형 분석에서는 옳을지 몰라도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일반 균형 분석으로는 최적이 아닌 경우가 있다. 중국 연구는 부분 균형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 책은 정치부 기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중국의 정치체제 분석’이다.
중국 모델은 유지될 것인가 -공산당의 강점과 약점-
류샤오보의 예언 -인터넷 민주혁명의 싹-
통치기구의 민주화보다 인권 보장이 먼저
중국 정부는 인해전술을 통해 ‘금순공정’이라 불리는 인터넷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 불리한 정보를 규제하는 ‘인터넷 경찰’은 3만 명 혹은 10만 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5모당’이 인터넷 여론 형성을 주도한다. 인터넷에 친정부적 댓글을 한 번 올리는데 5마오(10마오는 1위안)를 받는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이것은 무척 손쉬운 ‘부업’으로, 5모당이 30여만 명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중국에서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도 특별한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이용할 수 없다. 이처럼 공산당과 정부가 인터넷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의 앞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앞으로 중국의 정치, 사회에 불어올 두 가지 ‘조용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첫 번째 요소는 민중, 즉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물결이다.
“당국이 토지 개발을 추진하면서 주민에게 강제 퇴거를 강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거세다. 경찰이 민중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민중운동은 경제적 권익을 지키려는 민간 운동 차원에서 시작됐으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 국민의 알 권리, 환경 보호 등으로 확산될 것이다.”
시진핑 세대에 거는 기대
류샤오보가 두 번째 변화 요소로 지목한 것은 공산당 지도부, 즉 ‘위로부터의’ 민주화 움직임이다.
특히 후진타오 세대에서 ‘포스트 후진타오’ 세대로 최고지도부가 교체되는 점에 주목했다. “2012년 가을에 열리는 제18차 공산당 대회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후진타오 등 ‘제4세대’ 지도자가 받은 교육은 철저히 마오쩌둥 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 리커창, 왕치산, 보시라이 등 ‘제5세대’ 지도자는 후진타오와 다르다. (시진핑 등은) 우리와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교육 받았다.”
그의 희망은 제5세대의 교육 환경과 더불어 세대교체에 따른 정치 구도의 변화에 근거하고 있었다. 류샤오보는 포스트 후진타오 시대가 되면 최고지도자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공산당 간부 사이에서도 권력 투쟁이 발생할 것’이라 예측했다. 권력 투쟁 결과 최고지도부가 분열됨으로써 위로부터의 민주화 움직임이 나타나리라는 기대였다.
“우리 아버지는····” 발언
인터넷이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2010년 10월 중국 인터넷에서 유행어가 된 말이 있다.
“우리 아버지는 리강이다.”
10월 16일 밤 헤베이성 바오딩시의 허베이대학 구내에서 22세의 남자가 음주 운전을 하다가 여학생 2명을 치어 죽게 했다. 그가 경찰에 체포됐을 때 한 말이 바로 “우리아버지는 리강이다”였다. 리강은 국가 수뇌급 인사는 아니다. 바오딩시 베이스구 공안국의 부국장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경찰 간부의 아들임을 내세워 사건을 무마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고 비난이 폭주했다. 인터넷에서 비판의 여론이 확산되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가볍게 처리됐을 것이다,
중국의 네티즌은 2010년 11월 말 현재 4억 5,000만 명에 이른다. 국민의 3분의 1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는 계산이며 보급률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공산당과 정부가 경제 발전의 과실을 ‘당근’ 삼아 국민의 불만을 어느 정도까지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움튼 조용한 민주혁명의 싹은 큰 나무로 자라날 가능성이 높다.
통치의 대차대조표 -‘보이는 손’과 국가자본주의-
중국 공산당은 거버넌스를 ‘집정 능력’이라 부르며 2004년부터 이를 강화해왔다. 2009년 9월 제1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전회)에서는 공산당의 집정 능력을 높이기 위해 ‘당건설의 강화 및 개선에 관한 결정’을 채택했다.
4중전회 폐막 후에 발표한 성명서는 “당내에 새로운 정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의 이념에 맞지 않는 문제가 존재해 당의 결집력과 전투력을 현저히 저하시키고 있다”고 지적한 뒤 ‘공산당 내부의 민주적 발전’. ‘간부 인사제도 개혁’, ‘처벌과 부패 예방’ 등의 처방을 제시했다.
폭넓은 정보 네트워크
중국 모델 거버넌스의 첫 번째 특징은 문제점을 찾아내는 정보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고 치밀하다는 것이다.
우선 기업과 마을 내에서 공산당 조직이 감시 시스템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회사법 제19조는 기업의 공산당 조직 설치를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정보를 수집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2009년 말 기준으로 중국 공산당의 당원 수는 7,799만 5,000명이다. 중국인 17명 가운데 한 명이 공산당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2008년 말에 비해 2.7퍼센트가 늘었고,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공산당원의 신분도 다양해 사회 각계계층에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특히 대졸 이상 고학력의 젊은 층이 빠르게 늘고 있다.
빠른 의사결정 속도
중국 모델 거버넌스의 두 번째 특징은 대응 방안을 기획하고 입안하는 결정 시스템이 당 최고지도부에 집결돼 있다는 것이다.
권한이 집약된 최고지도부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 속도가 빠르다. 일단 결정된 방침에는 모두 이의 없이 따른다.
중국은 장기적 안목에서 정책을 입안한다. 10년 이상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짠다. ‘2020년 전면적 소강(비교적 여유가 있는) 사회 건설’이란 목표를 정한 것은 2002년 10월 제16차 공산당 대회 때였다. 그 연장선에서 5개년 경제 사회 계획을 통해 구체적인 지침을 정한다.
강한 공산당 강한 정부 vs. 허약한 국회
중국 모델 거버넌스의 세 번째 특징은 강력한 정책 실행력이다.
그 비결은 ‘강한 공산당 강한 정부 vs. 허약한 국회’에 있다. 특히 경제정책을 실행할 때 공산당과 정부가 절대 우위에 선다.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의 독립성도 취약하다. 인민은행법 제2조는 “금융정책은 국무원의 지도를 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제3조에서는 ‘통화가치 안정’뿐 아니라 ‘경제성장 촉진’도 금융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성장 촉진이 목적이라면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의 견제자 역할을 할 수 없다. 중국 정부가 고용을 중시하면 금융정책은 경기부양형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 모델 거버넌스의 이 세 가지 특징은 현재로서는 장점이다. 그러나 단점이 되기도 한다. 중국 모델의 안정도는 ‘자산’을 늘리는 집정 능력 강화 속도가 빈부 격차 확대, 관료 부패, 물가 인상, 취직난 등 ‘부채’의 증가 속도를 앞서가는가에 달려 있다. 부채의 증가 속도가 빨라지면 공산당 일당 지배에 노란불이 커지게 된다.
GDP의 미중 역전 -경제의 ‘대중화권’-
2020년 GDP 세계 1위로
중국정부가 제시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개년 계획에 따르면 GDP성장률은 연평균 7퍼센트이며, 2015년 GDP는 55조 위안(약 9,350조 원)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대부분의 예측이 2020년까지 경제성장률을 연평균 7퍼센트로 잡고 있다.
이 예측대로 이루어진다면 인민의 불만은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고 경제문제 때문에 공산당 체제가 붕괴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성장률이 연 5퍼센트 대 아래로 떨어지는 비관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사회 불안정이 확대되고 민주화 움직임이 높아질 공산이 크다.
중국 경제의 루이스 전환점
이 책에서는 중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의 3대 요인인 노동력 증가, 자본축적, 기술 진보 등을 통해 살펴본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1년 사이에 중국의 성장률은 평균 9.9퍼센트였다. 기여도는 기술 진보 54퍼센트, 자본 축적 34퍼센트, 노동력 증가 9퍼센트였다.
먼저 ‘노동력’에 대해 살펴보자. 값싼 농촌 노동력의 도시 이동은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1980년 이후 4반세기 동안 인구의 25퍼센트가 농촌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미국, 유럽, 일본의 도시 인구 비율이 80퍼센트 수준이므로 중국은 앞으로도 도시화가 더 진전될 가능성이 높다.
농촌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한 농민은 도시로 떠나게 되는데, 경제가 발전하면 공업 부문에서도 잉여 노동력이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공업부문에서 완전 고용이 달성되는 시점을 ‘루이스 전환점’이라 부른다.
루이스 전환점을 지나면 노동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노동력 부족 사태에 직면하며 임금이 상승하게 된다. 루이스 전환점은 한 나라의 경제성장 및 공업화 수준을 측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한 자녀 정책’의 영향으로 노동력 인구는 2013년부터 감소 추세로 전환할 것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대졸자가 희망하는 취직자리와 실제 모집하는 직업의 불균형도 확대된다. 노동력이 과잉에서 부족으로 전환되는 루이스 전환점을 맞이하는 지역이 늘어나 임금이 상승하게 된다.
2011년 1월 광둥성 선전시 정부는 법정 최저임금을 향후 5년간 2배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정부 측 경제단체인 중화전국공산업연합회의보고서는 향후 10년 동안 법정 최저인금을 지금의 4배로 올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노동 분배율 향상은 소비 확대로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 기업의 수익을 압박하는 위험요소가 될 것이다.
기술 발전이 핵심
두 번째로 ‘자본 축적’을 살펴보자. 중국의 자본 축적 신장률은 연평균 13퍼센트로 과거 10여 년간 계속 증가해왔다. ‘고저축-고투자’의 결과이며 외국 자본 역시 자본 증가에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시진핑 시대에도 고저축 경향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교육 수준이 높아짐에 따른 인적 자본 수준의 향상으로 2008년에서 2020년 연평균 자본 축적 신장률은 13퍼센트 안팎을 유지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다만 투자에서 소비 주도로 경제 모델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경제성장에 대한 투자의 기여도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 번째로 ‘기술 진보’에 대해 살펴보자. 칭화대학 국정연구센터 후안강 주임은 기술 진보를 포함한 TFP Total Factor Productivity(총요소생산성, 노동생산성뿐 아니라 근로자의 업무능력, 자본 투자 금액, 기술도 등을 복합적으로 반영한 생산 효율성 수치)의 추세가 향후 중국의 경제성장을 좌우하며, TFP를 유지할 수 있다면 GDP는 9퍼센트를 넘는 성장을 지속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양에서 질로 구조 전환
중국 공산당은 2006년 제16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세 채택한 성명서를 통해, ‘조화 사회’ 건설의 주요 목표와 임무로 9개의 테마를 명시했다. 목표 시한이 2020년이기 때문에 시진핑 시대의 과제를 열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①인치에서 법치로 전환 ②경제 격차 확대 시정 ③취업과 사회보장제도 정비 ④공공서비스 향상 ⑤도덕과 학습 장려 ⑥창조력 향상 ⑦사회질서 유지 ⑧환경보호 ⑨높은 수준의 소강(비교적 여유가 있는) 사회 건설 등이다.
‘통치의 대차대조표’란 관점에서 보면 약점인 ‘부채’ 부문을 정리하고 ‘자산’인 통치기구와 경제모델의 질적 향상에 역점을 두고 있다.
소득의 모자이크 국가 -벌어지는 격차, 재분배의 장벽-
미약한 농촌의 성장
2009년 도시 지역 1인당 가처분소득은 1만 7,175위안(약 292만 원)으로, 농촌 자역 1인당 순수입 5,153위안(약 87만 6,000원)의 3.3배다. 전년대비 각각 9.8퍼센트와 8.5퍼센트 늘어난 것으로 격차가 급속히 벌어지고 있다.
지니계수의 범위는 0에서 1까지이며, 1에 가까울수록 경제 격차가 크다. 사회가 불안정해지기 쉬운 경계점은 0.4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전체의 지니계수는 0.48 전후다.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뒤섞인 가운데 서로 융화되지 못하는 국가를 ‘모자이크 국가’라고 부른다. 대표적으로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이 이에 해당한다. 중국은 소득 격차의 ‘모자이크 국가’가 됐다. 부유층은 더욱 풍족해지고 밑바닥의 저소득층은 아무리 노력해도 상승하지 못한다. 모자이크가 뚜렷해질수록 그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기대 이하의 부동산세 효과
부의 재분배에서 가장 큰 장벽은 고소득층에게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다. 중국에는 상속세가 없고, 개인소득세와 누진과세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는 ‘조세의 조정 기능이 작동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지만 상속세 도입 등 구체적인 대책은 언급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의 저항이 격렬해 세제 개혁을 통한 소득 재분배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다.
부동산세의 도입은 부의 재분배와 더불어 급등하는 주택 가격을 낮추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징세 대상이 신규 구입 주택이나 고가의 물건으로 한정돼 소득 재분배 기능은 기대 이하다.
저항하는 지방정부 -부동산 졸부는 시하폭탄-
토지 매각 수입은 중요한 자금원
주민의 권리를 무시한 채 강행되고 있는 지방정부 및 지방정부 계열 기업의 개발 사업은 1994년에 도입된 ‘분세제’가 계기가 됐다. 국세와 지방세를 명확히 분리해 중앙정부의 몫을 늘린 이 제도는 지방의 힘을 약화시키고 중앙 권력을 강화해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분세제 도입은 지방의 난개발에 불을 붙였다. 지방정부가 부동산 개발을 통해 세수 부족분을 메우려 한 것이다.
2009년 지방정부가 부동산 매각으로 얻은 수입은 전년 대비 63퍼센트 늘어난 1조 5,910억 위안(약 270조 원)이었다. 지방 재원의 절반을 차지했고 일부 지역에선 80퍼센트에 달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전해에 비해 거의 배로 늘어난 2조 9,397억 위안(약 500조 원)이었다.
중국에서는 토지 매각이 지방정부의 주요 자금원이 됐고, 그 여파로 지방정부는 ‘땅 졸부’로 변질돼갔다.
토지재정 모델은 지방정부에 부를 안겨주어 GDP는 늘어나지만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개발에 맛들인 지방 관로가 부동산업자와 짜고 주민을 폭력으로 쫓아내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방의 폭주 저지에 안간힘 쓰는 중앙정부
중안과 지방의 공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방의 혼란이다. 난개발이나 편법 융자는 부패에 그치지 않고 거품 등 경제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 때문에 후진타오 지도부는 중앙의 정책을 말단까지 침투시켜 지방의 횡포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민은행이 금리인상으로 긴축정책을 펴도 지방의 기업과 금융기관은 지방정부의 의향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중앙의 금융정책이 지방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지방이 중앙의 거시경제 정책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일도 있다. 2004년 천량위 상하이 시 당위서기는 원자바오 총리에게 긴축정책 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요청이 천량위 서기를 해임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시진핑 시대의 태동 -후진타오의 섭정 체제-
포스트 후진타오의 향배 -2012년 이후의 섭정-
2010년 10월 18일,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5중전회) 폐막일에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시진핑 국가부주석을 임명하는 인사가 단행된 것이다.
이는 시진핑이 군권 장악을 향한 행진을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후진타오 총서기의 후계자로서 차기 지도자 지위에 오르는 것이 사실상 확정된 순간이었다.
시진핑은 2012년 가을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 2013년 3월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국가 주석으로 선출될 전망이다. 후진타오 역시 국가부주석이던 1999년 군사위 부주석에 취임했고 3년 뒤 당 총서기에 올랐다.
시진핑의 중앙군사위 진입에는 장쩌민 전 총서기 및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 등 일부 장로 및 보수파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노리다
건국 60주년의 중국 역사에서 최고지도자의 후계자 선출은 격렬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덩샤오핑,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의 지명을 받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 및 후진타오 총서기 등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최고지도자로 군림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게는 후계자 지명권이 있었지만 장쩌민과 후진타오에겐 없다. 후진타오가 장쩌민에 이어 총서기에 오른 것도 덩샤오핑이 건재했던 시기에 결정된 인사 조치였다.
시진핑은 후계자를 지명할 절대 권력자가 없는 가운데 후진타오 총서기와 장쩌민 전 국가주석 간 정치투쟁의 결과로 최고지도자 후보에 선출됐다. 후진타오 총서기의 지지를 받는 리커창의 최고지도자 취임을 막기 위해 장쩌민 전 국가주석 등이 내민 카드가 시진핑이었을 뿐이다.
‘포스트 후진타오’ 확정을 계기로 당과 정부의 간부들은 시진핑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고, 시진핑의 구심력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시진핑 등 고급 간부 자제의 모임인 태자당의 세력이 커지고, 후진타오 총서기의 출신 모체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파와의 권력투쟁이 격렬해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후진타오의 출구 전략
후진타오 총서기는 새 지도부에 자신과 밀접한 인사를 심어 영향력을 유지하는 섭정 체제를 노릴 것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공방 포인트가 예상된다.
첫째, 후진타오가 2012년 가을 이후에도 군부의 총책임자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내놓지 않고 군권을 계속 장악하느냐의 여부다.
둘째, 후진타오가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과반수를 자신과 가까운 인물로 채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두터운 신뢰를 보내고 있는 리커창 부총리를 총리로 취임시키고 중앙정부의 실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관심 사안이다.
셋째, ‘포스트 시진핑’의 최고지도자를 확정짓기 위해 후진타오의 복심인 후춘화 내몰골자치구 당위서기를 외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출시킬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포스트 시진핑’을 향한 출발 신호는 울릴 것인가
2007년 발족한 현 체제의 최고지도부에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입김이 닿는 간부가 남아 있어 장쩌민이 변함없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보도 관리 및 사상지도를 맡은 이념 담당, 공안 및 조사를 담당하는 당 규율 검사위원회 서기, 당 정법위원회 서기를 장쩌민파가 장악하고 있다. 후진타오는 2012년 이 자리들을 찾아오고 싶어하며, 후춘화가 그 후보가 된다. 그러나 후춘화의 상무위원회 입성에는 후진타오에 대항하는 세력의 맹렬한 반발이 예상된다.
중국 정계의 권력구도 -저항 세력은 기득권층-
최대 파벌은 공청단파
공청단은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으로 발족해 1957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단원은 14세부터 28세로, 2008년 말 현재 7,858만 8,000명이다. 최고 직책은 서기국 제1서기다.
공청단은 후야오방 전 당 총서기, 후진타오 총서기, 리커창 부총리 등 젊은 간부의 등용문이 돼왔다. 공산당 간부 자리를 노리는 젊은이는 우선 공청단에 들어간 뒤 공산당에 입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진타오 총서기는 공청단을 당내 권력 기반 강화에 활용했다.
경제계에 많은 태자당
태자당은 고위 간부의 자제들의 모임으로 젊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인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시진핑이 태자당이다. 쩡산 전 내정부장의 아들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 저우언라이 전 총리의 양지인 리펑 전 전국이민대표대회 위원장 등이 대표적이다.
시진핑 정권에서도 현역 지도자로서 자리를 유지할 태자당 인맥은 왕치산 부총리, 류엔둥, 보시라이, 리위안차오, 위정성 등이다.
태자당을 하나의 정치 파벌로 간주할 경우 최고지도부에서 공청단파에 이은 제2의 세력에 해당한다. 제5세대는 정계 지도부에 대거 진출했지만 제6세대 이후는 경제계에서 경제 이권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
저항하는 기득권층
공청단파, 태자당, 상하이벌 등 중국 정치 파벌은 정치기반이나 인맥을 토대로 한 분류법이다. 이는 중국 정치를 분석하는 데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후진타오 총서기에 대한 가장 큰 저항 세력은 기득권층이다. 시진핑 시대에도 기득권층의 움직임이 정국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기득권층이란 자원분야 등 국유 독점기업, 해외에서 이권을 얻은 기업 간부, 일부 중앙 및 지방정부 관료를 말한다. 정치-관료-기업이 결탁한 것으로, 부패가 움트기 쉬운 업종이나 관청이 기득권층의 토양이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한 이후 경제 발전은 이권을 낳았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성장 중시’ 노선을 통해 경제는 한층 더 발전했고 이권은 막대한 규모로 커졌다. 그러나 후진타오 정권이 경제성장의 ‘질’을 중시하며 정책을 ‘약자 중심’으로 수정하면서 특권층의 이권 확대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부의 재분배 방식 때문에 기득권층은 후진타오에 대해 불만을 품게 했다.
여전히 발언권을 가진 장쩌민
장쩌민은 여전히 자칭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나 리창춘 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통해 정권 운영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더불어 원로로서 후진타오 총서기는 중요한 시점마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는 듯하다. 시진핑 시대가 와도 장쩌민은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시진핑은 어떤 인물인가 -현장주의 프린스-
시진핑은 1953년 6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국 공산당 원로이자 부총리를 역임한 시중쉰(2002년 사망)이다. 시진핑은 태자당으로서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이 아버지가 1962년 ‘소설 류즈단사건’이라 불리는 책 출판과 관련된 정치 투쟁에 휘말려 실각하면서 시진핑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시진핑은 1969년부터 산시성 옌촨현 농촌에서 노동하는 ‘하방(중국에서 관료화를 막기 위해 당원 및 간부 등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시키는 일을 말한다)’ 됐다.
“몸이 아플 때를 제외하고 1년 365일 거의 쉬지 못했다. 땅굴 같은 집에서 풀을 베고, 가축을 돌보았고, 들판에서 양을 방목했다.”
시진핑은 15세부터 22세까지의 예민한 시기에 익숙지 않은 일을 강요당했다. 1975년 그는 약 7년간의 하방 생활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22세에 명문 칭화대학에 들어가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하방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멀리했기 때문에 입학 초기의 기초 실력은 형편없었고 간단한 화학 방정식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중학교 수준의 수학, 물리, 화학 기초지식을 익혔고, 잃어버린 청춘시절을 만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는 정계에 복귀했고, 1979년 칭화대학을 종업한 시진핑은 겅뱌오 당 중앙국방위원회 비서장 겸 부총리의 비서가 되었다. 그 후 시진핑은 환경 좋은 베이징을 떠나 지방 근무를 자원한다. “최고 간부가 되려면 지방정부 간부의 길을 걷는 것이 좋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는 보수파인 겅뱌오 비서장이 실각하기 전에 아들을 그의 옆에서 빼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판단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지방 근무를 통해 다진 실무 능력
중국 정계는 출신기반이 같은 세력 간의 결속력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장쩌민이 이끄는 ‘상하이벌’이 유명한데, 푸젠벌 역시 주목받고 있다.
자칭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은 1985년부터 1996년까지 푸젠성에서 근무했고, 1993년에서 1996년에는 성의 최고지도자이자 시진핑의 상사인 당위서기를 맡았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푸젠성 성장과 성장대리를 역임한 허귀창 당 규율검사위원회 서기도 시진핑의 상사였다.
적이 없는 것이 장점
시진핑의 정치와 행정 노하우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연안부에서 흡수한 것이다. 경제적 실익을 중시하는 자세도 연안부 근무를 통해 얻었다. 1990년부터 근무한 푸젠성 푸저우시 지도자 시절의 유명한 모토는 ‘마상취변(지금 바로 하자)’이다. 이는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뿐 아니라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전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골수 ‘현장주위자’이기도 하다. 저장성 당위서기 시절, 1년의 3분의 1을 지방 출장으로 보냈다. 한편 이념 공작에 대한 열의는 그리 뜨겁지 않다. 시진핑은 이념보다는 실무를 중시하는 실용파다.
쩡칭훙-시진핑 라인
쩡칭훙은 태자당 출신이며, 상하이벌의 우두머리 격이다. 1989년 상하이 시 당위서기에서 총서기가 된 장쩌민이 상하이 인맥 중 유일하게 그를 베이징으로 데려왔다. 장쩌민의 권력 기반 안정에 쩡칭훙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쩡칭훙은 2004년 무렵부터 장쩌민과 거리를 두었고, 대신 후진타오 총서기에 접근했다. 그는 중국 정계의 막후인물로 불리며 권력의 향배에 매우 민감하다.
2007년 10월 공산당 대회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시진핑을 라이벌인 리커창보다 높은 서열에 올려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시키는 공작을 했다.
시진핑과 쩡칭훙의 관계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정부장을 역임한 쩡칭훙의 아버지 쩡산은 베이징 중난하이에 살 때부터 시진핑의 집안과 친밀하게 교류했다고 한다.
쩡칭훙은 태자당 인맥과 더불어 상하이벌, 그리고 석유 이권을 장악한 석유재벌을 대표하는 존재다. 시진핑 체제에 쩡칭훙의 영향력이 보태지면 경제 발전 우선을 요구하는 기득권층이나, 자원 이권 확보를 중시하는 세력이 힘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군부 내 태자당의 존재도 주목 받는다. 류사오치 전 국가주석의 아들 류위안은 문화혁명 때 농촌으로 하방된 뒤 지방 근무를 했다. 시진핑과 걸어온 길이 유사하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깊은 교류가 있었다. 류위안 등 군부의 태자당이 시진핑의 군권 장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키워드는 ‘민’과 ‘안정’
시진핑이 주도적으로 최고지도부 진영을 짜게 될 ‘시진핑 시대’는 2017년 가을쯤 찾아온다. 2017년 이전까지는 실질적으로 후진타오시대가 이어지는 것이다.
역대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키워드는 마오쩌둥의 ‘건국’, 덩샤오핑의 ‘개혁’, 장쩌민의 ‘발전’, 후진타오의 ‘조화’였다. 장쩌민의 지도이념인 ‘3개 대표론’은 공산당이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적 이익’ 등을 대표한다고 했다. 이는 공산당이 ‘민간 기업인까지 끌어안는 대중정당’으로 탈바꿈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전술이다.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도시와 농촌의 발전, 지역 간 발전(연안부와 내륙부), 경제와 사회의 발전(공평성), 인간과 자연의 조화(환경, 에너지 절약), 국내 발전과 대외 개방 등 다섯 가지 균형을 목표로 했다. 성장 지상주위였던 장쩌민 노선에 대한 안티테제이기도 했다.
시진핑의 첫 번째 키워드는 ‘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2010년 9월 공산당 간부 양성학교인 중앙당교 강연에서 “마르크스주의 권력관은, 권력은 민을 위해 부여된 것이며 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 간부는 인민에게 복무할 의무가 있다”고도 말했다. 국가주석에 취임하면 그는 관료의 부패를 막고 행정 서비스의 질을 높이며 민중의 정부 비판을 완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키워드는 ‘온유(안정 유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온은 사회불안을 억제하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시진핑 정권의 최대 목표인 체제 안정, 즉 공산당 일당 지배의 견지를 내포한다.
시진핑의 사람들 -문화혁명에 농락당한 제5세대-
리커창은 고향에서 신동으로 통했다. 아버지 리펑싼은 낙후된 안후이성의 지방 간부였다. 펑양 현장을 역임한 뒤 안후이성 통일전선 처장(과장) 등을 지냈다. 가난하진 않았지만 시진핑에 비하면 출세를 위한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19세이던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빈 지역인 펑양현 인민공사로 하방됐다. 그곳에서 그는 아침 7시부터 밭일을 했고, 점심 휴식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밤부터 새벽까지 책을 읽으며 독학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노력의 화신이었다.
문화혁명이 일어났던 10년간은 대학 입시가 중단됐기 때문에 그는 문화혁명 후에 치러진 대학 입시 제1기생으로,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법률이었다.
이후 공청단의 정상이었던 후진타오 제1서기 아래서 일하며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1서기로서 정치 기반을 다졌다.
국가부주석 후보 리위안차오, 경제통 왕치산, 유망주 왕양
공산당 중앙조직 부장인 리위안차오 역시 새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이 확실시된다. 후진타오는 리위안차오를 국가부주석(중앙서기국 수석서기)에 앉히고 싶어 하지만 후진타오 반대 세력의 저항이 예상된다.
왕치산은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며 골드만삭스 등 미국 정재계와도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어려움에 빠지는 나세의 시대에 그의 존재감이 부각될 것이다. 차기 정권에서는 수석 부총리로서 거시경제 정책을 지휘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순리지만, 총리로 발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스트 시진핑 레이스 -제6세대의 선두 다툼-
후진타오 직계인 후춘화
제6세대의 출세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는 인물은 후춘화다. 제6세대 중 처음으로 2009년 11월 허베이 성장에서 지방 최고지도자인 내몽골자치구 당위서기가 됐다.
후춘화는 1983년 베이징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한 뒤 1997년까지 14년간 티베트자치구에서 근무했다. 공청단 티베트자치구 위원회 부서기였던 그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역시 티베트자치구의 당위서기였던 후진타오의 가르침을 받았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베이징 공청단 중앙에서 근무한 뒤 다시 티베트자치구에서 약 5년간 일했고,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공청단 최고지도자인 제1서기를 역임했다.
정체되는 정치개혁 -자정작용의 한계-
보수로의 회귀 -‘정치특구’의 좌절-
시진핑 시대의 정치개혁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제기된다.
우선 비관적 시나리오다. 시진핑에게서는 적극적인 정치개혁 의지를 엿볼 수 없고, 보수로 회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총서기로 재임할 2022년까지 공산당의 내부 의사 결정 과젱에 ‘절차의 민주화’를 도입하는 당내 민주주의를 추진할 뿐, 복수정당제 등 당외 정치개혁에는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위로부터의 민주화 과정을 완만히 추진할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해진다. 태자당이기 때문에 더욱 정치개혁에 저항하는 자파 세력을 설득하기 쉬울 것이다. 반부 격차는 확대될 것이고 관료 부패 역시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시진핑이 정치개혁에 나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이 정치개혁의 핵심으로 꼽는 것이 당내 민주화, 즉 중국 공산당 내부이 민주화다. ‘지방 말단조직의 최고책임자 선거’, ‘민주적인 정책결정’, ‘정보 공개’ 등이 공산당 내부 민주화의 핵심 내용이다.
형식적인 직접선거 -수준 이하의 ‘언론 자유’-
국영 언론의 ‘짜고 치기식 질문’
중국 국영 언론사 기자는 정상회담을 보도할 때 자신이 직접 기사를 쓰지도 않는다. 외교부 보도 담당자가 쓴 기사 원고를 받아, 앞부분에 자기 이름을 넣은 뒤 보낸다. 각 언론사의 기사는 기묘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당연하다고 할까, 완벽하게 똑같다. 그들에게는 순서를 바꾸거나 분석을 덧붙이는 권한이 없다.
이러한 기사원고 보도 방식은 당과 정부뿐 아니라 기업의 기자회견에도 적용된다. 기업이 미리 원고를 준비해 기자회견장에서 나눠준다. 기업의 경우 선전비라며 기자에게 돈을 주는 경우도 많다.
자정 능력의 부재 -답보상태인 부패 대책-
4조 4,000억 위안에 달하는 ‘회색 수입’
2010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회색 수입’이 논쟁이 일어났다. 회색 수입이란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는 수입을 말한다. 관료 등이 지위를 남용해 받은 뇌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중국 경제개혁연구기금회의 국민경제연구소 왕샤오루 부소장은 회색 수입 총액이 연간 4조 4,000억 위안(약 784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재산신고제의 허점
2010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규율검사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열린 총회에서 “부패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며 뇌물 단속 강화에 전력을 쏟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채택한 성명서에는 “관료의 재산신고제를 시급히 정비하고, 주택 및 투자자금, 가족의 취업상황을 보고 대상으로 한다”고 명기했다.
이 제도는 2009년 9월 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전회)에서 나온 것으로, 당 중앙이 다시 한 번 불호령을 내리자 나온 조치였다.
공산당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 간부를 대상으로 하는 신고제가 이전부터 시행돼왔지만 신고 내용은 수입에 국한됐다. 부동산과 예금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가족도 신고 대상에서 제외됐다. 더구나 신고서에 금액을 기입만 하면 되며, 증빙서류를 제출할 필요도 없다. 상부기관이 확인하지도 않고, 허위로 기재해도 처벌 규정이 없다.
표류하는 도덕관 -‘주입식 교육’의 공과-
중국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청소년들의 사고와 행동이다. 중국에서는 30세 이상 세대와 30세 미만 세대 사이에 큰 단절이 있다.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으로 사회의 흐름이 180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출생자를 의미하는 ‘바링허우’는 개혁개방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해마다 발전이 지속되는 현실을 목격해왔다. 이들은 극빈 시대의 중국을 알지 못하며 철들었을 때부터 생활이 나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빈부 격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를 봐왔다. 이들은 또 그런 상황을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파악한다. 세계가 넓어지고 있고,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잘 안다. 특히 2011년 전후로 대학을 졸업하는 1980년대 후반 출생자는 치열한 취업 경쟁에 시달리고 있어 사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
중국인들은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외국에 대한 배타적 생각, 즉 ‘배외주의’에 빠지기 쉽다. 2005년과 2010년의 반일시위는 배외주의에 빠진 학생 등 ‘바링허우’ 세대가 중심이 됐다.
중국정부가 이름 붙인 ‘신세대 농민공’은 바링허우 세대 가운데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노동자를 말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도시로 나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온촌 출신이기 때문에 도시 호적은 취득하지 못한다. 교육, 의료, 복지 등에서 차별을 받아 불만이 가득하다.
중화전국총공회의 조사에 따르면 신세대 농민공의 월평균 수입은 1,747위안(약 29만 7,000원)으로, 도시 노동자 월평균 수입의 57.4퍼센트에 불과하다.
불만의 분출구는 외국으로 향하기 쉽다. 바링허우의 이러한 특징은 철저한 애국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중국 공산당은 1994년 8월에 ‘애국주의 교육 실시 요항’을 공표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장쩌민 국가주석이 사회의 단결력을 강화하기 위해 애국주의를 활용했다고 한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
원자바오 총리는 2011년 3월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행한 정부활동 보고에서 “교육개혁을 서둘러, 초중등생의 숙제를 줄이고 창의력 육성에 힘쓰겠다. 초중학생에게 매일 한 시간씩 체육 활동을 보장한다”고 밝혔다. 향후 1년간 정부의 시책을 밝히는 자리에서 총리가 “숙제를 줄이겠다”는 말까지 해야 할 정도로 중국의 교육문제는 심각하다.
결정적 순간을 맞은 협조외교 -세계 2위의 자신감과 경계-
온건이냐 강경이냐 -경제대국의 두 시각-
시진핑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국제 협조라는 기본 노선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무역과 투자를 통해 외국과 상호의존 관계를 더욱 심화할 것이다. 협조노선을 추진해온 후진타오 총서기의 영향력은 적어도 2010년대 후반까지는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시진핑의 독자적인 색깔이 집권 이후 곧바로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의 권력기반이 탄탄하지 못할 경우 대외강경론을 주장하는 보수파에 휘둘릴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이 대국이 됐다는 의식 속에서 외국에 대한 강경노선을 주장하는 보수파는 협조노선을 걸어온 후진타오를 비판하곤 했다.
군사대국의 현실주의자 vs. 책임대국의 자유주의자
강경노선이 역으로 중국에 불리한 글로벌 환경을 조성했다는 반성에서 2010년 가을부터 노선 수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됐다. 2010년 10월 배이징에서 열린 5중전회에서 그런 주장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2010년 가을 이후 중국은 “남중국해에 ‘핵심적 이익’이 있다”는 표현을 비공식 협의에서도 사용하지 않게 된다. 10월 29일에는 동남아시아 국가연합과 남중국해에서의 분쟁 방지를 위한 지침 작성에 합의했다. 주권문제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해가는 전술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광양회’에 “호시탐탐 패권을 노린다는 의미는 없다”는 선전공작도 강화했다.
베이징 컨센서스권의 실체 -안정과 번영의 활-
베이징 컨센서스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립 축으로 했을 때, 각국이 어느 진영에 가담하고 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 계기가 2008년 3월 티베트자치구 수도 라싸에서 발생한 대규모 소요 사태다. 당시 중국의 강경진압에 대해 각국이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가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대부분의 서방 국가는 “힘으로 인권을 탄압했고 소요를 강제 진압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110개 이상의 국가가 중국 정부의 입장에 이해와 지지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중국 측이 거론한 64개국은 <지도 1>과 같다.
중국은 64개국 외에 아프리카, 아랍 국가와 상하이협력기구도 지지를 표명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건국이후 120여 개의 개발도상국에 경제 원조를 제공했는데, 원조를 받은 나라들이 베이징 컨센서스권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벨평화상 시상식 불참
베이징 컨센서스권의 구체적인 범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중국은 2010년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리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각국이 불참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 윽 요구에 따라 시상식 참석을 거부한 것으로 확인된 나라는 17개국이다.
17개국 중 상당수가 인권문제로 서방의 비난을 받고 있고, 중국과 자원 등을 통해 경제관계를 강화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베이징 컨센서스권에 속하지 않은 국가는 경제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사실상의 제재를 받는다. 독일 괴팅겐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외국 정상이 티베트 불교 최고지도자 잘라이 라마 14세와 회담했을 경우, 그 국가의 중국에 대한 수출은 2년에 걸쳐 연평균 8.1퍼센트 감소한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이 쥐고 있는 경제 카드의 위력은 크다.
자유와 번영의 활에 대항
베이징 컨센서스권의 확대와 결속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당 지배를 통해 성공하는 중국 모델을 응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모델의 송공 비결은 중국 공산당의 통치 능력에 있다. 중국은 문제의 발견과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당 지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 시스템과의 거리감
중국은 어느 수준까지 기존 국제 시스템에 도전하고 어떠한 국제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결론은 세 가지다.
첫째, 중국은 서방의 금융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욕은 보이지만, 공산당 정권 내에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모색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중국이 노리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개혁 대상은 한정적이다. 즉 개혁 대상은 중국을 축으로 한 신흥 개발도상국의 발언권 확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역 투자 면에서 세계무역기구 등 기존 규칙들을 개정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셋째, 중국이 어느 수준까지 새 질서를 지향할지는 미중관계에 좌우된다. 대미관계가 악화되면 중국은 자국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새 질서 구축에 나설 것이다.
다극화의 길 -1초, 1준초, 다강 체제로의 재편-
중국은 향후 10~20년간의 세계질서에 대해 어떤 구상을 갖고 있을까.
공식적으로는 다극화를 추구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뒤를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 일본이 추격하는 1초4강의 현 구도에 인도 등 신흥국의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쇼크로 상징되는 금융위기가 발생한 것이 중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을 모색하게 만드는 전기가 됐다.
중국은 다강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앞서가며 3위 이하와의 거리를 넓히고 있다. 나의 견해로는 국제사회의 선두 집단은 단순한 이극체제나 다극체제가 아닌 1초(미국), 1준초(중국), 다강(일본, 러시아, 유럽연합 등)의 3중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
G2론의 허와 실 -깊어지는 중미 간 의존과 불신감-
중국이 두 나라 간 외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중국에 대해선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①강경노선인 봉쇄 및 억제 ②협조노선인 관여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미국의 대중정책은 이 강경과 협조노선 사이를 오간다.
오마바 정권 이전의 대부분 미국 정권은 발족 초기에는 강경노선을 걷다가 2년 정도 지나면 협조노선으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미국에서 대중정책은 지지단체의 표와 직결된다. 외교라기보다 국내 정치인 셈이다. 민주당 정권 지지단체는 인권 및 환경단체와 노동조합 등이며, 공화당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은 군사적 매파 및 종교 보수파다. 공화당 지지 세력은 중국에 대해서 강경노선을 지향한다.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은 많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미국 국채를 대거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위상 등을 감안해 중국과 경제관계를 안정시키고 강화하려는 정책을 선호하게 된다. 미국정부는 여론에 신경 쓰면서 대중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북중 혈맹의 복구 -북한 외교의 주역은 중국-
2010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북중관계에 두 가지 요소가 추가됐다.
하나는 국제협조보다 국익을 중시하는 보수파 및 군부의 발언이 강화됐다는 점이다. 군부와 보수파는 원래부터 북한에 우호적이며, 이런 중국의 내정 상황이 북중관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는 미국에 대한 외교 국방 전략이다. 대미 노선이 대항에 비중이 실리면서 덩달아 북한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중국 의존도를 높이는 북한
한국과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거부한 채 중국 측에 북한을 설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을 둘러싼 외교의 주역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고, 한국, 미국, 일본의 대북정책은 한계에 봉착했다.
중국도 핵개발 등 군사행동에 나서는 북한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 원조 카드의 효력은 한계가 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에 대해 스인훙 중국인민대학 교수는 “어느 정도 영향력은 있지만 사실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한다. 포를 쏘아대는 북한의 군사행동에 대해 후원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 불안정을 걱정하는 이유
북한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중국이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무장병과 난민이 국경을 통해 중국으로 밀려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붕괴한 뒤 한국 주도로 통일국가가 탄생했을 경우, 중국은 처음으로 미군이 주둔하는 국가와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된다. 미국의 감시 레이더에 중국의 군사정보가 속속들이 간파될 가능성이 높다.
통일국가의 탄생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에 사는 200만 조선족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게 된다. 조선족의 독립의식이 높아지면 티베트나 위구르 등 다른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지며, 이는 중국 공산당의 핵심적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군비 증강으로 새로운 세력권 구축 -안보 균형의 변화-
중국 지도부의 최대 세력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중국 군부는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외교 및 안보 정책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발언권도 강력하다. 이는 공산당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약 200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중앙위원 중 군부 인사는 21퍼센트에 달해 태자당(19퍼센트)이나 공산주의청년단(10퍼센트)보다 많다. 군부가 중국 정계의 최대 세력인 것이다. 반면 외교부는 1~2퍼센트에 불과해 일본에 비해 큰 힘이 없다. 군부가 외교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중국 특유의 권력구도가 자리 잡고 있다.
국방을 중시하는 시진핑
2022년까지 이어질 시진핑의 중국은 군사 면에서 크게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군비 증강은 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에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국산 항공모함을 여러 대 배치하고 제5세대라 불리는 최신예 전투기도 배치하기 시작했다. 2020년 무렵 중국의 군사력은 기술면에서 서방에 여전히 뒤질 것이다. 운용 능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러시아 의존에서 벗어나 중국 자체 기술로 무기체계를 갖추게 돼 미사일이나 해군의 항공 전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될 전망이다.
해양 권익에 대한 방어권 확대 -대양 해군의 실상-
중국이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사전략을 제시한 것은 1993년이다. 방위 범위를 대륙 국토에서 동중국해, 남중국해의 해양 국토로 확대해 해양 권익 방어를 명시했다. 2008년 이후 중국-대만 관계 개선에 따라 대만을 주 전장으로 간주했던 국방전략은 영토와 해양자원 등의 방어로 비중이 옮겨갔고, 군의 방어 범위는 영토, 영해 등 외부로 확대되고 있다.
제1열도선에서 제2열도선으로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는 대만에 가깝고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미국과 군사동맹 관계에 있는 일본과 대만, 필리핀이 중국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다. 중국 해군은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1982년 근해 방어전략을 수립했다. 근해란 캄차카 반도에서 치시마 열도, 일본 열도,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의 안쪽을 말한다. 이를 ‘제1열도선’이라 부른다.
중국 해군은 제1열도선에서 영향력을 확보한 뒤 이제 태평양 쪽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오가사와라 열도에서 사이판, 괌을 연결하는 ‘제2열도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착실히 움직이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했던 것처럼 ‘어선→조사선→군함’ 순으로 활동 범위 확대를 기정사실화하는 작업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오키나와와 미야코지마 사이는 중국이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중요한 루트다.
속속 진행되는 항공모함 건조
중국은 구소련에서 항공모함 ‘바랴크 함’, ‘민스크 함’, ‘키예프 함’을 도입했다. 국산화 연구에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밀한 대함 미사일이 개발된 현대전에서 항공모함은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 항공모함의 탑재기나 호위 구축함 건조를 고려할 때 비용대비 효과 면에서 항공모함이 아니라 미사일이나 잠수함 증강에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는 편이 낫다.
중국이 최초로 건조하는 국산 항공모함은 핵이 아닌 디젤기관 등으로 추진력을 얻는 재래식 항공모함으로 보인다. 배치 장소로 검토하고 있는 곳은 남중국해를 관할하는 남해 함대다. 서사군도나 남사군도에서 동남아 국가들과 영유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항공모함의 존재는 큰 억지력이 된다.
중국의 하와이가 해군 요충지로
하이난 섬에서는 대만과 필리핀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이나 말리카 해협을 거쳐 인도양으로 쉽게 나갈 수 있다. 남중국해의 해군 군사력도 강화된다. 칭다오 등 북부 기지에 비해 미국과 일본의 대잠수함 초계 능력이 높은 동중국해를 피할 수 있다.
방위를 넘어 세력권 확보로 -핵, 미사일, 우주-
점차 비중이 높아가는 핵전력
중국은 소련의 핵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1955년 독자적인 핵개발을 지시했고 1964년 최초로 원폭실험을 실시했다. 핵 클럽 회원이 되면서 유엔 가입 등 중국의 국제적 지위는 높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바마 정부의 핵군축 제안에 반발하며 핵과 미사일 전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군의 주력 탄도미사일은 고정식 액체연료 추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찰위성 등에 발사 징후가 쉽게 포착되기 때문에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고체연료 추진 방식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고 있다. 동시에 탄도미사일의 다탄두화 및 순항미사일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신형 진급 핵잠수함에 탑재하는 사정거리 8,000킬로미터로 추정되는 탄도미사일과 관련해 미 국방부는 “빠르면 2010년 초 실전 배치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측했으므로 조만간 실전 배치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군사 외교의 전략성 -미국의 지배권 견제-
중국은 합동 군사훈련 대상국을 늘려가고 있다. 우선 2002년 키르기스스탄과 반테러 합동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중국,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이 가입한 상하이협력기구를 통해서도 2003년부터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러시아와도 2005년 초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중국 국방부에 따르면 2002년 이후 2010년까지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한 국가는 20개국 이상으로, 횟수는 44회에 달한다.
계속 늘어나는 국방비 -군권 장악과 낮은 투명성-
미국과 유럽은 감소, 아시아는 증가
중국의 2011년 예산에서 국방비는 전년 대비 12.7퍼센트 늘어난 약 6,011억 위안(약 102조 원)에 달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외한 각국이 경제 발전 덕에 국방비를 늘리고 있다. 인도는 2011년도 예산안에서 국방비를 전년 대비 11.6퍼센트 늘렸다. 중국의 군비 증강은 아시아의 군비 확장을 촉발해 군비 경쟁 양상을 띠고 있다. 자원과 관련된 해양 영유권 분쟁을 계기로 군비 경쟁, 특히 해군력 및 공군력의 증강이 두드러진다. 아시아에서 국가 간 신뢰는 진전되고 있지만 군비 확장을 막을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해군력 증강은 대양 해군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자원문제로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해군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왔던 인도는 이제 거꾸로 러시아와 군사 협력을 강화하려 한다.
시진핑 시대에도 중국의 국방비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적인 여유와 더불어 시진핑이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부를 배려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GDP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4퍼센트다. 중국 국방대학의 국방경제연구센터 주임인 장루밍 교수는 국방예산은 GDP의 2.6에서 2.8퍼센트 규모가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세계 전략과 중국의 속내 -외교 경향과 대책-
외교문제는 국제사회 갈등의 핵 -중국 어선 충돌 사건-
중국의 공식 영유권 제기는 1971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센카쿠 열도는 오키나와의 일부로서 미국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따라 1972년 일본으로 돌아왔다. 중국과 대만이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유엔 조사에서 센카쿠 열도 주변 해역에 석유가 매장 돼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1971년이다.
온건파이기에 더욱 강경하게
일본 외무성 간부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중국의 행동 패턴으로 ①사실을 부인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②자신들의 주장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 기정사실화한다 ③다른 주제로 반격한다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센카쿠 열도 어선 충돌 사건에 대한 대응이 그 전형적인 예다.
하나의 동아시아는 불가능한 미래? -역사문제 재인식-
통화 폭락 등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부족한 외화를 빌려주기로 한 CMI 협정의 핵심은 각국의 자금 각출 비율이었다. 총 1,200억 달러인 CMI의 80퍼센트를 한국, 일본, 중국 3국이 부담하고 그 비율을 ‘1:2:2’로 결정했다. 각출 비율 순위는 국가의 경제력을 반영했다.
대등한 입장이 되면서 중국과 일본은 서로 양보하기가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됐다.
외교정책 결정의 프로세스 -수뇌 공략이 관건-
집요함은 역효과를 낳을 수도
중국은 체면을 중시하는 나라다. 상대가 집요하게 요구하면 체면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일본 총리를 역임한 한 인사는 “대중정책은 중국 내정을 배려하면서 추진해야 한다. 무대 위에선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무대 뒤에선 원하는 것을 요구하며 다른 안건과 거래하는 외교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은 그런 노하우가 없다”고 말했다.